계획 변경(5)
확실히 그들의 능력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초인이라는 단어가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눈 앞에 있는 인간과 비교한다면······.
루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 생각해도 자신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가문의 신용은 지켰으니 다행······인가?’
문득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타계한 어머니, 다들 남자 하나씩 잡아서 결혼한 동생들, 그리고······아버지.
‘큰딸이라고 있는 게 시집은 안 가고 있다가 이렇게 됐네요. 아빠, 미안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울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게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눈물이 또르르 흐른다.
아니, 와르르 쏟아졌다.
폭포처럼 눈물을 뿜어내는 루나를 본 안도혁의 표정이 급격하게 변했다.
“······뭔데?!”
근래에 이렇게 당황한 건 처음이다. 안도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루나는 숨통이 막힐 정도로 겁에 질려 있었지만, 안도혁은 딱히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저 생각에 너무 깊게 잠겨, 앞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어디서 손수건을 하나 더 꺼내온 안도혁은 꺽꺽 울어대는 루나의 얼굴을 닦아냈다.
“엉엉, 아빠아.”
“아니······뭔데, 대체.”
처음 보는 여자가 눈앞에서 울어대는 걸 본 심정은 복잡하기만 했다. 심지어 자신이 납치한 인간이니 더더욱.
‘납치할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상황이 약간 꼬였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루나는 부은 눈을 매만졌다.
약간 진정이 된 듯하자 안도혁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대체 왜 우는 겁니까?”
“지, 집에 보내줘요오.”
“당신 집을 내가 어떻게 압니까? 알아서 가야지.”
안도혁은 짜증난다는 듯 담배를 한 대 더 물었다.
“······그, 그러면 나, 그냥 보내 줄 거에요?”
잠시 루나를 노려보던 안도혁의 눈가가 꿈틀했다.
이해했다.
“누굴 시정잡배로 봤나 본데, 뭐, 이해는 합니다. 야밤에 납치해오듯 데려온 저도 할 말은 없죠. 그렇다고 사람을 그런 쓰레기로 보진 않았으면 좋겠네요. 어디까지나 당신을 데려온 건 거래를 위해서였습니다.”
연기가 흩날린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씁쓸한 표정으로 안도혁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안도혁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루나는 울음기 가신 눈을 말똥말똥하게 떴다.
‘이것도 예상 못했는데?’
각오는 안 되었지만, 무슨 짓을 당할지 어느 정도의 예측은 하고 있었다. 상대방이 저렇게 신사적으로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창가로 다가간 안도혁, 그는 창문을 열더니 손짓했다.
“가시죠. 아까 그곳까지 데려다 드릴 테니.”
여긴 3층이다. 밖으로 나가는데 왜 창문을 여는 걸까. 이 사람과 자신의 상식선이 다른 곳에 놓여있음을 루나는 깨달았다.
순간, 심야의 강한 바람이 창문을 타고 불어왔다.
휘이잉
대머리와 면도한 머리는 같지 않다.
모근이 살아있는 두피는 남아 있는 까끌함으로 옷이나 모자를 잡아 준다. 반면, 대머리는 모자의 재질에 신경을 써야 한다. 까딱 잘못하다간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니까.
바람이 안도혁의 두건을 부드럽게 벗겨냈고, 루나와 안도혁의 눈은 동시에 커졌다.
안도혁은 빛과 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루나는 그 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지도 못했다. 손이 두건을 잽싸게 고정하는 결과만 보였을 뿐이다.
“······.”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안도혁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봤냐?”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루나는 상대방이 지금 질문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저건 그냥 확인 작업이다.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안도혁은 고개를 떨궜다.
“아오.”
어쩐지 두건을 이상하게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보통은 두건을 눈을 가릴 정도로 눌러쓰진 않는다.
‘머리카락에 눈썹까지 빠져버린 모습을 가리기 위해서구나.’
어쩐지 더 이상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저 거대한 덩치가 힘이 쭉 빠진 모습은 마치······.
루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풋.”
“웃지 마! 이게 웃겨?!”
얼굴이 시뻘개진 안도혁. 루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그것 때문에 웃은 건 아니에요.”
“그럼 뭔데!”
대답하려니 할 말이 궁해졌다. 갑자기 귀여워 보여서 웃었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루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비밀로 해 줄게요.”
이 여자를 산중에 묻어 버려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안도혁의 고개가 들렸다.
“······진짭니까?”
“조건 하나만 들어주면.”
“······조건?”
잠시 후, 루나는 밤하늘을 날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난다기보다는 나는 것처럼 뛰는 사람 등에 업혀 있는 것이였지만.
“우와! 와아아아!”
파아아아
세찬 공기가 기분 좋게 얼굴을 간질였다. 땅 아래가 개미처럼 작아 보인다.
하늘로 떠오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땅으로 몸이 급격히 추락했지만, 루나는 하나도 걱정하지 않았다.
고공에서 떨어졌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양이처럼 부드럽게 착지한 안도혁의 허벅지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더니, 다시금 몸을 창공으로 띄워 올렸다.
루나는 깔깔 웃었다.
‘어렸을 때 꾼 꿈 같아!’
모험가를 동경하던 어린 시절 꾸던 꿈. 아직 소녀였던 어린 시절의 철없는 망상.
망상이 아니었다. 여기, 현실에 생생하게 펼쳐져 있다.
동심으로 돌아간 루나가 소리쳤다.
“별도 따 줘요!”
“······무립니다.”
인간 스카이콩콩이 된 안도혁은 군소리 없이 하늘을 밟았다.
하늘의 공기는 상쾌했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기분을 느끼긴 쉽지 않다. 아니, 보통은 평생 가도 무리다.
어느 지붕 위에 착지한 안도혁은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그라도 이런 짓을 장시간 하는 건 힘든 일이다.
“어떠십니까?”
“최고에요! 조금만 더 해줘요!”
“아니······.”
당신 벌써 한 시간 동안 이러고 있었는데라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한숨을 내쉬며 허벅지에 다시금 힘을 주었다.
“꽉 붙잡아. 날아오를 테니까!”
“정말?”
무시무시한 압력이 발끝에서 터졌다. 발판이 된 어느 신전의 지붕이 상처를 입었고, 그 반동으로 두 사람은 하늘을 날았다.
하늘을 걷고, 하늘을 뛰고, 하늘을 밟고, 하늘을 날아오른다.
만월의 빛은 찬란했다. 만약 보름달에 겹친 두 사람을 누군가 보았다면, 신화 속의 한 장면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으리라.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이 즐거운 시간에도 예외는 없다.
어느 순간 착지한 안도혁은 더 이상 뛰어오르지 않았다.
“자, 도착했습니다.”
아쉬운 표정으로 루나는 등에서 내렸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균형을 잡지 못하자, 안도혁은 그녀의 목을 잡아 세웠다.
목이 잡혀 서긴 처음이다. 루나는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고, 고마워요.”
안도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꿈결 같은 시간이었다. 루나는 눈을 감았다.
‘이런 느낌. 다시는 느끼지 못하겠지.’
스무 살의 어린 일탈도 잠시다. 언젠간 사회의 톱니바퀴가 될 몸이다.
가문으로 돌아가 사교 교양을 쌓고, 적당한 남자 하나를 데려와 결혼하고, 대를 이을 아이를 낳고, 그러다 점점 나이를 먹는······.
‘싫어!!’
그저 무미건조하게만 살았으면 모를까, 이번 여행으로 알아버리고 말았다.
이미 꺼져버렸다고 생각했던 열정의 잔향이나마 찾아볼 생각이었지만, 불씨는 아직 죽지 않았다. 타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저기, 잠시만요!”
안도혁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이번엔 또 뭡니까.”
“내일 아침! 내일 아침에 다시 와 줄 수 있어요?”
“어려운 건 아니지만.”
“그럼 꼭 다시 와 줘요! 약속해요!”
양손으로 그의 손을 꼭 잡는 루나의 모습에 안도혁은 이 사람이 아까 전과 같은 사람인지 의심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거절할 이유는 딱히 없다. 안도혁은 선선히 답했다.
“해 뜰 무렵에 오면 되겠습니까.”
“좋아요. 꼭 오셔야 해요!”
고개를 끄덕인 안도혁은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을 아련하게 바라보던 루나는 급히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마치 이 밀회를 아무에게도 들키기 싫다는 듯이.
뭐, 결론만 따지면 들켰다.
숙소에 돌아와 친구를 한참이나 기다렸던 서석진의 눈이 샐쭉해졌다.
“심야 데이트?”
“······아니다.”
“좋을 때네?”
“아니라고.”
“누구는 사내놈이랑 면담하고 있었는데, 친구라는 놈은.”
“아니라고 했지.”
“얼굴도 진짜 예쁘더만! 머리도 찰랑찰랑하더만! 아리따운 은발이더만!”
“글쎄 아니라니까!”
고래고래 고함쳐 보지만,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서석진의 눈을 본 후 안도혁은 변명을 그만두었다. 저건 말해봤자 설득할 수가 없다.
“노총각으로 늙어 죽을 생각은 없었나 보네?”
“······.”
“하긴, 너 좋다는 여자가 아예 없진 않았지.”
“······.”
“근데 하필, 이 시점에, 여기서?”
“이 새끼가 진짜.”
빡
“아, 왜 때려! 왜 때리는데! 내가 틀린 말 했냐고!”
“닥치고 그 요정한테 뭘 말했는지나 읊어봐!”
주의를 간신히 환기시킨 안도혁은, 서석진이 정말 쓸데없는 것만 물어보고 왔다는 사실에 좌절감을 감추지 못했다.
“······진짜 물어볼 게 그것밖에 없었냐.”
“그럼 뭘 물어봐야 하는데? 가르쳐주고 가던지.”
“머리는 왜 들고 다니냐? 두고 다녀, 그냥!”
“아, 그럼 네가 거기 있던지! 나도 데이트 잘할 자신 있는데!”
둘의 설전은 새벽까지 이어졌고, 듣다 못한 숙소 주인이 따지러 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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