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에서(5)
일이 벌어진 건 어쩔 수 없다. 서석진은 바닥으로 사뿐하게 착지했다.
갑자기 자신의 앞에 떨어진 서석진을 본 해적 두목의 눈썹이 꿈틀했다.
“오, 너 등장 멋지다?”
그가 손을 슬쩍 내리자, 곧바로 화약 소리가 들렸다.
타타타탕
수십 정의 피스톨이 총알을 토해냈다.
해적 사수들의 사격 실력은 놀라웠다. 서석진에게 향하지 않은 총알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그게 목표물에 맞았냐는 조금 다른 문제였다.
투투툭
서석진의 주변으로 총알들이 떨어져 나갔다. 자상 하나 입지 않은 몸으로, 그는 아르키피라에게 검을 겨누었다.
아르키피라가 손뼉을 쳤다.
“오오! 대단해! 너, 음······그걸 뭐라고 하지. 초인이라고 하는 녀석이구나!”
서석진은 살짝 당황했다.
‘초인이라는 단어를 헷갈려?’
분명 느끼기엔 상대방도······.
생각하기도 잠시, 검을 빼든 아르키피라의 모습에 서석진은 임전태세를 갖추었다.
중간 길이의 커틀러스였다. 아르키피라는 슬쩍 웃으며 말했다.
“따분해서 돌아버릴 지경이었는데, 간만에 잘 됐다. 부탁이니······.”
챙
커틀러스가 무서운 속도로 휘둘러졌다. 간신히 받아낸 서석진은 검을 받아낸 손목이 시큰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르키피라가 소리쳤다.
“심심하지 않게 해다오!”
거친 기세와 함께 푸른 머리의 해적이 돌진해왔다. 서석진은 이를 악물었다.
“큭!”
커틀러스가 마구 휘둘러졌다.
난폭한 검세였다. 마치 폭풍 같은 연격에, 서석진은 미처 제대로 흘리는 것조차 어려웠다.
‘뭐가 이렇게 강해?’
검을 몇 번 맞대 보지 않아도 안다. 상대는 검사라고 하기엔 상당히 실력이 떨어졌다.
그러나 그 단점을 메우고도 남을 정도로 신체능력이 높았다. 불안정한 자세에서 한 손으로 휘두르는 내려치기가, 서석진의 양손 올려치기와 동수였다.
순식간에 수십 합이 오갔다.
몰아치는 기세를 받아내기만 하던 서석진은 어느 순간 검을 크게 휘두르며 거리를 벌렸다.
‘아, 침착하자.’
서석진은 깊게 심호흡하며 검을 가슴 높이로 들었다.
중검세. 어떠한 검법이든 이것이 기본이다. 이것에서 상단으로, 하단으로 이어진다.
마음이 흐트러질 때엔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아르키피라는 그런 서석진을 비웃었다.
“발악해본다 이거지?”
쏜살같이 쏟아진 그의 검은 빙그르르 회전하며 서석진의 다리를 노렸다. 마치 검수의 몸을 지킬 생각이 없다는 듯이.
갑자기 나온 자살특공의 방식에 서석진은 살짝 당황했으나, 이내 침착하게 상대의 머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어차피 살아남은 놈이 승리자다.
카앙
‘응?’
예상치 못한 소리와 함께 손아귀에 강한 반탄력이 느껴졌다.
불길함이 등골을 타고 흐른다. 서석진은 황급히 몸을 뺐지만, 그의 반응은 한 박자 늦었다.
파육음이 귓가에 저릿하게 박혔다.
촤악
아르키피라가 든 커틀러스의 끝에서 피가 방울져 떨어졌다.
허벅지에 상처를 입었다. 깊은 자상이 서석진의 다리를 가로질렀다.
서석진은 비틀거리며 멀쩡한 다리에 체중을 지탱했다.
“으으윽.”
다리가 깊게 베였다. 다행히 대퇴동맥이 베이진 않은 것 같았으나, 보통 사람이라면 당장 중환자실에 입원해야 할 상처였다.
아르키피라도 멀쩡하진 않았다. 기이할 정도로 긴 그의 혀가 머리에서 뺨으로 흐르는 피를 핥았다.
“그래도 생각보다 강한데. 죽을 뻔했잖아.”
겉보기엔 출혈이 있어 보이지만, 서석진은 그가 지금 진심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저 놈, 대체 정체가 뭐지?’
서석진은 쇠사슬 정도는 두부처럼 썰어 버릴 수 있었다. 그의 근력과 검술은 강철을 무와 동일시하는 수준에 이른 지 오래였다.
그런데 고작 생물의 두개골을 벨 수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검으로 내려친 상대의 머리뼈엔 상처조차 나지 않았을 것이다.
베고자 한 것을 베지 못한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다리에서 치솟는 고통을 참아내며 서석진은 말했다.
“머리에 철판이라도 둘렀냐?”
“흐음. 글쎄? 확인해 볼 테냐?”
내 머릿가죽을 벗겨서 말이야. 아르키피라는 이마에서 피가 흐르는 것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돌진했다.
어차피 그에게 딱히 타격은 없었다.
채앵 채애앵
모든 공격을 막아낸다. 흘리고, 쳐내고, 가끔씩은 반격도 해냈다.
서석진은 이를 악물고 손목을 움직였다.
‘죽을 만큼 단련했거든?’
고작 이런 곳에서 당할 만큼 어설픈 검술이 아니다. 비록 그 배움은 얕았지만, 어마어마한 양의 실전을 겪으면서 쌓아온 검술이다.
괴물을 상대로 하면서 말이다.
‘비록 상대는 검사가 아니었지만 말이야!’
얼굴에 자상이 생겼다. 의미 없다.
커틀러스가 어깨를 살짝 스쳤다. 큰 부상은 아니다.
노도와도 같은 공격을 피해낸 서석진의 눈이 어느 순간 빛났다.
‘그래, 여기다.’
적극적으로 공세를 펼칠 수 없다면 카운터를 노려야 한다.
거세게 찔러오는 커틀러스. 서석진의 칼은 그것을 부드럽게 흘려냈다.
흘려냄과 동시에 검은 앞으로 뻗었다.
쐐애액
아르키피라의 눈동자가 커졌다.
‘어라?’
칼이 마치 뱀처럼 굽이쳐 보였다. 너무 빠르기에 생겨난 잔상과도 같았다.
검은 용서 없이 아르키피라를 꿰뚫었다.
푸욱
팔을 찔린 아르키피라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여유롭던 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조금만 옆으로 나갔다면 가슴을 찔릴 뻔했군.’
피가 콸콸 쏟아졌다. 일반인이라면 팔을 잘라내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상처였다.
이걸로 상황이 비슷해졌다. 서석진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은 내가 불리하지만.’
검술뿐만 아니라 어떠한 무술도 마찬가지지만, 전투 중 사지 중 하나에 상처를 입는다는 건 막대한 전투력의 손실을 의미한다.
다리 하나가 말을 듣지 않는 상황에서 검을 펼치기는 상당히 어렵다. 체중 이동 자체가 평소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각오에 찬 눈동자로 검을 잡은 서석진을 보던 아르키피라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너 지금, 상황이 비슷해졌다고 생각했지?”
“······.”
“하여간 인간 놈들이란 착각 속에서 빠져 살지.”
아르키피라는 찔렸던 왼팔을 들어 보였다. 그것을 본 서석진의 눈동자가 커졌다.
“어, 어떻게?”
상처가 깨끗하게 아물어 있다. 약간의 흉터 비슷한 것이 보이긴 하지만, 그게 자신이 냈던 상처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자세히 보니 머리의 상처도 어느새 아물었다. 핏자국만 남아있을 뿐, 피는 더 이상 흐르지 않았던 것이다.
“아쉽게 됐구나. 세상에는 이해할 수 있는 일만 일어나는 건 아니지.”
커틀러스로 뒷목을 탁탁 치며 그는 서서히 다가왔다.
“그래서, 어쩔 거냐? 포기할 테냐?”
서석진은 검을 강하게 쥐었다.
‘그럴 수는 없지.’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뭣도 안 된다.
각오에 찬 그의 눈을 본 아르키피라는 탄성을 내질렀다.
“그렇게 상처를 입고도 아직 포기하지 않았구나. 역시 인간은 대단해!”
서석진은 의아해졌다.
“너, 아까부터 뭐라는 거야?”
말하는 투가 영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의 의문을 해소해 줄 생각은 없는지 아르키피라가 소리쳤다.
“이제 슬슬 끝내 주마!”
그 말과 함께 그는 갑판을 거세게 밟았다.
콰아앙
갑판의 일부분에 금이 갔다. 갑자기 바닥이 불안정해진 서석진은 자세를 낮추었으나, 상대의 노림수는 애초에 그것이 아니었다.
아르키피라는 밟아서 금이 간 갑판들을 뜯어내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으랴, 으랴!”
마치 노는 것처럼 흥겨운 모습. 그러나 공격을 받는 입장에선 죽을 맛이었다.
‘미치겠네!’
총알처럼 빠르게 날아오는 나무 판자들은 끝이 뾰족했다. 즉, 하나라도 몸에 허용했다간 중상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일이 쳐내기엔 면적이 너무 컸다. 하지만 다리 때문에 피할 수도 없다!
둔중한 충격이 쌓여 간다.
부상을 싸맬 시간은 없다. 조금씩 쌓이는 충격에, 쩍 벌어진 다리의 상처가 조금씩 악화되는 것이 느껴졌다.
서석진은 휘청했다.
자신이 흘린 피에 미끄러져서라기보다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이다.
머리가 멍해진다. 귀에서 이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이쯤 되자 깨달을 수밖에 없다. 이 싸움은 졌다는 것을.
“이런 젠장.”
욕설을 내뱉음과 동시에, 나무 판자가 아닌 아르키피라의 모습이 쏜살같이 그의 몸 앞에 도착했다.
커틀러스가 휘둘러지고, 서석진은 검으로 막아냈다.
그러나 이후 날아든 발차기까지 막아낼 여력은 없었다.
뻐어억
가슴팍을 거세게 걷어차였다.
무언가가 울컥하는 것이 느껴졌다. 서석진은 애써 그것을 다시 삼켰다.
‘큰일났네······.’
패배는 확정이다. 이제 와서 상황을 뒤집을 여력은 없었다.
아르키피라가 흥겨운 표정으로, 마치 춤이라도 출 듯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실제로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다.
사신이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서석진은 후들거리는 팔로 검을 간신히 들었다.
‘포기할 수는 없지.’
갑자기 사신의 발걸음이 멈췄다. 서석진은 묘한 표정으로 변한 아르키피라를 쳐다보았다.
‘뭐지?’
시선의 방향이 달랐다.
자신의 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위쪽.
서석진의 등 뒤에서 둔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익숙한, 하지만 익숙해서 더 반가운 그 목소리.
“고생했다.”
이어, 서석진의 몸이 휙 들렸다.
서석진의 뇌리를 데자뷰가 스치고 지나갔다.
“야, 이······!”
말을 끝맺을 시간은 없었다. 안도혁이 그를 뒤로 내던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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