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에서(7)
꽤 오랜만이었다. 남자는 슬쩍 눈을 감았다.
‘힘을 제대로 쓴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지?’
항상 힘을 제어했다. 누구를 상대하더라도, 무엇을 상대하더라도.
세상은 그에게 두부나 다름없었다.
넘치는 힘을 본격적으로 제어할 수 있게 된 순간부터 그는 비로소 사람을 상대할 수 있었다.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에게 여전히 세상은 두부였다. 안 부서지게 잡을 방법만 알게 됐지, 두부가 다른 재질로 바뀌는 건 아니었다.
안도혁은 살짝 심호흡을 했다.
주먹을 가볍게 쥐고 땅을 꽉 밟았다. 허리를 틀어 몸을 회전시켰다.
발끝에서 전달된 힘이 다리로, 다리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주먹으로 향한다.
표적이 날아오고 있었다.
푸르고 거대한 꼬리. 인간의 몸 따위는 한순간에 짓뭉갤 중량의 꼬리다.
안도혁은 거기에 거침없이 주먹을 날렸다.
폭음에 가까운 파육음이 들렸다.
뻐어억
천룡족은 세 용족 중 유일하게 하늘이 허락되어 있다.
다만, 하늘을 날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몸이 가벼워야 한다. 뼈 사이사이에는 빈 공간이 있고, 날개를 움직이기 위한 근육에만 대부분의 힘이 할양된다. 덩치도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라 기초 근력도 떨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용족끼리의 문제지, 다른 종족과 비교할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중량 자체가 다르다. 가지고 있는 힘이 다르다.
그렇기에 지금 벌어진 상황은 어처구니없을 수밖에 없었다.
-크아아악.
아르키피라는 박살나버린 자신의 꼬리를 감싸며 울부짖었다.
뼈가 드러나고 살이 터져나갔다. 주먹과 닿은 부위가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기분이 들 정도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변신도 안 하고 도대체 어떻게?
안도혁은 팔을 붕붕 휘둘렀다.
“아예 끊어버릴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단단하군.”
순간 그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아르키피라의 얼굴 부근에서 나타났다.
용족의 뛰어난 동체시력이 아니면 볼 수도 없었다. 기겁한 아르키피라는 안도혁을 앞발로 거세게 쳐냈다.
공격하기 전에 공격받으면 중량의 차이 때문에 튕겨 나갈 수밖에 없다. 바닥으로 튕겨 나간 안도혁은 다시 도약할 준비를 했다.
그 때, 땅이 진동했다.
쿠르르르
“응?”
땅이 아니라 배가 진동했다. 바다 위에서 지진이 나는 것도 아닐 텐데.
원인을 파악할 수 없었다. 슬쩍 아르키피라를 바라보니, 짐승의 아가리가 분명한 그 입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죽어라, 놈!
배 위에 있던 나뭇조각 수십 개가 하늘로 떠오르더니 안도혁에게 날아들었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날아온 것이다!
조화라고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다.
파파팟
안도혁은 갑작스레 날아든 공격을 어떻게든 피해냈다. 그러나 공격은 한 번이 아니었다.
배 위에 있던 모든 물건들이 그에게 날아들었다. 나뭇조각부터 사과 상자에 이르기까지.
사방팔방에서 날아드는 기이한 공격에 안도혁은 당황했다.
펄럭대는 밧줄을 잡아채니 머리 위에서 메인 마스트가 떨어진다. 간신히 피하자 닻이 몸으로 날아든다.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아르키피라는 허둥지둥하는 안도혁을 보며 실소를 머금었다.
-크크큭. 그대로 춤이라도 추거라.
안도혁은 이리저리 피하고 있었지만, 모든 공격을 전부 회피하긴 어려웠다. 어느 정도의 자상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모르지만, 근접전이 안 된다면 염동력으로 상대하면 그만이지.’
이대로 가면 체력이 빠질 것이고, 그러면 움직임이 둔해진다. 그때 결정타를 날리면 된다.
그게 정석이었지만, 성질 급한 아르키피라는 거기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거기서 뒈져라!’
아르키피라는 입을 쩍 벌렸다.
심상치 않은 위기감을 느낀 안도혁은 용의 방향으로 홱 고개를 틀었다.
있을 수 없는 것이 보인다.
‘아지랑이?’
용의 주둥이 근처가 일그러져 보인다. 엄청난 고온으로 시야가 굴절되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불길하다고 판단한 순간, 용은 숨결을 내뱉었다.
뜨거운 불꽃의 숨결을.
화아아아악
세상을 태워버릴 것 같은 뜨거운 불길이 작열한다. 불길에 닿은 배가, 불이 붙기도 전에 연소해버릴 정도로 강렬한 열기였다.
“꺄아아아악!”
루나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는 서석진을 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떡해요, 어떡해! 용의 숨결이에요! 저런 걸 맞았다간······.”
“아, 가만히 좀 있어 봐요.”
그러나 서석진도 태연함을 가장할 뿐이었다. 그의 등에선 식은땀이 솟고 있었다.
‘안도혁. 어떻게 된 거야? 그걸로 끝이야?’
만약 저게 끝이라면, 목숨을 걸고 친구를 구해야 한다. 비록 저 괴물의 한 끼 식사로 전락하는 한이 있더라도.
다만, 서석진이 나설 일은 아직 없는 것 같았다.
“푸앗!”
근처 바다에서 둥근 계란 같은 물체가 솟았다. 두건이 다 타버린 채 민둥머리로 돌아온 안도혁이 숨을 거칠게 들이쉬었다.
루나는 그 모습을 보고 뛸 듯이 기뻐했으나,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는 없었다.
“푸흡. 다, 달걀.”
웃음을 간신히 참아낸 서석진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쟤 앞에선 웃지 말아요. 머리카락 다 뽑혀요.”
숨을 참는 건 별 게 아니지만, 머리가 드러나는 건 다르다. 용을 노려보던 안도혁은 그을린 입가에 분노를 머금었다.
“다 했냐. 이 도마뱀 새끼야!!”
안도혁은 수면 위로 거세게 솟구치더니 배 위에 금세 안착했다. 당황한 아르키피라의 몸에 주먹이 꽂히는 건 순식간이었다.
뻐어억
-아아악!
비명과 함께 거대한 용의 몸뚱이가 수면 위로 날아간다. 본능적으로 타격 직전에 앞발을 주먹 앞에 끼워 넣어 충격을 약간 줄였지만, 그 반동으로 앞발이 부러져 버렸다.
아르키피라는 다급해졌다.
‘사, 살아야 돼!’
이러다 길지도 않은 생을 마감하게 생겼다. 그것도 변신도 안 한 동족에게 맞아 죽어서.
그때, 터무니없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근데, 저거 진짜 용족 맞나?’
상식적으로 아닐 수가 없다. 인간에게 저런 힘이 허용될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아르키피라는 지금까지 살아오며 용족이 인간의 형태로 저런 힘을 쓴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었다.
상념에 잠길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거의 찰나라고 봐도 무방했다.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그 모습에, 아르키피라는 경악에 찬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아아악!
수면으로 용이 날아가자, 안도혁은 수면을 밟으며 달렸다. 그것도 평지와 별다를 것 없는 속도로.
물 위를 밟고 달리는 친구의 모습에 서석진은 입을 쩍 벌렸다.
“괴물 같은 놈. 저런 것도 할 수 있었어······?”
루나가 철없이 기뻐했다.
“나중에 태워 달라고 해야지!”
양옆으로 물보라를 뿜어내며 수면 위로 달려오는 그 모습은 용에겐 공포 이외의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비명과 함께 아르키피라는 꼬리를 휘둘렀다.
안도혁은 그에 맞서 팔꿈치를 휘둘렀다.
와드드득
꼬리와 팔꿈치가 충돌하고, 아르키피라의 꼬리뼈는 모조리 부서졌다. 안도혁은 입을 찢듯이 흉흉하게 웃었다.
“네놈 가죽을 벗겨서 담뱃갑으로 쓰겠다!”
악의에 가득 찬 그의 미소가 아르키피라의 정신을 사정없이 좀먹었다. 머리가 쭈뼛 곤두선 아르키피라는 온 힘을 다해 숨을 들이쉬었다.
‘제발, 천룡왕이시여!’
이내 뜨거운 불길이 뿜어졌다. 안도혁도 이 공격은 받아내기 석연치 않은지, 불길에 휩싸이자마자 바로 바다로 들어갔다.
아르키피라는 거친 숨을 내뱉었다.
-캑, 캑!
불꽃의 숨결은 그 위력이 강대한 만큼 시전자에게도 큰 부담을 준다. 이렇게 단시간 내에 연속해서 썼으니, 당분간은 목소리도 제대로 안 나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숨이나 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아르키피라는 몸을 돌리더니 날개를 힘껏 펼쳤다.
몸이 조금씩 하늘로 떠오른다. 다급한 날갯짓이 이어졌다.
‘빠, 빨리 날아야 해. 살아야 해!’
아무리 괴물이라도, 천룡족이 아닌 이상 하늘까지 쫓아올 수는 없다. 그것이야말로 천룡족만의 특권이다.
아르키피라의 생각은 맞았다.
반 정도만.
벼락같은 호령이 하늘을 꿰뚫었다.
“어딜 도망쳐, 이 버러지 같은 새끼가!”
물속에서 튀어나온 안도혁이 수면을 그대로 박차고 뛰어올랐다.
도약은 엄청나게 높았다. 아직 활공을 제대로 하지 못한 아르키피라의 높이 따윈 충분히 따라잡을 정도였다.
이대로 가면 잡힌다. 날개부터 송두리째 뜯어질 것이다.
아르키피라는 눈을 질끈 감고 꼬리 쪽에 정신을 집중했다.
우두두둑
머리가 지끈거릴 듯한 통증이다. 그러나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스스로 꼬리를 끊어낸 아르키피라는 안도혁을 향해 잘린 꼬리를 날렸다. 남은 염동력의 힘을 모두 실어서.
이쯤 되면 아무리 안도혁이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저게?”
퍼억
꼬리에 부딪친 안도혁이 수면으로 쳐박혔다.
상대의 상태를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아르키피라는 하늘을 힘차게 날아올랐다.
‘뒤돌아볼 여유가 없어!!’
설마 그렇진 않겠지만, 정말 그렇지는 않겠지만.
만약 뒤돌았을 때 저 괴물이 하늘을 달려오는 모습이라도 본다면. 악마처럼 미소짓고 있는 얼굴과 마주친다면.
갈기가 새하얘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르키피라는 몸서리를 치며, 그의 생애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기절하기 전까지 기억하는 한, 그의 비행은 사흘 동안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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