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우재회(朋友再會)-1
진태백은 무도(武都)에 도착해 있었다. 금륜법왕과 헤어진 뒤의 여정은 제법 평탄했고 덕분에 진태백은 이레 만에 감숙의 초입인 무도에 도착한 것이다. 지대가 높아서인지 주변 풍광은 황량했지만 그만큼 가까워 보이는 하늘은 청명하기 짝이 없었다. 객잔에 짐을 풀고 나서 무도 구경을 나온 진태백은 시장을 기웃거렸지만 변방(邊方)에 가까워서 인지 물건도 수가 적었고 품질도 여타 다른 성에 비해 좋지 못했다. 다만 사람들은 억센 풍모와는 달리 눈빛이 맑고 순박하여 그것만큼은 진태백의 마음에 들었다.
우당탕!
갑자기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모여있는 광경이 진태백의 눈에 들어왔고 무슨 일인가 싶어 진태백은 그곳으로 향했다. 몇 겹이나 되는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선 그의 눈에 건장한 사내와 그 사내에게 멱살이 잡힌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건장한 사내는 한손엔 고기를 써는 용도로 보이는 우도(牛刀)를 들고 있어 딱 봐도 소 잡는 백정이었고 그에게 멱살이 잡힌 남자는 왜소한 체구에 간사해 보이는 인상을 하고 있어 소투(小偸)나 배수(扒手)인 듯 보이는 사내였다.
“이놈! 당장 가져간 물건을 내놓지 못하겠느냐!”
백정 차림의 사내가 질그릇 깨지는 듯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자 주위가 쩌렁쩌렁 울렸다.
‘시장에서 백정일을 하는 사람이 내공을 지닌 고수란 말인가?’
진태백이 놀란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공력을 운기하는 기색도 없이 소리를 질렀음에도 목소리에 공력이 실려 주변을 쩌렁쩌렁 울렸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에게 멱살을 잡힌 사내는 그런 백정 차림의 사내 앞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고 계속 웃는 얼굴이라 무언가 내력을 가진 고수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헤헤헤, 이보게 동가(董家). 내 어찌 자네의 물건을 허락도 없이 가져가겠는가. 이 모가(毛家)가 비록 양상군자(梁上君子)라고는 하나 도리는 아는 사람일세.”
스스로를 모가라 부르는 사내가 동가라 부른 사내를 진정시키려 말을 했지만 그는 콧김을 내뿜으며 말했다.
“흥! 웃기지 마라. 모삼개(毛三介) 네놈의 신의 없음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어디서 거짓부렁을 하느냐!”
멱살을 잡힌 사내의 이름이 동씨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모삼개 그는 감숙에서 꽤나 유명한 자로 별호는 효왕객(曉往客)이었다. 문제는 사람이 가볍고 신의가 없어 그저 뒷골목에서 조잡한 도둑질로 연명하는 자라는 소문이 퍼져있다는 것이었다.
“아니, 아무리 신의가 없다고 하지만 훔치지 않은 것을 어찌 훔쳤다고 하겠느냐! 동탁(董倬) 네가 아무리 이름난 고수라도 이럴 수는 없는 법이다!”
모삼개의 입에서 동씨 사내, 동탁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다시 한 번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는 꽤 유명한 도객(刀客)으로 원래는 섬서성 소화산(小華山) 일대를 거점으로 삼아 활동하는 인물로 도도공(屠刀工)이라는 별호로 알려진 고수였다.
“시끄럽다. 네놈 외에는 그것을 탐낼만한 사람이 없느니라. 내놓지 않으면 당장 물고를 낼 것이다. 어서 내놓아라!”
한사람은 한사코 훔치지 않았다하고 한사람은 너밖에 훔칠 사람이 없다고 하니 그 논쟁이 끝날 리 없었다. 동탁은 한사코 모삼개가 훔치지 않았다고 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 얼굴이 붉어지고 숨이 거칠어지더니 모삼개를 힘껏 집어던졌다. 그의 힘도 보통이 아닌 듯 사람을 집어던지는데 부웅하는 바람가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가 시장에 차려진 좌판에 처박히기 직전, 누군가 신형을 날려 그의 뒷덜미를 잡고는 다치지 않도록 바닥에 내려놓았다.
“누구냐!”
가뜩이나 화가 나있는 판에 모삼개를 누군가가 구해주니 그의 화는 더욱 솟구쳤다. 그러나 모삼개를 구한 이의 말을 듣자마자 그는 멈칫했다.
“하하하, 본인은 공동파(崆峒派)의 제자인 박대용(朴大用)이라 합니다. 본의 아니게 끼어들게 되어 죄송합니다만 혹시 동선배께서 찾으시는 물건이 금우(金牛)의 우황(牛黃)이 아닌지?”
스스로를 공동파의 제자라 소개한 박대용의 말에 동탁이 흠칫했다. 사실 얼마 전 매우 희귀한 소인 금우를 잡게 되었는데 마침 또 영약인 우황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고이 숨겨두었다. 금우의 우황은 그 자체로도 영약이지만 도가(道家)에서 연단(鍊丹)을 할 때 쓰이는 약재이기도 했다. 때문에 청성이나 공동 등 좌도(左道) 수련을 하는 거대 방파에 비싸게 팔 생각이었는데 어느 샌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기억을 더듬은 끝에 금우를 잡고 각을 뜨고 있을 때 모삼개가 와서 간단한 대화를 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는 소화산의 집에서 감숙성 무도까지 모삼개를 쫓아온 것이었다. 소문이 나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은밀히 쫓아왔건만 눈앞의 공동파 제자가 정확히 그 물건을 언급하니 이젠 부정할 수도 없게 되어 버렸다.
“어흠, 그렇네. 내가 얼마 전 잡은 금우의 우황이 사라졌는데 저놈 외에는 금우를 잡을 적에 나를 찾아온 사람이 없었네.”
동탁의 설명을 들은 박대용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사실 금우의 우황을 찾아달라고 말한 것은 그였고 그의 말을 들은 모삼개가 자신 있게 자신이 구해올 테니 돈이나 준비해두라고 했던 것이다. 워낙에 그에 대한 소문이 좋지 않아 반신반의하면서도 금우의 우황을 찾을 길이 막막하여 그에게 부탁을 했었다. 한데 역시나 도둑질을 한 것이 분명했다.
“먼저 동선배께 사과부터 드리겠소. 제 사부님께서 연단에 금우의 우황이 필요하다 하시어서 급히 구하던 중 이 사람이 자신이 구해주겠다며 나섰었습니다. 한데 그것을 동선배에게서 훔친 모양이군요.”
박대용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고개를 숙이자 동탁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자네에게 사과 받을 일이 아닐세. 잘못이야 저놈이 한 것이지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구하려한 자네에게 어찌 잘못이 있겠는가. 이놈 모가야! 어서 금우의 우황을 내놓지 못하겠느냐!”
다시 한 번 동탁이 눈을 부라리며 자신을 채근하자 눈알을 데룩데룩 굴리던 모삼개가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무언가 둥근 물체를 던졌다.
펑!
그러자 둥근 물체가 터지며 자욱한 연기가 일어났고 박대용과 동탁은 한순간 모삼개의 모습을 놓치고 말았다.
빡! 와장창!
그런데 갑자기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잠시 후 연기가 걷히고 나서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뒷덜미를 잡힌 채 공중에 매달려있는 모삼개와 그의 뒷덜미를 잡고 있는 왼쪽 눈을 가르고 내려온 흉터가 인상적인 청년이었다.
“오랜만이다, 대용.”
“넌?”
박대용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얼굴의 흉터는 기억에 없지만 눈앞에 서있는 남자는 분명 어릴 적 벗이었던, 멀리 조선에 있어야할 사람이었다.
“태백, 태백이냐?”
“그래, 나 무담선생님의 제자인 진태백이다.”
박대용은 믿어지지 않는 듯 천천히 진태백에게로 걸어왔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잠시 그를 바라보던 박대용은 와락 진태백을 껴안았다.
“이 자식! 잘 있었구나!”
“그래, 너도 잘 있었냐.”
“보면 보르겠냐. 이 몸이 이래봬도 구파일방 중 공동파의 제자다!”
박대용의 눈에도, 진태백의 눈에도 눈물이 맺혀있었다. 십년이 넘는 세월을 만나지 못했던 벗들의 해후였다.
“그래, 어떻게 중원에 오게 된 거냐?”
모삼개를 동탁에게 넘겨준 뒤 그가 금우의 우황을 가지러간 사이 둘은 가까운 곳에 있는 객잔으로 자리를 옮겼고 진태백은 술을 마시며 중원으로 오게 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의 말을 들은 박대용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담선생이시라면 잘 계실 것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조선 땅에서 무담선생님을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겠지. 여차하면 졸본으로 피신하셔도 될 것이고. 그런데 어떻게 공동파의 제자가 된 것이냐?”
진태백의 물음에 박대용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연경(燕京)에 와서 한 몇 년간은 잘 있었는데, 일이 꼬여버렸다.”
진태백과 박대용은 기억이 나지 않을 무렵부터 함께 동네를 뛰어다니던 동무였다. 한데 박대용이 열 살 되던 해에 역관(譯官)이던 그의 아버지가 명나라로 이주를 하게 되었고 당연히 박대용도 같이 이주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연경으로 이주하여 큰 상점을 맡아 장궤(掌櫃)로 열심히 일했고 이주하고 삼년 정도 아무런 불편 없이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관군이 밀려들어와 상점을 샅샅이 뒤졌고 지하에서 대량의 아편(鴉片)이 발견되었다. 박대용의 아버지는 모르는 일이었으나 당연히 압송되어 고신(拷訊)을 당했고 결국 상점 주인이 아편 밀매를 한 것으로 드러나 풀려나기는 했으나 워낙에 심한 고초를 겪은 탓인지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 또한 억울함에 화병으로 쓰러져 몇 달 자리보전을 하다가 죽고 말았다.
사정이 이렇게 되다보니 이제 열 몇 살 된 어린아이가 생계를 꾸려나가기는 요원한 일이다. 그나마 있던 재산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병구완에 모두 써버린 터라 당장 끼니 때울 일도 문제였다. 결국 마지막 호구지책인 구걸을 나섰으나 박대용도 나름 글공부를 한 처지에 구걸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고 더군다나 그가 구걸하는 자리도 이미 다른 거지패가 선점하고 있어 죽도록 얻어맞기도 했다. 그러나 죽을 수는 없었다. 너무도 억울해서 죽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을 돌아다니며 구걸을 하던 중 예전에 아버지와 거래를 했었던 약방 노인이 그를 거두어 주었고 겨우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렇게 몇 달간을 약방에서 일하던 중 어느 날 허름한 도복(道服)을 걸친 도사가 약방에 찾아왔고 몇 가지 약재를 고르던 중 박대용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더니 숨 쉬는 법과 걷는 법을 어디서 배웠느냐고 묻더란다. 그래서 조선에 있을 무렵 배웠다하니 몇 가지를 더 물어본 다음 무공을 배우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박대용은 총각으로 늙어죽을 생각도 없고 약방 주인에게 신세진 것도 있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했고 노도사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도사가 될 필요는 없고 약방 주인에게도 잘 말해주겠다고 말했고 그제야 박대용은 무공을 배우겠다고 대답했다.
“그때는 몰랐는데 사부님이 공동오로(崆峒五老) 중 삼로(三老)일 줄 알았겠냐. 뭐, 그렇게 제자가 되고나서 내공도 익히고 무공도 익히고 해서 제법 이름도 알려졌다.”
공동오로 중 삼로라면 광천도인(廣川道人)이었다. 공동파는 원래 여러 도문(道門)의 집합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 배분이 복잡한 문파였다. 한데 그 공동파에서 최상위의 배분을 가진 공동오로의 광천도인의 제자라면 중원 어디를 가도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신분이었다. 더군다나 광천도인은 깊은 법력으로도 유명한 사람이어서 그가 써준 부적은 가보로 물려줄 정도로 효험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었다.
“부모님의 일은······, 유감이다.”
진태백의 위로에 박대용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괜찮다. 조선에 있던 네가 어찌 내 위험을 알았겠느냐. 다른 무엇보다 네가 이곳으로 온 것이 가장 기쁜 일이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객잔의 문이 열리며 동탁이 돌아왔다. 그는 진태백과 박대용이 있는 곳을 보더니 성큼성큼 걸어와 입을 열었다.
“저, 금우의 우황을 가지고 왔네만.”
동탁의 말에 박대용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일단 앉아서 목이라도 축이시지요.”
그가 내민 술잔을 받아들고 석잔의 술을 마신 동탁은 품속에서 조그만 함을 꺼내 박대용에게 내밀었고 그는 함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다음 품속에서 봉투를 꺼내 동탁에게 넘겨주었다.
“남원전장(南原錢莊)의 전표입니다. 은자 백냥인데 모자라진 않을지······.”
박대용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동탁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괜찮네. 오히려 박소협과 진소협이 아니었으면 잃어버렸을 물건일세. 물건 값보다는 두 젊은 영웅들과 만나게 된 것이 나는 더욱 기쁜 일일세. 한데, 진소협.”
“말씀하시지요.”
동탁의 말에 진태백이 답했고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 최근 젊은 층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진 고수에 대해서 들은 바 있네만. 그 용모가 자네와 비슷하다네. 혹시······.”
“맞을 것입니다. 제가 분광발도입니다.”
진태백의 말에 박대용도, 동탁도 얼어붙었다. 진태백은 크게 신경 쓰고 있지 않은 일이었지만 최근 강호인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화제에 오르는 사람을 꼽으라면 진태백은 무조건 들어갈 것이다. 구주구왕과 버금가는 고수인 팔부왕 중 가루라왕과 비긴 일이며 당랑대전 당시 신비의 고수인 인노를 상대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겨뤘던 일은 강호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큰 화제가 되고 있었다. 그 화제의 당사자가 눈앞에 있으니 놀랄만한 일임에 분명했다.
- 작가의말
아하하;;; 상당히 늦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풀어낼지 고민하는 중에 열흘이 넘게 지났더군요.
재미도 없는거 올려봤자 의미도 없고 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이야기를 써서 올립니다.
재밌게 읽어주세요.
ps. 추천과 댓글은 필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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