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갑지 않은 만남(8)
당장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레틴은 그저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을 뿐이다.
'태의는 알고 있을까?'
어느 왕가이든, 왕 직속으로 배치된 태의(太醫)가 있다. 이들은 왕이나 그 일족의 병을 치료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다른 사람에게 쉽사리 의술을 베풀지 않는다.
물론 타란토스 황실에도 태의가 있다. 하지만 탈모 치료라면······.
'그런 걸로 고민하는 황제가 있었어야지.'
고금을 통틀어 어떤 황제든 공통적으로 가지는 건강 관련 고민거리가 있다.
하나는 정력! 하나는 불로불사!
보통 이 두 가지에서 그리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후자는 생물로 태어난 이상 불가능하니, 전자 쪽에 특화된 약품은 차고 넘친다.
하지만 탈모라면 난감한 일이다.
'어차피 머리카락이라는 거, 황제한텐 큰 의미가 없으니.'
머리카락은 기본적으로 외모의 치장 이상의 의미가 거의 없다. 생물이 외모를 치장하는 것은 다른 성별에게 매력을 뽐내기 위한 것. 그런데 황제에게 그런 게 필요할까? 어차피 구애해오는 사람이 줄을 서는데?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그런 건 없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태의라면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어느새 레틴의 말투는 다시 바뀌어 있었다.
루나가 외쳤다.
"도혁, 기대해 볼 만 해요! 제국의 태의라면 황족만 진찰하는 사람이니, 일반 의사들보다 훨씬 더 고등 지식을 익히고 있어요. 어쩌면 가능할지도!"
"······."
뭔가 속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 안도혁이었다.
'물지 않을 수가 없는 미끼구나.'
안도혁은 피우고 있던 담배를 모닥불에 던졌다.
"만약에 도와드리면, 태의가 절 진단해줄 수 있습니까?"
레틴은 난처한 듯 웃었다.
물론 안 된다. 구국의 영웅도 아니고 타란토스의 귀족도, 심지어 국민도 아닌 외부인을 황제 직속 의사가 진찰해줄 가능성이 있을까?
루나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안도혁을 바라보았다.
귀족으로 오래 살아 온 그녀였다. 저 제안이 상당히 터무니없는 축에 든다는 것 자체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타란토스 제국이라면.'
역사와 전통이 오래된 나라일수록 케케묵은 관습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타란토스는 아직 젊은 국가다. 아직 그렇게까지 틀에 박히진 않았을 거라 생각한 루나였다.
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되게 하겠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뭣하면 아버님 인장을 대신 찍어서 명령서라도 보내겠습니다."
의외로 막나가는 황자였다. 안도혁은 손을 내밀었고, 레틴은 그 거대하고 굳센 손을 맞잡았다.
손을 잡으며 레틴은 전율했다.
'이게 진짜 초월자의 손이구나.'
사람 가죽이 아니라 바위를 만지는 듯한 거친 감촉. 손가락 관절 하나하나마다 꿈틀대는 미증유의 힘이 느껴진다.
"그럼, 보수는 얼마나 주시겠습니까?"
레틴이 멈칫했다.
'그걸로 끝난 거 아니었나?'
잠시 행복회로를 돌렸던 레틴이지만, 곧 현실을 직시했다. 세상 천지에 저런 뜬구름잡는 조건 하나로 계약해주는 바보가 있을 리 없다. 외가가 상인 가문인데, 왜 그렇게 단순히 생각했는지.
레틴은 액수를 제시했고, 안도혁은 고개를 서서히 저었다.
"그 정도로는 어렵겠습니다."
"그럼 이 액수라면······."
루나는 새삼스러운 얼굴로 흥정 장면을 바라보았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항상 새로운 인간이다. 대충 예측은 할 수 있었지만, 갑자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튀어가는 남자. 오늘은 황자 앞에서 갑질하는 경우까지 보고 있으려니 식은땀이 다 났다.
'어느 날 마왕의 목을 들고 오더라도 놀라지 않을 거야······.'
물론 놀라긴 하겠지만!
흥정은 금세 끝났다. 애가 탄 레틴이 가격을 확 높여 불러버린 것이다. 물론 그 정도까지 되니 안도혁도 순순히 수긍했음은 물론이다.
"그 가격이면 적당합니다. 계약서를 작성하지요."
"젠장, 날강도가 따로 없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레틴은 자신의 수중에 있는 돈이 얼마인지 가늠해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당분간은 황궁에서 주는 밥만 먹고 살아야겠구나.'
다사다난한 하루였지만, 그래도 예상치 못하게 원하는 것을 얻었다.
레틴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어쨌든 이제 살아 돌아올 수 있다.'
일단 시험 의식만 통과한다면 황제가 되든, 아니든 그의 입지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진다. 애초에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통념의 문제였으니까.
목숨 값 치고는 싸게 먹힌 거지. 그렇게 자위하며 레틴은 부하를 시켜 술을 한 병 더 가져왔다.
"자,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좋은 거래가 성사된 것을 축하하는 기념으로 말입니다."
다들 기쁜 마음으로 술을 받았다. 황족이 먹는 술이라 그런지, 그 주향은 요정의 술과 비교해도 쉬이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호인족 여자는 눈을 떴다.
'나, 살아 있구나.'
온몸에서 느껴지는 격통을 억지로 참으며 베르시엘라는 몸을 일으켰다.
처음엔 꿈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주변에 즐비하게 늘어져 있는 샐러맨더 시체 무리는 이것이 꿈이 아님을 생생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간신히 눈을 뜬 그녀는 기절하기 직전, 덩치 큰 남자가 식량 주머니를 던져 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말린 고기와 물 정도였지만, 베르시엘라에겐 기쁜 일이었다. 오히려 인간들이 주로 먹는 건빵 등을 줬다면 암울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호랑이였으니까.
어느 외진 동굴을 은신처로 삼은 그녀는 식량을 먹으며 회복에 집중했다.
한계까지 혹사된 몸은 만신창이었다. 근육은 가닥가닥 끊기고, 온 몸의 관절이란 관절은 모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족히 한 달은 정양해야 할 부상이다.
베르시엘라는 딱 나흘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놀라운 회복력이었다.
몸은 아직 저리긴 했지만, 그 정도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낫는다. 괜히 지체하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베르시엘라는 살짝 입술을 핥았다. 며칠간이나 바싹 말라 있던 입안에 수분이 돌아왔다. 몸이 회복되었다는 증거다.
'이젠 어떡하지?'
당초의 목적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지금부터의 여정도 상당히 길긴 하지만, 저 마경을 돌파한 이상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로 떠나 버리면 좋으련만, 그녀의 눈에 밟히는 게 있었다.
'은혜를 갚아야 하는데.'
분명 그 때 샐러맨더들을 처리해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죽었다. 또한, 식량을 던져주지 않았으면 아사했을 것이 분명하다. 말 그대로 꼼짝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만약 깨어났을 때 그 남자가 곁에 있었더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은혜를 갚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이름도 모르는 상태. 당장 찾아나선다 해도 뾰족한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고 보니 분명 그 때 근처에 엘프가 있었어.'
시야는 흐릿했지만 냄새로 구별할 수 있었다. 요정 특유의 숲 향이 진하게 나는 여자가 근처에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남자는 요정과 친분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개인이 아닌, 요정의 숲과.
요정의 숲 근처에서 요정과 친분이 있다면 확실한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알기로 요정의 숲에 인간이 쉽사리 드나들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요정들이 인정했다면 얘기는 달라지지.'
그리고 그런 사람이 여럿 있지도 않을 것이다.
눈을 감으면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샐러맨더들을 압도적으로 학살하던, 마치 전신(戰神)이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그 모습을.
만약에 그가 그녀의 숙원을 도와줄 생각이 있다면······.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지도 몰라. 그럴 만한 힘이 있으니까.'
물론 거기까지 생각하는 건 망상이다. 애초에 이름도 모르고, 대화 한 마디 나누어 본 적이 없는데.
'먼저 친해진 다음에 생각해 봐도 될 거야. 난 은혜를 갚고 싶은 것 뿐이니까. 같이 여행도 다니고, 그러면서······.'
은혜, 은혜. 그래, 은혜를 갚고 싶은 거다.
하지만 베르시엘라는 가슴이 거세게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현상은 뭘까? 단순히 재회한다는 기대감?
베르시엘라의 얼굴에 홍조가 돌았다.
'응, 아냐, 아냐. 그냥 은혜를 갚고 싶은 것 뿐이야.'
애초에 얼굴 자체는 그녀의 취향이 절대 아니었으니까!
일단 가야 할 방향은 정해졌다. 베르시엘라는 요정의 숲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추천, 선작,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당
- 작가의말
이번 장도 끝입니다. 뭔가 날림으로 쓴 기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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