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과 만남(8)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직면하면 사람은 일단 생각을 멈춘다. 논리적 회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 돌입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인간에 국한된 소리가 아니라, 어떤 족속이든 마찬가지인 일이다.
레이나가 다시 논리적 회로를 되찾았을 때는, 안도혁이 그녀를 들쳐업고 숲 속으로 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의 일이었다.
"······어라."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여기서 뭘 하고 있지?
거대한 어깨 위에 얹혀 있던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발버둥쳤고, 그 낌새를 느끼자마자 안도혁은 그녀를 땅에 내려놓았다.
"이제 일어났습니까."
레이나는 담배 연기를 뻑뻑 뿜어대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신장은 남자와 비교해도 엄청나게 컸다. 그러니 그 체중이라고 한들 전혀 가볍지 않을진대, 안도혁은 힘든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레이나는 곧 풋 웃었다. 그런 신위를 보인 사람이 고작 이 정도로 지칠 리가 없지.
"저······."
그녀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숲 안쪽에서 무언가가 우르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땅에 떨어진 흙과 나뭇잎이 짓밟히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일련의 무리가 그곳에 있었다.
그것은 드라이어드와 엘프로 구성된 요정들이었다. 다들 활과 창 등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었으며, 얼굴에선 땀방울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얼마나 급하게 뛰어왔는지, 그들의 숨은 가쁘기 그지없었다.
무리 중에선 요정왕도 포함되어 있었다. 안도혁은 보통 군주라는 사람이 이렇게 현장을 돌아다니는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쓸데없는 생각은 접어두기로 했다.
"어, 어떻게 됐어요?"
실비티아의 말에 안도혁은 미소를 지었다.
보통 왕이라는 것은 의복으로 구별된다. 어떤 국가에 가더라도 왕에게는 그만의 특별한 의복, 장식물 등이 필히 존재하기 마련이다.
실비티아는,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누구라도 왕이라고 볼 수 없을 차림이었다. 다른 요정들처럼 활을 장비하고,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그녀는 그저 요정 전사 A 이상의 평가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상상이 간다. 분명 안도혁과 레이나가 출발한 직후, 당장 쓸 수 있는 전력을 최대한 동원하고, 그들을 직접 인도해서 부리나케 달려왔겠지.
'남자에 빠진 줄 알았더니, 그래도 지도자는 지도자라는 건가.'
바닥 비슷하게 떨어졌던 그녀의 평가를 약간 위로 올리며 안도혁이 말했다.
"전부 끝났습니다. 위협은 이제 없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나무 레일이 와지끈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요정들이 타고 온 숲의 길이 끊기는 소리다.
그 소리는 요정들의 심정을 대변하기도 했다.
"예?"
"예에?"
웅성대는 소리가 숲을 시끄럽게 울렸다.
안도혁이 출발한 뒤라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시간 자체는 얼마 차이나지 않았다. 기껏해야 한 시간 정도라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안도혁의 몸에는 여기저기 긁히고 찢긴 상처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샐러맨더 무리와 싸웠다고 보기엔 그야말로 찰과상이라고 해도 좋을 법한 수준이라, 요정들은 그가 전투를 하다 잠시 몸을 피했던 것 정도로 간주했던 것이다. 상식적으로 보면 그게 맞는 말이니까.
그러나 실비티아만은 진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페어리의 눈은 언제나 진실을 꿰뚫는다. 상대방이 어떤 종족이든, 힘의 고하와는 상관없이 그들은 언제나 사실을 잡아낼 수 있다.
'지, 진짜 사실이잖아?'
저쪽에서 레이나가 전부 사실이라며 설명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설명을 들은 좌중의 눈이 슬그머니 실비티아에게 향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모두 사실이에요. 위협은 이제 없습니다."
그 말에 환호가 터져나오기까진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와아아!"
"사, 살았다. 이제 살았어!!"
백 명에 가까운 요정들이 서로 얼싸안고 환희에 젖어 있는 모습은 그럴싸했다. 전부 미남 미녀로 구성되어 있으니, 한 폭의 그림 같은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모두 기쁨에 젖어 춤이라도 추려고 할 무렵, 실비티아는 안도혁에게 다가왔다.
"인간의 예법에는 정통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경의를 표할 때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 배웠습니다."
다음 순간 실비티아는 안도혁에게 무릎을 꿇었다. 당황한 안도혁이 입에 문 담배를 떨어뜨리며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도리어 실비티아는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살신성인의 마음가짐으로 숲의 피해를 막아주시고, 저희들의 희생도 일절 없이 막아주셨습니다."
요정의 왕이 무릎을 꿇었다.
인간 세상이라면 다들 왕의 모습에 어쩔 줄을 몰라하는 게 정상이었지만, 요정의 사고는 그게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요정들이 안도혁에게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커다란 위협으로부터 저희를 보호해주신 점은 어떤 사람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 푸르른 숲에서, 당신의 행적은 오랫동안 노래로 만들어져 내려올 것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안도혁이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감사의 말을 듣는 것은 꽤나 익숙한 일이다. 애초에 고려족 마을에서도 허구한 날 듣는 게 감사 인사에, 항상 편지함을 꽉꽉 채우는 게 감사 편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망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것은 익숙하고 말고가 아니라, 성향 문제다.
실비티아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숲은 기억할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 힘이 세지만 오만하지 않고, 약한 자들을 위해 선의를 베풀 줄 아닌 한 민머리 인간의 모습을. 세월이 흘러도 그 형상을 오래 간직할 거석(巨石)에 그대의 모습을 상(狀)으로 만들어, 숲의 중심에 오랫동안 간직할 것입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안도혁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러니까, 내 대머리 모습을 숲에 장식해 놓겠단 소리냐?'
그런 그의 심정을 알아차린 듯, 실비티아가 그에게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걱정 마시길. 잘생기게 조각하도록 할게요."
"······."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안도혁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미 눈앞의 인간이 머리카락이 있고 없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진 요정들은 그저 경외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쨌든 돌아갑시다. 짐도 챙겨서 나와야 하니까."
짐도 챙기고, 일행도 챙기고.
샐러맨더의 시체를 수습할 몇 요정들을 제외하면 모든 이들은 다시 귀환했다. 원거리를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는 숲의 길을 통해서.
마을에 귀환한 그들을 모든 요정들이 반겼다. 안도혁 혼자의 힘으로 모든 상황을 수습했다는 것을 듣고는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순탄하게 풀리면 좋겠지만, 돌아온 안도혁을 기다리는 것은 잔소리였다.
"이거 봐요! 다치고 왔잖아!"
은발의 미녀가 빼액 소리를 질러댔다.
안도혁은 자신의 몸을 돌아보았다. 분명 물리기도 하고, 맞기도 했으니 상처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아니, 이 정도면 솔직히 찰과상 아닌가.'
애초에 깊지도 않은 상처다. 게다가 상처 중 대부분은 요정의 숲의 신비한 힘으로 치료되는 중이었다. 멀리 봐도 사흘 후면 상처 자국조차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이러고도 잔소리를 들어야 하나라며 투덜거리려던 찰나, 루나를 본 안도혁은 멈칫했다.
루나의 큰 눈망울에 눈물이 글썽였던 것이다.
안도혁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루나는 눈물을 쏟아내며 소리쳤다.
"걱정했단 말이야! 세상에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렇게 무모한, 바보같은······."
"······."
"걱정하는 사람 생각은 안 해요? 정말,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지······."
엉엉 우는 루나에게 안도혁은 한숨을 내쉬며 손수건을 건넸다.
이번 일은 안도혁의 입장에선 별 것 아닌 일이 맞다. 국가 급 재앙이니 뭐니 하지만, 애초에 육상 몬스터보다 몇 배는 위험한 해상 몬스터들을 쥐잡듯이 잡아댄 안도혁에겐 대단하지도 않은 일과였다.
안도혁은 눈을 감았다.
'언제가 마지막이었지?'
누군가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그저 경외와 감사의 대상이 아닌, 보통의 사람처럼 대해진 것이.
평범한 인간 취급을 받는 것은 세상을 두부처럼 인식하고 살아온 그에겐 색다른 경험이었다.
눈가가 붉어진 루나가 축축해진 손수건을 꽉 감싸쥐었다.
"담배 냄새."
"······가진 게 그것밖에 없어서."
담배 연기를 산소처럼 들이마시는 사람인데, 가진 모든 물건에 냄새가 묻지 않을 리가 없다.
일단 걱정을 끼친 것은 맞으니 안도혁은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신경 쓰게 만들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별 것 아닙니다. 앞으로는 사소한 일로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사소한 일의 범주가 좀 크긴 하다만.
루나는 삐친 표정을 풀지 않았다.
"······흥."
"미안하다니까."
"몰라. 당신 머리가 다시 나도 다 뽑아 버릴 거야."
"아니······."
실제로 그럴지 아닐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말 자체만으로도 안도혁은 미약한 공포가 느껴졌다.
루나를 간신히 달랜 안도혁은 짐을 챙겨 출발하려 했으나, 그의 발목을 붙잡는 것이 있었다.
"이대로 가시면 안 돼요!"
"최소한 대접할 기회를!"
온갖 요정들이 안도혁에게 매달려왔다. 이유인 즉, 영웅이 귀환했는데 격한 술자리 한 번 없이 내보내는 게 말이 되냐 이거다.
안도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신들 어제까지만 해도 밤새 놀고 술 먹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거!"
"이건 이거!"
어쩔 수 없었다. 목숨을 걸고라도 영웅에게 술 한 잔을 대접해야겠다는 요정들의 패기에 안도혁은 한 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대접을 해주겠다는데 뭐.
이미 루나의 손에 이끌려 몇 번이고 참석했지만, 요정의 축제는 성대하기 짝이 없었다.
인간 세상이라면 가을 추수가 끝난 기념으로 수확제를 열 때나 나올 법한 음식의 산이 일상처럼 펼쳐진다. 세상 어디에도 이런 페이스로 식량을 소모하는 동네는 없다.
요정 아이들이 서로에게 파이를 던지며 노는 것을 보면, 내일 한 끼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선 없던 살심도 솟아날지 모른다.
여기저기서 춤판과 노래판이 벌어지는 것을 보며 안도혁은 술을 마셨다.
요정의 숲의 음식들은 전부 달다. '인간 손님'들이 격하게 클레임을 걸어 그들의 식사는 조금 당분을 줄인 것으로 나왔지만, 아무래도 장기 숙성이 필요한 음식들의 경우엔 그러기가 애매하다.
그 중 하나가 술이다. 안도혁은 황금빛이 도는 술을 마시며 찬사를 내뱉었다.
'이건 몇 번을 마셔도 맛있는데.'
요정들은 벌꿀술이라고 말했지만, 그런 단순한 말로 포장될 것이 아니다.
안도혁이 그리 사치를 부리며 산 사람은 아니나, 이 술의 가치가 인세에서 얼마나 큰 것일지는 아무리 그라도 짐작이 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옆자리에 앉아 있는 친구를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서석진은 정신없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맛있다. 정말 맛있어."
술꾼이라는 말로는 모자라다. 주생주사(酒生酒死)라고 표현해야 마땅할 서석진은 처음 맛본 그 순간부터 요정들의 술에 완전히 반했다.
벌꿀술만 있는 것이 아니다. 포도, 사과, 망고, 심지어는 바나나 술도 있었다. 심지어 그 모든 것들이 모두 감탄할 정도로 맛있다. 온갖 작물들이 제멋대로 자라날 수 있는 이 숲에서만 가능한 광경이다.
그렇기에 저 술쟁이가 이 숲에서 쉬이 나갈 것 같지 않다.
미남이기에 좋아해주는 사람은 많고, 먹을 걱정 없고, 술은 맛있고.
뭐, 그렇다고는 해도 오늘의 주역은 안도혁이다. 모두들 이 영웅에게 술을 못 따라서 안달인 상황이었다.
추천, 선작, 코멘트는 큰 힘이 됩니당
- 작가의말
오랜만에 와서 죄송합니다.
이따 하나 더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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