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의 숲(4)
대륙에는 여러 종족들이 살고 있지만, 그 중 가장 야성미를 간직하고 있는 종족을 말하라면 모두들 수인족(獸人族)을 꼽는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게, 그들은 생긴 것부터가 짐승의 외형을 닮았기 때문이다. 종류 역시 한 가지로 한정적이지 않아, 토끼 같은 초식동물부터 늑대나 독수리까지 다양했다.
때문에 모두가 개성이 넘친다. 평범한 개체라곤 하나도 없다고 봐도 좋다.
이것은 좋은 점이다. 문제는 그 장점이 단점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자와 치타의 행동 양식은 다르다. 호랑이와 곰의 생태도 다르다. 서식지가 비슷한 육식동물끼리도 이렇듯 차이점이 뚜렷하게 보이며, 초식동물과 육식동물 간 차이는 말할 것도 없다. 고양이는 풀을 먹을 수 없고, 토끼는 고기를 먹을 수 없다.
유사한 종이 아니면 서로를 불신하기 일쑤였으며, 애초에 화합 자체가 잘 되지 않는다.
하나의 종족이지만 하나의 종족이 아닌 다인종. 그것이 바로 수인족이었다.
수인족의 한 갈래인 호랑이 종족, 줄여서 호인족(虎人族)의 일원인 베르시엘라는 짜증을 내며 옆에 있던 나무를 팍팍 내리쳤다.
“진짜! 아무! 쓸모없는 놈들!”
몇 주 전, 베르시엘라는 아스란 왕국에 어마어마한 피해를 안겨준 적이 있다. 수도인 세르노사에 잠입해, 경매에 출품되려던 수인족들을 모조리 풀어준 것이다.
인간보다 훨씬 월등한 신체 능력을 가진 수인족이 다수 모이자 탈출하는 것은 어렵지도 않았다. 그대로 몰려서 움직였으면 국경의 약한 부분을 노려 돌파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이 빌어먹을 종족 성향이 문제였다.
“구해준 것은 감사합니다만, 혹시 이 모든 사람이 같이 움직이나요?”
“풀냄새 나는 초식동물 녀석들과 행동을 함께하란 말이오?”
노예 신세에서 풀어줬더니 이 모양이다. 심지어 베르시엘라가 육식동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합류를 거부한 초식동물들도 있었다.
원래는 노예시장 전체를 날려버릴 생각이었으나, 베르시엘라는 일련의 상황을 겪고 그것을 포기했다. 인스턴트로도 화합이 불가능하니까.
모두 뿔뿔이 흩어지게 내버려 두었다. 괜히 잡아두는 것보다 그쪽의 생존 확률이 더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현재 베르시엘라에게 남은 것은 그저 동족을 노예에서 잠시 해방해줬다는 자기만족뿐이었다.
‘얼마나 성공적으로 도망쳤으려나, 3할 정도일까.’
생각하면서도, 현실성 없는 수치를 떠올리는 자신에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인간이 비록 수인족보다 육체적으로 약하다곤 하지만, 무리를 지은 그들의 힘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다. 집단으로 움직이는 것에는 지상 어느 종족도 그들을 따를 수 없다.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이지······.’
없는 걸 애석하게 생각해봐야 의미는 없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는 법이다.
베르시엘라는 눈앞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어두침침하고 황량한 대지가 보인다.
대륙에는 두 개의 마경(魔境)이 존재한다. 하나는 저 먼 북부에서 지상 최대의 영토를 가지고 군림하고 있는 마왕국. 하나는 대륙의 남서부에서 여러 나라들과 맞닿아 있는, 주인 없는 오지. 정식 명칭은 따로 있지만, 보통은 제 1 마경, 제 2 마경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린다.
북부에 있는 1 마경의 경우, 야만적이기로 유명하나 적어도 그곳은 전제군주인 마왕(魔王)을 원수로 한 국가의 형태를 한 곳이었다. 이성이 통한다는 뜻이다.
제 2 마경은 그렇지 않다. 그저 몬스터들만이 들끓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완연한 야생이다. 규모도 어마어마하게 넓어서, 인접 국가들도 그저 대치만 할 뿐 정벌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곳이었다.
위치상 대륙의 허리 부분에 있는 곳이다. 정복한다면 대륙의 물류가 훨씬 원활해질 것이나, 그 정도 병력을 동원하는 것은 어느 국가에도 어림없는 일이다.
베르시엘라는 고민에 빠졌다.
‘여길 진짜 지나가야 해?’
폭동을 주도해서 막대한 피해를 입힌 그녀다. 아스란 왕국에서 그녀의 인상착의를 파악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음은 물론이고, 곧 왕국 전역에 현상 수배서가 붙게 되었다.
거기까지였으면 어떻게든 됐을지 모르지만, 문제는 옆 나라인 하프렌 공화국과, 그 위쪽의 하르딘 왕국까지 그녀를 현상 수배범으로 공지한 것이다. 노예 경매에 참가한 인간들이 각국의 고위층 인사이기에, 이런 국경을 뛰어넘는 현상 수배범이 만들어져 버렸다.
이 사실을 들은 베르시엘라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아스란 왕국에 남아 있으면 백 퍼센트 잡혀 죽을 거고.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가도······.’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나. 그것 외엔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문제는 그 고향이 대륙 북단에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세 국가를 경유하는 게 아니면 갈 수가 없다. 한 가지 방법이 더 있기는 한데, 그것은 제 2 마경을 통과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현실성이 별로 없다. 하지만 확률이 있기는 한 방법이다.
‘자살이 더 빠른 방법 아닐까?’
그러나 고민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베르시엘라는 한숨을 푹 쉬더니 몸을 웅크렸다.
수인족은 인간의 형태와 짐승의 형태, 두 가지로 모습을 바꿀 수 있다. 어느덧 거대한 호랑이로 변한 베르시엘라는 잠시 그르렁거리더니 곧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저 멀리 거대한 아가리를 벌린 채 그녀를 환영하는 마경 속으로.
새벽녘의 시원한 공기가 폐부를 간질이는 걸 느끼며 안도혁은 침대에서 눈을 떴다.
분명 건물 – 이 기묘한 나무를 건물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만 - 안에 있는데도 통풍이 바깥처럼 잘 되었다. 하지만 춥다고 느낄 만큼 냉기가 들어오지는 않으니, 조화라고밖에 볼 수 없는 일이다.
‘신기하군.’
안도혁은 밖에 나와 새벽의 흡연을 즐겼다.
요정의 마을. 밤에 본 풍경은 몽환적이었지만, 새벽의 풍경은 메르헨처럼 동화 같았다.
기이할 정도로 자라난 거대 풀잎들에 맺힌 아침 이슬이 요정들의 목을 축였다. 어젯밤에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거주 목적으로 사용되는 건물은 나무뿐만이 아니었다. 사람의 키 따위는 옛날에 넘었을 법한 거대 버섯에 문이 달린 것을 본 안도혁은 할 말을 잃었다.
이른 아침이라고 보기에도 이른 시간이다. 그럼에도 돌아다니는 요정들이 있었고, 그들의 모습에서는 여유가 넘쳤다. 그중에는 아침부터 뛰어노는 꼬마도, 마당 앞을 비질하는 자도 있었다.
두어 대쯤 피우고 있자, 익숙한 얼굴이 새벽의 안개 속에서 나타났다.
“여행자분, 좋은 밤 보내셨나요?”
“덕분에 잘 잤습니다.”
다가온 레이나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어제는 죄송했어요. 제가 좀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라······이렇게 잘 단련된 몸을 본 적은 없었거든요. 게다가 키도 크시고.”
이미 예전에 일련의 사실을 기억 저편으로 날려버렸던 안도혁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약간의 시간을 써야만 했다. 손을 내저어 신경 쓰지 않음을 표하자, 레이나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인간들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다고 들었는데, 그렇지는 않은가 봐요.”
“어떤 면에서 그렇게 보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람마다 다르지 않겠습니까?”
흡연을 오래 하다 보면 기술이 몇 개 생긴다.
안도혁이 입술을 몇 번 기묘하게 움직이더니 하늘로 연기를 한 번에 뿜었다. 그러자 통나무 위에서 타오르는 것처럼 거센 화력의 불꽃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재밌는 분이군요. 그러고 보니 그 물건도 이곳에선 즐기는 사람이 없네요. 담배라고 하던가요. 맛이 좋은가요?”
맛이라. 안도혁은 손에 들린 저주받은 기호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려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도의상 긍정의 표시를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피우지 않으시는 걸 권합니다.”
“후후. 조금 이따가 저희가 당신들께 도움을 드릴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가 열릴 거에요. 외부인이 들어온 건 오랜만이라 어떤 답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노력해 볼게요.”
“음, 그렇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대신에!”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을까.
안도혁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소름이 돋는 건 오랜만이었다.
“나도 그 담배, 한 갑만 줘요. 궁금해졌어.”
“······예?”
아까 담뱃갑을 들고 있는 걸 들킨 걸까. 생으로 한 갑이 그냥 나가게 생겼다.
안도혁은 울상이 되어 새 담뱃갑을 그녀에게 건넸다.
아직도 담배는 많았다. 수레를 일부 채울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일반인 기준에서의 이야기고, 근 한 달 동안 피운 담배만 저것의 배가 되는 안도혁으로선 마음이 편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레이나는 진심으로 기쁜 듯 살풋이 웃었다. 덩치가 큰 그녀가 소심하게 웃고 있자, 묘하게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어울리는 갭이 보였지만, 담배를 빼앗긴 안도혁으로선 눈에 들어오지 않는 미모였다.
“고마워요. 조금 이따 아침 식사를 날라올 테니, 그때까지 편하게 쉬고 계세요.”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새벽녘의 공기 속으로 그녀는 다시 사라졌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 있던 중, 그의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부스스한 머리를 채 정리하지도 못한 서석진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피로가 한참 덜 풀린 얼굴이었다.
“무슨 이야기야?”
“담배 뺏긴 얘기······.”
“엥?”
“······그냥 오늘 하루 일정에 관해서다.”
숲의 시간은 빠르다. 조금 어두워지나 싶으면 어느새 밤이 되어 버리기 일쑤고, 햇살이 비치나 하고 고개를 들면 태양이 중천에 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실 이것은 시간이 빠르다기보단 시간을 인지하기 어려운 특성에 가깝다.
새벽이 온 것도 잠시,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찬란하게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햇살의 비를 즐기던 안도혁 일행에게 식사가 배달되어 온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의 일이었다.
근 몇 년 만에 요정식을 접하는 에스턴이 눈물을 흘렸다.
“아아, 고향의 식사라니. 아아······.”
관련된 정보를 전혀 얻지 못한 사람에게 요정이 뭘 먹고 사는지 묻는다면, 십중팔구는 대답을 전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대답은, 정답과 터무니없이 멀리 떨어져 있다.
“이슬 같은 걸 먹나······?”
물론 그런 걸 먹고 살다간 사흘 내로 굶어 죽는다.
어쨌든 보편적인 상식으로는, 요정이란 단촐하고 정갈한 음식을 먹는다는 이미지가 박혀 있다. 생식에 가까운 소박한 식단으로, 숲의 자연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자연의 친구들.
그런 보편적인 상식을 가지고 있던 루나에게, 처음 접한 요정식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어머나.”
꿀을 발라 구운 통돼지구이, 칼을 대기만 해도 찢어질 듯 부드러운 흰 빵, 드레싱을 가볍게 뿌린 샐러드 등이 주 메뉴였다. 후식인지, 철에 맞지 않는 과일 몇 바구니가 같이 따라왔다.
인간들의 식사와 거의 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와, 이걸 누가 먹어?’
음식의 양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이렇게 식사를 한 달만 하면 고지혈증으로 무덤에 들어가도 될 정도의 양이었다.
허기가 반찬이라고, 일행은 앞다투어 음식을 가져갔다.
잘 익은 돼지고기를 한 입 씹은 안도혁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응?’
돼지구이를 잠시 내려놓고, 이번엔 빵을 잡아 뜯어 입에 가져갔다.
‘······으응?’
샐러드 등의 요리를 먹어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자신의 혓바닥에 문제가 있나 싶어 동료들을 돌아보니, 다들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음식이 뭔가······.”
“그러게요······.”
서석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 이거 너무 달잖아!”
요정의 음식이 다른 종족의 요리와 차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전채고 본 요리고 반찬이고 디저트고 모두가 단 음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원래부터 단 것은 단 것 그대로, 달지 않은 것은 감미료를 첨가한다. 단 것에 단 것을 더하는 경우 역시 허다했다.
극단적인 감식(甘食). 그것이 요정식이다.
단맛을 좋아하는 여자인 루나도 이건 좀 아니라는 듯 식기를 내려놓았다. 인간 여자들이 좋아하는 단맛은 때와 장소를 가리는 맛이지, 이렇게 식탁 전체에 설탕을 퍼부은 듯 주구장창 달디달면 좋아할 리가 없는 것이다.
반면 에스턴은 눈물을 흘리며 고향의 맛을 느끼고 있었다. 꿀과 설탕과 과당과 기타 등등으로 범벅이 된 이 음식. 인간 세상에서 노예 신분이었던 그는 비싸서 먹을 수도 없는 요리다.
“맛있다. 맛있어.”
그놈 참 맛있게 먹는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열심히 찹찹거리는 에스턴을 보며 다른 일행들은 심란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도혁아.”
“······왜.”
“소금이라도 꺼내 올까?”
“······부탁한다.”
요정의 손님으로 온 인간들이 식사를 끝내는 데엔 꽤 큰 노력이 필요했다.
추천, 선작,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당
- 작가의말
추천 감사합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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