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4)
다만, 정곡을 찔러도 그것이 약점이 되진 않는다.
"형님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말이 나와서 말인데, 가문의 힘이 없었더라면 형님이 이 자리에 계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니, 애초에 선조가 없었더라면 태어나지도 못했겠죠."
"그게 네 행동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하나?"
"안될 건 또 뭡니까?"
레틴은 어깨를 으쓱했다.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 따윈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든 사회 구조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며 살아가죠. 그리고 그 위치란 보통 '태어남'으로 결정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 혼자 다 해먹을 수 있간이 한 명 정도는 있지. 하지만 레틴은 굳이 그 사람의 이름을 꺼내진 않았다.
"단순히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났냐는 것만으로 누구는 귀족이고, 누구는 농노의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후천적으로 얻은 지위를 이용하지 못할 이유라는 게 있습니까?"
"닥쳐라. 적어도 그것은 자신의 노력이 뒷받침된 강함이 전제하에 있을 때에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말을 하면서도 1황자는 이를 갈았다.
화술로 레틴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가진 재능이 다르다.
"주어진 것을 최대한 이용하는 게 무엇이 문제라는 겁니까?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형님과 저 중, '노력 없이 얻은 댓가'로 누가 더 이득을 많이 봤습니까? 예?"
객관적으로 봐도, 주관적으로 봐도 1황자는 레틴이 꿀을 빨며 살았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평생에 가깝게 자신의 집안 때문에 시달려 왔으니까.
"그리고, 형님은 지금 그렇게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면 안 될 텐데요?"
레틴은 삐딱하게 서며 고개를 갸웃했다.
레틴이 다음 황제에 등극되는 것을 막는 것은 여러 방법이 있다. 다만, 그것은 그의 뒤에 있는 비상식적인 인간을 제외하고 생각했을 때의 이야기다.
무력도, 정치력도, 경제력도 통하지 않는다. 인외(人外)의 개념을 등에 업은 자에게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
1황자는 침음성을 삼키며 자리에 앉았다. 레틴은 2황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둘째 형님은 하실 말씀 없으세요?"
"······무사히 복귀한 것을 축하한다."
이 이상 말을 늘려 봐야 손해밖에 되지 않는다. 2황자는 힘없이 꼬리를 말았다.
로젤린 및 그의 가족들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2황자의 행동에 불만을 갖지는 않았다. 그게 합리적인 판단이었기 때문이다.
순간, 레틴의 표정이 바뀌었다.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더니, 이내 그믐달처럼 샐쭉해졌다.
그리고 레틴은 폭소했다.
"아하하하하하!!"
마음껏 웃었다. 배를 잡고 웃었다. 이 세상이 떠나가라 싶을 정도로 격하게 웃음지었다.
오늘만큼 유쾌한 식사 자리는 없었다.
평생을 토끼로 살아왔다. 제 몸 지키기에 급급하고, 두려운 일이 있으면 숨죽여 떠는 것 이외에 취할 수 있는 해결책이 없었다.
여우의 송곳니가 너무나 두려웠다. 항상 입맛을 다시며 비열하게 웃고 있는 여우가 죽도록 미웠지만, 토끼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도망치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20년을 넘게 산 끝에, 우연히 호랑이의 등에 올라타게 되었다.
산천초목이 호랑이 이빨 앞에서 벌벌 떤다. 토끼는 그 감미로운 맛에 취해 버리고 말았다.
레틴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그래. 너희들도 당해 봐야 해.'
내가, 내 가족이, 그리고 내 가문이 지금까지 당했던 수모를 그대로 되갚아 주겠어. 아니, 그 이상으로!
이 자리에서, 4황자의 광기에 찬 웃음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황비, 그레이스의 아이들이 부들부들 떨며 엄마의 손을 붙잡았다.
"어머니, 무서워요."
"엄마······."
그레이스는 아무 말 없이 자식들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 역시 두려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침묵이 가득한 황족의 식사 자리, 한 인간만이 광기에 찬 웃음을 마음껏 터뜨리고 있었다.
"와하하하핫!"
루나는 죽을 맛이었다.
"흐어어어."
고백한 것은 좋다. 맺어진 것도 좋다. 드디어 정혼자가 생기는 것도 좋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루나는 체력에 자신이 있었다. 여자 수준은 옛저녁에 뛰어넘었고, 어지간한 남자들보다 더 강한 체력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일반인 수준에서의 이야기였다.
루나는 안도혁의 팔을 찰싹 때리며 말했다.
"별명 바꿔. 정천(精天)으로."
"······내 잘못인가."
안도혁은 귀엽게 투정부리는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나는 입을 삐죽였지만, 곧 안도혁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난생 처음 여자를 안게 된 안도혁은 자신의 말을 그대로 지켰다.
'절대 놔주지 않는다는 게 이런 뜻이었을 줄이야.'
혼자선 몸이 못 버틸 것이다. 루나는 필요 이상 정력적인 자신의 정혼자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의식적으로 담배에 손을 가져가려는 안도혁. 루나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그의 팔을 찰싹 쳤다.
"다 좋은데, 침대에서 담배 물지 마. 약속했잖아."
"으음."
습관이 고쳐져야 말이지. 안도혁은 손발만큼 익숙한 담배를 내려놓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오빠,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그렇군."
이곳에 머무른지 수 일째 되는 날, 레틴을 닥달하여 태의에게 진찰을 받았다.
결과는 예상한 대로였다.
"반(半) 초인에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이상하군요. 정천이라 불리시는 분일진대······."
"치료할 방법은 없습니까?"
"현재의 의학 기술로는 불가능합니다. 진짜 초인이 된다면 신체의 결함은 고쳐지는데, 스스로 단련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로글란트 영지에서 들었던 말과 맥락이 거의 같았다. 결국 안도혁은 얻은 것 없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곳에 머무를 이유는 없어진 셈이다.
"하지만 머리카락을 되찾을 이유도 더 이상 없다. 네 마음이 그대로라면."
안도혁은 두건을 쓰고 있지 않았다. 그 날 이후로 그는 검은 두건을 벗어던졌던 것이다.
루나는 코웃음을 쳤다.
"머리카락 유무로 마음이 바뀔 만큼 쉬운 여자라고 생각해?"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있지 않겠지."
"후후후."
"즉, 지금은 네 결정에 달렸다."
안도혁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뭔가 이 상태로 들으면 안될 것 같아, 루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분명한 목적이 있던 나와 달리, 너는 여행을 위해 여행을 떠났다. 작금의 내 목표가 의미가 없어진 이상, 네 목표만이 남은 것이다."
"그 딱딱한 말투 좀 어떻게 안 돼?"
"······어쨌든 말이다."
루나는 턱에 손을 얹고 고민하다, 이내 배시시 웃었다.
"그럼,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아빠한테 설명드려야지. 내 신랑이라고."
"······."
장인 어른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
철이 들기 전부터 부모님이 없었기에,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안도혁은 몰랐다.
또한 그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다. 비위를 어떻게든 맞추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많았어도.
다행히도 그의 여자는 백과사전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내가 가르쳐 줄게. 기초부터 차근차근."
"그래 주면 고맙다."
한 시름 던 것은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리라.
예의범절이란 무얼까를 생각해보던 안도혁은 문득 머리에 스쳐 지나가는 한 사람의 존재를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그보다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는데."
"갑자기 무슨 말이야?"
"집에 데려다 줘야지. 적어도 한 녀석만큼은."
에스턴은 고민에 빠졌다.
한때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악취는 거의 다 사라졌다. 평범한 요정 수준의 체취 외에는 나지 않았다.
즉, 그의 여행은 이제 종착지에 가까워졌다. 지금 수준으로도 평범하게 살아가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왜 이러지?'
몸의 상태가 이상해졌다. 문제는 그것이 긍정적인 방향이었다는 점이다.
에스턴은 원래 요정다운 몸매를 가지고 있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 긴 귀를 가진, 평범하다면 평범한 엘프다.
그런데, 그의 육체가 어느 순간 바뀌었다.
'키가 커졌어. 팔도 두꺼워지고. 이게 가능한 일인가?'
아주 약간이지만 분명 느낄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눈높이가 분명 달라져 있었고, 근력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했다.
성인의 키가 다시금 자라는 것은 아무리 요정이라고 해도 비상식적인 일이다. 파충류가 아니고서야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그래도 여기까지라면 그나마 이해가 가능한 범주이다. 인체라는 건 신비하기 마련이니까. 성인이 되어서도 키가 자라는 사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에스턴은 손바닥을 펼쳤다.
파앗
눈부신 광채가 손바닥 위에서 뿜어졌다. 아무런 트릭도 쓰지 않았음에도, 그의 손에선 빛의 구체가 생성되어 떠다니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뭐야?'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이상한 능력이 생겼다는 것을.
그리고 분명 이 현상은 하나를 나타내고 있었다.
'초인······이라고?'
인간 세상에서 만들어진 격언이 하나 있다.
신은 인간에게 초인을 주었다.
인간은 타 종족보다 약하다. 물 속에서 숨을 쉴 수도 없고, 짐승의 힘을 가지지도 않았으며, 숲과 소통할 수도 없으며, 하늘을 날 수도 없다.
그렇기에 인간을 어여삐 여긴 신은, 그들 중 일부에게 초인이 될 재능을 주었다. 다른 인간들을 지키기 위한 힘을 주었다.
이 말이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에스턴은 인간이 아닌 타 종족에서 초인이 나왔다는 소리는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왜지? 왜 내가?'
역사상 전무후무한 엘프 초인. 에스턴에게 이 현상은 기쁨보다는 당혹스러움을 유발했다.
그러나 에스턴은 곧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병에 걸리고 난 뒤 그의 행동은 소심하고 조심스러워졌지만, 원래는 쾌활하고 낙천적이었다. 요정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하지만 호기심이 돋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진짜 초인이라면 확인하는 방법이 있지.'
초인을 구분하는 기준은 단순하다. 독과 약이 듣느냐 듣지 않느냐다.
또한 상처가 상식 이상으로 빨리 아무는 특징도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손톱을 뽑아낸다 해도 사흘 안에 원상복구가 된다. 도마뱀처럼 재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에스턴은 화살촉에 묻힐 용도로 가지고 다니던 약병을 조심스레 꺼냈다.
'바곳의 독인데······.'
보통 사람이면 이 독에 당한 순간 퉁퉁 불어서 죽는다. 인간보다는 튼튼한 요정이라고 해도 몇 주는 앓아 누울 만한 극독이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극단적으로 안 좋아봤자 앓아 누우면 되겠지!'
바늘 끝에 독을 묻힌 에스턴은 자신의 팔에 독을 푸욱 찔러넣었다.
"······."
몇 분이나 지났을까.
에스턴은 팔이고 뭐고 전신이 멀쩡하다는 걸 깨달았다.
천연덕스럽게 에스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초인이 됐구나."
초인이 되면 된 거지 뭐.
팝콘을 좋아하는 요정은 태평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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