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죽지는 못할 것이다(9)
에스턴은 상당히 조용한 성격이다. 이는 그와 만난 사람들 대다수가 자연스럽게 깨달을 정도로 공인되어 있는 사실이다.
말수도 별로 없고, 소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항상 즐겁게 떠들어대는 다른 요정들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더욱 극명해진다.
그러나 요즘 에스턴은 성격이 판이하게 달라지고 있었다. 원래 알았던 사람이 보면 놀랄 정도로.
"여깁니다! 이쪽 방향으로 가면 됩니다!"
요정 특유의 날렵한 몸놀림으로 가볍게 뛰어다니는 그의 얼굴에는 소년처럼 활력이 넘쳤다.
"어서 와요! 지금 이 순간을 즐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둑 잡는 것에서 무슨 즐거움을 느끼는지는 모르겠지만.
산과 숲에서 뛰어다니는 요정의 신체능력은 야생 동물에 준한다. 말 그대로 날듯이 이동하는 것이다.
'요즘 왜 저러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요정의 숲에서조차 말수가 별로 없던 그였는데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가.
저걸 내 발로 따라가단 죽겠다며 루나가 백기를 들었고, 안도혁은 그녀를 등에 업은 채 에스턴을 좇았다.
'분명히 무슨 심경 변화가 있기는 할 텐데.'
하루아침에 성격이 확 변하는 사람은 없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심성이 변할 만큼 큰 변화를 겪었던지, 아니면 원래 죽이고 있던 성격이 드러나는 것 정도다.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떠오르는 것은 달리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서석진이 일행에서 이탈했다는 것 정도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치기엔 그 둘은 의외로 죽이 잘 맞았다. 여행 중 둘이서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도 상당히 많이 봤던 것이다.
"알 수가 없구만."
"도혁, 무슨 말이에요?"
"아아, 별 것 아닙니다."
활기찬 게 나쁠 것은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안도혁은 마치 춤추듯이 방실방실 뛰어다니는 에스턴의 뒷통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말을 끌고 오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한 동산 위에 올라서자 에스턴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여기입니다."
그의 시선 끝, 동산 아래에는 상당한 규모의 마을이 있었다.
도시라고 부르긴 애매한 수준의 크기, 그러나 마을 치고는 제법 되는 규모였다. 안도혁은 잠시 고향 생각이 나는 자신을 발견하고 살짝 놀랐다.
딱 봐도 집 숫자가 백 단위를 가볍게 넘어간다. 이런 곳을 일일이 다 뒤지고 다니는 것은 무리다.
"그럼, 어느 곳에 숨겨져 있는지 파악 가능하겠습니까?"
"무리입니다. 이렇게 인위적인 곳에서 고작 풀 냄새 정도는 금방 사라져 버리니까요. 이미 아무런 냄새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에스턴이 그렇다면 어느 누구를 데려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안도혁은 루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루나 씨가 활약해 줄 차례입니다."
루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무린데요?"
안도혁은 순간 기겁할 정도로 놀랐다.
"예?"
"추적술은 이렇게 사람이 많이 돌아다니는 곳에서 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미리 상대의 몸에 특수 약품이라도 묻혀 놓았다면 모를까, 정보는 발자국밖에 없는데요."
"······."
"생각해보면 뻔하잖아요. 이렇게 사람 많은 마을에서 고작 열 명의 발자국이 남아 있을 리가 없죠."
"······그렇습니까."
그럼 그 발자국 채취는 뭐였을까.
일행은 마을 주위를 둘러보며 혹시나 남은 담배의 잔향이 있나 파악했다. 혹시나 도둑들이 그저 이 마을에 들르기만 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하지만 에스턴은 고개를 저었다. 마을 밖으로 빠져나간 담배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확실해졌다.
'이 마을에 있군.'
안도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드디어 코앞까지 다가왔고, 상대의 베일을 벗길 때가 되었다.
가벼운 심호흡과 함께, 안도혁은 이제 정말 몇 개 남지 않은 여송연에 불을 당기며 중얼거렸다.
"어느 누구든, 곱게 죽지는 못할 것이다."
나지막한 혼잣말, 그러나 여기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루나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주, 죽일 거에요?"
"필요하다면 말입니다."
"도둑질 때문에 사람을······."
"어디까지나 필요하다면."
이 시대는 혼란스러웠다. 사람 목숨이 파리처럼 사그라드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곳곳에서 약탈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환란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루나는 안도혁이 지금까지 필요 이상의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그녀의 눈앞에서 살인을 저지른 일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분명 그의 눈에서 느껴지는 것은 살의였다.
"그럼 서두릅시다. 도둑놈들이 훔쳐간 담배를 다 피워버리기 전에."
"코끼리 부대가 와도 그건 다 못 피워요."
"옳은 말씀입니다."
"······일단 들어갑시다."
마을은 한산한 편이었다. 곳곳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보이기는 했지만, 겨울이라 그런지 다들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던 것이다.
일행은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술집 겸 여관을 찾았다. 조사를 하기 전에 우선 밥이 먼저였으니까.
기묘한 모험가들의 조합을 본 주인은 눈을 꿈뻑였지만, 곧 생각 이상으로 많이 먹는 이 손님들에게 음식을 정신없이 서빙하기 시작했다.
맥주를 마시며 안도혁이 말했다.
"주인장. 혹시 이 근래에 수상한 사람들을 본 적 없습니까?"
"······."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그저 음식을 만들고 나르는 것 이외의 행동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 루나가 나섰다.
"정말 본 적 없으세요?"
그녀는 테이블 위로 은화 몇 개를 슬그머니 밀었다. 이런 경우에도 거절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루나의 예상은 반대로 돌아갔다.
"······모르오."
그는 은화를 받지도 않고 돌아섰다. 무뚝뚝하다기보다는 어딘가 당황이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루나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것 봐라?'
로글란트 지방이 그럭저럭 먹고 사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촌민들의 사정이 좋아 봤자 거기서 거기다. 어느 시대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현금을 거절한다?
루나는 일행의 귀를 모아 속삭였다.
"분명히 뭔가 있어요."
"무슨 말입니까, 그게?"
"아무리 생각해도 그래요. 만약 기우라면 다행이지만, 아니라면······."
루나의 말을 둘은 이해할 수 없었다. 발상 자체가 안 되는 것이다.
맛있지도 맛없지도 않은 식사를 끝낸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항상 걷는 것과 달리, 일행은 루나를 선두로 이동했다.
"촌장의 집에 가볼 거에요. 영주님의 명령에 따라 수색을 실시한다고 해야겠죠."
"그렇습니까?"
루나의 눈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는 둘은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그나저나 상당히 경계가 심하군.'
안도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곳곳에서 경계의 눈초리가 상당히 직설적으로 느껴졌다.
아니, 경계인지 적의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치 외부인을 의도적으로 배척하고자 하는 모양새다.
'내 생김새 때문만은 아닐테고, 그렇다면 왜지?'
만약 정말로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 동네였다면 마을에 여관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주민들이 여관을 굳이 이용할 리가 없으니까.
"쉿, 이리 와."
한 아낙이 놀고 있던 아이를 잽싸게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곁눈질로 안도혁 일행을 보는 그녀의 눈은 경계심을 숨기지 못했다.
'확실히 뭔가 있긴 있는 것 같다만.'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저 지금은 루나의 생각을 따를 뿐이다.
촌장의 집에 다다르는 데엔 한참이 걸렸다. 표지판이 있는 것도 아니라,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경계심 많은 마을 주민들 대부분은 그들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결국 근처에서 놀고 있던 꼬마 몇 명에게 은화를 쥐어 주며 간신히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군요."
루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집 하나 찾는 데에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해버린 것이다.
시계를 볼 것 까지도 없었다. 하늘 저편에선 벌써 해가 져 가고 있다. 어둑어둑한 땅거미가 차츰 대지를 좀먹어가는 것이 보인다.
촌장의 집은 그저 다 쓰러져가는 통나무집이었다. 마을 대표의 집처럼 생겼다고 보기엔 어려운 모양새로, 곳곳에 나무 썩은 흔적과 거미집이 즐비했다.
'하지만 여기만 그런 것도 아니었지.'
오면서 마을을 둘러본 결과, 다른 건물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회반죽으로 만든 집조차 없었던 것이다. 마을의 상황이 열악하다는 증거였다.
루나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촌장님! 안에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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