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초의 의식(6)
'내가 죽으면 가족들은 잘 살려나.'
어쩌면 입이 하나 줄어서 좋아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만져보기도 힘든 막대한 거금을 얻얻으니 희희낙락하고 있을지도.
죽음으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으려니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제이는 고개를 붕붕 흔들었다.
'좋게 생각하자. 누나 결혼 자금이라도 보탤 수 있으면 그걸로 된 거겠지.'
가족이 잘 살게 된다면 그걸로 좋지 않은가. 애써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시시각각 커지는 공포는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16세. 아직 한참 창창할 나이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몇 배는 더 긴 시기. 아직은 성인이라기보다는 소년의 얼굴이 더 짙은 나이.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제이는 눈물을 떨구었다.
'죽기 싫어······.'
어째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높으신 분 하나를 위해서 죽어야만 하는 걸까. 지은 죄라고는 이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것밖에 없는데.
당장 마차 문을 박차고 도망칠까를 고민해 보았지만, 곧 힘없이 몸을 늘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멸마군은 그 강제 차출의 특성상 도주 시도자가 상당히 많다. 때문에 징집 시에는 절대 입대자가 도망칠 수 없도록 병사를 수십 명이나 붙여 호송한다. 단 한 명을 위해서.
저항은 의미 없다. 제이가 택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마차 안에서 조금이라도 더 쉬는 것 정도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차를 타고 멸마군이 집결하는 황성에 도착했다.
타란토스의 황성은 예술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철옹성과도 같은 면모를 추구했다. 험한 지형에 위치하여, 황궁이라기보다는 마치 요새와도 같았다. 쓸데없이 하늘을 찌르는 첨탑보다는 망루 하나를 더 세우자는 군사적 요충지의 성격이 강했다.
물론, 웅장함이라는 면모 하나에서는 일반인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렇다 한들 제이는 난생 처음 보는 황성의 모습에 감흥이 들지 않았다.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저런 곳에 사는 사람이 내 생사를 마음대로 결정하는 거겠지.'
분노가 끓어오를 법 했으나, 제이는 담담했다. 이제 와서 발버둥쳐봐야 무슨 의미냐는 판단이었다.
다만, 안 그런 사람도 있는 법이다.
"죽기 싫어! 집에 돌아갈 거야!"
이제 갓 스무 살이나 되었을 법한 청년이 울며 발버둥쳤다. 물론 이 작은 소요는 몇 명의 군사들에 의해 쉽사리 진압되었다.
결집된 멸마군의 나이 분포는 다양했다. 제이의 또래 수준에서부터, 중년의 끝에 머무르는 아저씨까지. 그야말로 아무 연관도 없는 생산 가능 인구를 무작위로 선발한 결과였다.
중년 사내 하나가 제이의 등을 툭 쳤다.
"젊은 친구가 안타깝구만. 어쩌다가 이런 곳에 오게 됐을까."
제이는 냉소적인 헛웃음을 지었다.
"그냥 잡혀온 거죠. 아저씨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를······."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말투였지만, 제이는 무시했다. 어차피 다 같이 죽으러 온 길에 나이 따위가 무슨 상관인가.
여기 모인 백 명의 사람들. 이 중에서 과연 살아서 집에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제이는 그 중 하나가 자신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털끝조차 하지 않았다.
'이번 황자에겐 전쟁의 재능이 없으니까.'
다 죽을 것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여기 모인 사람들 중 희망에 젖은 눈빛을 하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얼마간 그렇게 머물러 있자니, 곧 황자가 도착했다.
황자는 미남이었다. 곱게 기른 수염이 인상적인 인물로, 누가 봐도 곱게 자랐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얼굴은 초췌해져 있었는데, 그게 영양학적 문제로는 보이지 않았다.
'꼴에 자기는 죽기 싫다는 건가? 우릴 이 사지로 끌고 온게 누군데?'
제이는 속으로 황자를 비웃었다. 만약 그가 레틴이 처한 상황과 심리를 안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 없겠지만, 현재로서 그에게 황자는 원수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황자는 힘없이 몇 마디를 건네고는 돌아갔다. 그는 독려의 말도, 패기로운 웅변도 하지 못했다.
레틴이 떠나고, 통제하고 있던 병사들도 사라지자 멸마군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황자 전하께서도 힘드신 모양이야."
"왜 아니겠나. 결국 죽으러 가는 길인데."
여론은 황자가 불쌍하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듣고 있던 제이가 어이가 없어 소리쳤다.
"아니, 아저씨들 지금 제정신이에요?"
제이는 황자가 방금 전까지 서 있던 단상으로 뛰어 올라갔다.생선 한 번도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는데, 용기가 어디서 났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지금 우리가 누구 때문에 여기 끌려왔는데요? 왜 사랑하는 가족들 곁에서 강제로 떨어지게 됐는데, 왜 전쟁터로 끌려 나가게 됐는데! 어떤 놈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황궁 모욕죄로 즉결 처형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지만, 다행히 근처에 병사들은 없었다. 멸마군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을 줄 만큼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 따윈 없었던 것이다.
아까 제이에게 말을 걸었던 중년 남자가 말했다.
"자네 심정은 이해하지만, 황자 전하께서도 좋아서 이 길을 가시는 게 아닐세. 이러지 않으면 황제가 될 수 없으니까."
"그럼 황위 따위 포기해야지! 자기 자신은 물론, 백 명의 순장자를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황위 따윈 예저녁에 포기했어야지! 황제가 그렇게 대단하냐!"
제이의 발언은 도를 지나치고 있었다.
위험하다 생각한 몇 명의 멸마군이 단상 위로 올라가 제이를 붙들고 입을 틀어막았다.
제이는 끌려가며 소리쳤다.
"놔! 이거 놔! 개 같은 황자 새끼. 내가 죽어서도 귀신이 되어 저주할 테다!"
근처에 병사가 없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있었더라도 제이는 상관하지 않았을 터였다. 브레이크를 잃어버린 십대의 감정 폭발을 막을 수 있는 것 따위는 많지 않다.
숙소로 돌아와서도 제이는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씩씩거렸다. 마음만 같아서는 황자의 면상에 주먹을 꽂아넣고 싶었다.
제이에게 동조하는 인물은 적지 않았다. 드러누운 제이에게 몇 명이 다가와 말했다.
"아까 속 시원했어."
"그렇게 말할 수 있다니 부러운걸."
제이는 냉소적으로 코웃음쳤다.
"흥. 그래봤자 변하는 건 하나도 없는데 뭘."
어차피 죽을 목숨, 하고 싶은 말이라도 하고 가는 게 덜 억울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제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제이의 생각은 그리 틀리지 않았다.
어두운 밤이 되자, 숙소 여기저기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해."
"흑흑. 엄마가 보고 싶어."
깊은 밤이 되면 사람은 센티멘탈해진다. 좋은 감정, 나쁜 감정 모두가 회오리치며 정신을 좀먹는다.
흐느끼는 사람에 나이 고하는 없었다. 죽기 싫다며 발악하던 청년도, 의연한 체 하던 중년 남성도. 모두가 어린애처럼 엉엉 울며 생존을 갈구하고 있었다.
제이는 우울함에 잠식될 것 같아 최대한 귀를 틀어막았다.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서.
그렇게 하룻밤이 흐르고 다음 날이 되었다.
한 사내가 멸마군에 들어왔다. 예쁘장한 은발의 여자 한 명과, 요정 한 명을 데리고서.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특이한 외양의 사내. 피부색이고 얼굴 모양이고 전부 특이해서, 지나가는 사람 열 명 중 아홉 명은 돌아볼 법한 외모의 남자였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외양'이 아니었다.
'사람 맞아?'
자신의 머리보다 더 큰 어깨 근육을 보자 제이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어제까지의 패기는 어디로 갔는지, 남자의 근육을 보자마자 자연스레 겸손함이 솟아났다.
자신을 안도혁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그 시점부터 지옥을 펼치기 시작했다.
"다음은 너다. 돌아라."
안도혁은 사람으로 저글링을 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사람 몇 명이 그의 손아귀에 붙들려 하늘을 날아올랐다.
평생 하늘을 날아볼 일이 있었겠는가? 그것도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제이는 난생 처음 겪는 공포감과 구역질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물론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방 천지에 토사물을 만들어 놓는 작업이 끝나면, 요정과 여자가 그들을 기다렸다.
"뭐 해, 치고 들어와!"
"안 오면 맞아 죽는다? 죽이진 않을 거지만."
다섯 명이 한 조를 편성하여 둘에게 달려들었지만, 나가 떨어지는 것은 그들 쪽이었다. 무기를 다루는 레벨 자체가 너무나도 달랐다.
공격이 실패할 때마다 두 명의 목검이 용서없이 병사들을 후려쳤다. 정말 뼈가 부러지지만 않게 때리는 공격으로, 한 번 공격당할 때마다 끔찍한 고통이 그들을 엄습했다.
제이는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이런 경험을 어디서 해 보겠는가.
'죽을 거 같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났다.
못하겠다는 사람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이 악마야! 차라리 죽여라!"
"우리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느냐!"
거대한 근육 괴물에게 대드는 사람이 나왔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아직도 안도혁이 무서워 제대로 기를 펴지 못했지만, 어딜 가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안도혁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하기 싫은가?"
대들던 병사가 침을 튀기며 악을 썼다.
"차라리 죽여라!"
"그러냐."
다음 순간, 안도혁은 허리를 뒤틀었다.
우지지직
꽉 틀어쥔 주먹에서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마어마한 힘이 집결되고 있다는 사실,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온 몸을 한계까지 비튼 안도혁이 나직하게 뇌까렸다.
"그럼, 죽어라."
회전력을 받은 안도혁의 몸, 그 팔 끝에 있는 주먹이 병사에게 쏘아졌다.
패애액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인간이 주먹을 내지를 때 날 수 있는 종류의 소리가 아니었다.
안도혁의 주먹은 방금 대든 남자의 코앞에 멈추어 있었다. 말 그대로 피부 한 장 정도의 거리만을 남겨둔 채였다.
풀썩
남자는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눈이 풀리고, 입에는 거품을 물고 있었다. 소변까지 지리는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공포가 뇌를 마비시킨 것이다.
안도혁은 쓰러진 남자를 보며 비웃었다.
"죽을 각오도 없는 놈이 함부로 말을 내뱉지 마라."
이후 안도혁에게 대드는 사람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사지로 가는 길에 있는 멸마군임에도, 당장 죽을 용기는 생기지 않는다니.
사람은, 아니 생물은 누구나 살고 싶어한다. 태어난 이상 살고 싶은 것이 진리이다. 어느 누구도 그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으리라. 멸마군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었다.
마침내 열흘이 넘었을 때였다.
휭 휭 휭
안도혁은 열심히 병사들을 굴리고 있었다. 물리적으로.
저글링을 당한 병사들의 눈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토악질을 해대는 사람이 여전히 대부분이었지만, 달라진 점이 있었다.
"오늘은 그래도 두 번밖에 안 토했네."
"아직 단련이 덜 됐군. 나는 한 번일세."
"젠장, 지다니."
병사들의 눈에서 공포가 사라졌다. 제아무리 무서운 경험이라도, 이렇게 반복적으로 당하면 공포심이 점차 옅여지는 것이다.
제이 역시 익숙해졌다.
'이젠 견딜만 해.'
무기를 다루는 법도 어떻게든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맞아가면서 배우는 것이기에 체계는 잡히지 않았지만.
그러나 스스로의 성취에 뿌듯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악마가 두 번째 단계에 돌입했던 것이다.
"자, 막아 봐라."
콰아앙
통나무라기보다는, 나무 한 그루를 통째로 뽑아온 몽둥이에 가까운 물건에 얻어맞은 인간들이 방패 째로 날아갔다. 살의만 안 담겼지, 저쯤 되면 진짜 사람을 죽이겠다 싶은 공격이었다. 방패만 없었다면 몇 명은 이미 이승과 하직했을 것이다.
쓰러져 신음을 흘리는 멸마군에게 안도혁이 말했다.
"죽지 않을 정도로 쳤다. 뭐 하나? 다음 장소로 이동하지 않고."
병사들은 이를 악물었지만, 명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이곳의 법은 안도혁이었으니까.
멸마군이 고문을 빙자한 수련을 받는 것을 보며 황자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황자는 안도혁을 앞세우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가끔 말리는 소리가 들려오긴 했다.
"안도혁 공, 너무 심하시오!"
"이게 제 방식입니다."
힘없는 황자가 악마를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병사들은 눈물을 삼키며 악마의 손아귀에서 놀아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의외로 단순하다. 며칠 전까진 황자를 욕하던 인물들이, 타겟을 안도혁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저 망할 새끼, 죽지도 않나?"
"진짜 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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