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밖은 위험해(3)
그 말을 듣자마자 소문의 진위를 파악했고, 이는 사실로 밝혀졌다. 물량이 있기는 하단 소리다.
알리시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로판 상회가 주최하는 경쟁 입찰에 참여했으나, 최상위 귀족들이 온 세계에서 몰려들어 부를 과시하는 자리에선 끽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애초에 지불하는 액수는 단위부터가 달랐다.
'그럼 상행을 할 때 따라가 봐야지!'
로판 상회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의 목적지를 들키면, 지금까지 있어 왔던 안정적인 공급처가 위협을 받는다는 걸 뻔히 알고 있었다.
상행은 항상 비밀리에 출발했고, 알리시아는 무국적 지대 쪽으로 갔다는 소리 외엔 어떠한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알리시아는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상행 쫓아갈 거야. 병사들 좀 빌려줘요."
집안에선 난리가 났으나, 딸의 완고한 고집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꽥꽥거리는 딸의 잔소리를 듣다 지친 아버지는 충직한 기사 한 명과 시녀 한 명, 병사 10명을 붙여 주었다. 호위 역할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
오판이었다. 무국적 지대로 진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알리시아는 산적들의 습격을 받았다.
"상처 하나 없이 잡아라."
"귀중한 인질이다!"
누군가가 알리시아가 무국적 지대로 떠난다는 사실을 알고, 치안이 좋지 않은 그곳에서 그녀를 납치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코델은 훌륭한 기사였고 다른 병사들도 정예에 가까웠으나, 작정하고 달려드는 산적들을 퇴치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도주를 택했다. 그러나 도망치고 또 도망친 결과는······.
알리시아는 고개를 떨구었다.
"죄송해요, 코델 경. 그리고 병사 여러분과 안나도. 제 욕심 때문에 일이 이렇게 돼 버렸어요."
그나마 알리시아는 살 수도 있겠지만, 나머지의 목숨은 보장할 수가 없다. 특히나 알리시아의 시녀로 따라온 안나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다 못해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인질 가치가 없는 여자가 산적 떼에게 붙잡힌다면, 그 말로는 뻔하다.
코델은 입술을 깨물며 외쳤다.
"지금이라도 도망치십시오. 저와 병사들이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보겠습니다!"
다른 병사들도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칼을 빼들었다. 목숨은 소중하지만, 여기서 죽는다면 코델리아의 가문이 가족들을 챙겨 주리라.
눈물겨운 기사도에 감동할 생각은 없는지, 산적들은 실실 웃으며 다가왔다.
"포기해도 되는데?"
"아가씨만 넘겨 주면, 당신들은 보내 줄게."
코델은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닥쳐라! 내가 죽으면 죽었지, 결코 그와 같은 일을 용납할 수는 없다!"
말이 좋아 인질이지, 돈을 뜯어낸 후에 알리시아가 무슨 꼴을 당할지는 알 수 없다. 무국적 지대에 사는 인간, 그것도 산적이 과연 정직하게 몸값을 받고 그녀를 풀어줄까? 코델은 그와 같이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고, 그의 판단은 옳았다.
코델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여기가 내 무덤인가.'
죽기에는 이른 나이다. 그러나 기사로서의 생이란 그런 것.
죽음에 대한 각오를 굳힐 무렵, 뒤에서 팔짱을 끼고 바라보던 서석진이 어색하게 손을 들었다.
"어, 그러니까, 지금 나온 사람들이 나쁜 쪽인 거에요?"
분위기상 누가 봐도 그러하다. 각오를 다지려던 코델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산적들이오. 아가씨를 납치하려는 속셈이오."
그 말에 서석진의 눈동자가 살짝 가라앉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산적들 쪽을 쳐다보았다.
"아저씨들, 산적들 맞아요? 뭔가 착오나 그런 게 있는 게 아니고요?"
산적들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건 뭐지?"
"뭔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잘 생겼는데?"
"저 놈도 잡아서 팔아버리자.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겠어."
여기까지 들었다면 더 이상의 근거는 필요하지 않았다.
코델은 서석진에게 외쳤다.
"도망치시오! 상관없는 사람을 끌어들일 수는 없소. 염치 없는 말이지만, 아가씨도 데리고 도망쳐 주실 수 있겠소?"
서석진은 대답 대신 걸음을 옮겼다.
"기사 아저씨가 맘에 드는 것도 있지만, 산적이라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일이지. 도와 드릴게요."
어느덧 서석진의 등을 바라보게 된 코델의 표정에 당혹감이 서렸다.
체격을 보면 안다. 분명히 어느 정도 단련을 한 인간의 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많은 인원수를 상대할 수는 없다.
그 때, 코델은 검을 잡아가는 서석진의 손바닥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저 굳은살은······?'
혼자서 무리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서석진을 보며, 산적들은 어처구니없어 웃음도 흘리지 않았다.
대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를 우르르 둘러싸 덮치기 시작했다.
"족쳐!"
"병신으로 만들어 버려!"
화들짝 정신을 차린 코델은 그 상황을 좌시할 수가 없었다.
"다, 다들 공격하라! 가만히 있을 셈인가!"
그러나 그의 말은 다음 순간 묻혔다. 하늘을 찌를 듯한 비명 때문이었다.
"끄아아!"
"으아아악!!"
한순간이었다.
순식간에 십여 명의 사람들이 다리를 붙잡고 뒹굴었다. 그들은 모두 다리 하나가 잘려, 폭포처럼 쏟아지는 상처를 붙잡고 울부짖고 있었다.
피가 뚝뚝 흐르는 검을 들고, 서석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손짓했다.
"뒈지고 싶지. 이 산적 새끼들아."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 몇 명의 산적들이 주저하듯 앞으로 움직였고, 서석진의 검은 다시 한 번 빛을 뿜었다.
촤악
분명히 소리는 한 번이었는데, 세 명의 다리가 잘려나갔다. 울부짖는 사람이 늘어난 것을 보며 서석진은 소리쳤다.
"내 친구였으면 니들은 살아서도 못 돌아갔어. 당장 이리 튀어와, 다리 하나로 봐줄 테니까!"
산적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상대는 사실상 한 명. 그러나 승산이 없다. 양떼 속에 호랑이가 뛰어들어도 저것보단 덜 위협적일 것 같았다.
결정은 순식간이었다.
"도, 도망쳐!"
"으아아악!"
산적들은 자신이 먼저라는 듯 앞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짓밟히고, 밀쳐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병신이 된 산적들도, 네 발 짐승이라도 된 양 땅바닥을 기어서 도망갔다.
좌중에서 적들이 사라지기엔 얼마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산적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주인 잃은 다리만이 열 짝 가량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을 뿐이었다.
서석진은 굳이 그들을 뒤쫓지 않았다. 그는 그저 산적들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검을 집어 넣을 뿐이었다.
순식간에 저승에서 이승으로 내팽겨쳐진 듯한 기분이 된 알리시아 일행은 눈앞의 인간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서석진은 그들을 흘끔 돌아보더니, 모닥불로 다시 다가와 웅크려 앉았다.
"이제 방이 좀 남겠네요. 편하게들 계세요."
그 말이 끝나자, 탄성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대, 대단하다."
"우린 이제 살았어!"
시녀인 안나는 울음까지 터뜨렸다.
"흐어엉. 아가씨, 이제 살았어요. 살았다구요."
모두들 서석진에게 다가와 감사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서석진은 사람 좋게 그들 한 명 한 명과 악수를 해 보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 지······."
"괜찮아요, 괜찮아."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잊어도 괜찮아요."
"혹시 도와 드릴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술이라도 한 병 있나요?"
다른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고 있자, 코델은 서석진의 앞으로 다가가 목례했다.
"소문이 자자한 초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서석진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대답 대신 웃었고, 좌중은 다시 한 번 탄성을 내뱉기 시작했다.
"초인이라고?"
"세상에, 초인이라니."
인간의 한계를 넘은, 그 무력이 하늘을 찌른다는 초인. 그 중 한 명이 눈앞에 있다. 사람들은 이 상황을 천운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석진은 술이 없어 아쉬울 뿐이었다. 입맛을 다시는 그의 옆얼굴을 누군가가 몽롱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와아······.'
알리시아의 눈은 풀려 있었다. 볼에 홍조가 감도는 것은 모닥불 탓만이 아니리라.
영웅담에서 나올 법한 사람이 여기 있다. 생긴 게 조금 이질적이긴 하지만, 분명히 최고 수준의 미남이기도 하다.
알리시아가 막 서석진에게 다가가려 할 때, 모닥불 앞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다가왔다.
"뭐야, 이 상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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