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권파옥(一拳破玉)-1
박대용과 헤어진 진태백은 이틀정도를 더 무도에서 묵었다. 아무리 진태백이 강골이라고는 하지만 가루라왕을 비롯해 인노와의 싸움은 격렬한 것이었고 연달아 이어진 격전에 그의 몸은 휴식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여독을 푼 뒤 진태백은 길을 나섰다. 농서까지는 서두르면 사나흘이면 닿을 거리였지만 고원지대인데다 길도 그리 좋지 않아 이레만에야 그는 농서에 도착했다. 시장했는지 진태백의 발길은 자연히 객잔으로 향했다. 음식을 주문해 간단히 식사를 마친 진태백은 한결 노인의 유해를 어디에 안치할지를 고민했다. 포숙의 경우엔 수소문을 했으나 연고가 있는 사람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제법 괜찮은 자리를 직접 찾아 안치했지만 한결의 경우도 그렇다고는 볼 수 없었다.
농서는 꽤 유명한 무인을 여럿 배출한 지방이었다. 변방이 가까운 탓에 문(文)보다는 무(武)가 더 강조되는 곳이었고 공동파의 영향권 내인데다 좀더 멀리가면 섬서성에는 구파일방 중 가장 이름 높은 문파인 종남과 화산이 있었다.
하룻밤을 객잔에서 묵은 진태백은 점소이에게 유명한 무관(武館)이 있는지 물었고 진태백이 어제 건넨 동전 덕택에 점소이는 세군데의 무관을 알려주었다. 한곳은 공동파의 속가제자인 태성검(泰成劍) 고령(高逞)이 세운 초열관(焦熱館)이었고 한곳은 농서의 유명한 협객인 호군(虎君) 사정전(斯正傳)이라는 자가 관주로 있는 백청관(白淸館)이었다. 마지막 한곳은 옥령관(玉玲館)이라는 곳이었는데 특이하게도 관주가 마흔 전후의 여성이며 관도들 또한 여성뿐인 특이한 곳이었다. 관주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고 그저 옥대랑(玉大娘)이라 불리며 그 무위가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었다.
“혹시 그 중 북두검 한결과 관계가 있는 곳이 있는가?”
“얼마 전 돌아가신 북두검 대협 말입니까요? 제자를 두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제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친분이나 혈연이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일세. 아는바가 있는가?”
진태백의 물음에 점소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 같은 무지렁이가 뭘 알겠습니까요. 아마 백청관 호군 사대협께서 어느 정도 친분이 있거나 하실 겁니다. 고대협께서는 사파라고 생각되는 사람과는 상종도 않으시고 옥대랑은 거의 바깥출입을 안 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점소이의 말에 진태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려줘서 고맙네.”
점소이가 물러간 후 진태백은 생각에 잠겼다. 북두검 한결이 아무리 사파의 고수로 알려졌다고는 하지만 그 명성이 검왕과 비견될 정도로 뛰어난 이다. 한데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가장 정통해야할 점소이 조차도 그에 대해 잘 모른다면 무언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세한 것은 무관을 찾아가봐야 알 수 있겠군.’
생각을 정리한 진태백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곳의 무관을 모두 돌아보려면 하루가 다 갈 것이다.
진태백은 그리 크다고는 할 수 없는 무관 앞에 서있었다. 백청관이라는 현판이 걸린 대문을 잠시 바라보던 진태백은 대문을 열고 들어갔고 그러자 건장한 체격을 가진 청년이 대뜸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거친 풍모와는 달리 그는 제법 예의를 갖춘 말로 진태백에게 물었고 그는 청년에게 말했다.
“관주께 여쭐 것이 있어 왔습니다. 관주를 뵈올 수 있겠습니까.”
진태백의 말에 잠시 그를 바라보던 청년이 자신을 따라오라 말했고 진태백은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내실에 다다르자 청년은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사부님, 마정일(馬丁一)입니다. 손님이 오셔서 모시고 왔습니다.”
“들어오거라.”
내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마정일은 문을 열고 들어갔고 진태백도 그의 뒤를 따랐다. 향을 태웠는지 향내가 나는 방안에서 갈삼(葛衫)을 걸친 사내가 서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고 마정일은 진태백에게 말했다.
“저희 사부님이십니다.”
마정일의 소개에 진태백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진태백이라고 합니다.”
정중한 인사에 갈삼 사내, 사정전이 말했다.
“처음 뵙겠소. 사정전이오.”
사정전은 진태백에게 자리를 권한 다음 마정일에게 손짓했다. 그는 예의바르게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갔고 두 사람만이 내실에 남자 진태백에게 말했다.
“내게 물으실 것이 있다고 하셨소?”
진태백이 사정전에게 받은 인상은 올곧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크게 부유하지는 않더라도 그는 명성에 비해 검박한 생활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눈꼬리가 날카롭고 치솟은 눈썹은 마치 범을 보는듯하여 호군이라는 별호를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그의 성정과 외모를 잘 나타낸다고 생각되었다.
“그렇습니다. 혹시 북두검 한결 노인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진태백의 질문에 사정전은 턱밑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허허, 농서에서 무공을 익힌다는 사람들 중 한대협을 모르는 이가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오. 뭐니 뭐니 해도 그분은 백년 내에 농서에서 배출된 최고의 고수이니 말이오.”
“혹 그분의 친족이나 친분이 있는 분을 아십니까?”
“음, 먼저 그분의 친족을 찾는 이유를 말씀해주셔야 할 것 같소만.”
사정전의 말은 당연한 것이었다. 무림을 행도하는 이들은 모두가 크고 작은 은원에 얽매이게 된다. 때로 그것은 자신이 아닌 가족이나 친구에게 향하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날아들고 그렇게 원한의 고리가 만들어진다. 때문에 농서의 무인으로 그를 어느 정도 존경하고 있는 사정전에게 있어서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분의 친족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의 유해를 모시고 왔기 때문에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진태백의 말에 사정전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비록 농서에서 무관을 열어 생활하고는 있지만 무림의 소문에 완전히 귀를 닫은 것은 아니었다. 그 또한 한명의 무인으로 농서에서는 작지 않은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혹시 분광발도?”
사정전의 말에 진태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가 분광발도 진태백 입니다.”
순순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진태백의 말에 사정전은 말없이 수염만 쓰다듬었다. 그는 한결의 친족이 살고 있는 곳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스스로 짊어진 피에 책임을 지려하는 이 청년이 한결의 친족을 만나면 어떤 수모를 겪을지 알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사정전을 망설이게 했다.
“관주께서 무엇을 걱정하시는지는 짐작이 갑니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히 제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책임입니다. 그러니 알고 계시다면 제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내 듣기로 남북쌍두와의 싸움은 정당한 것이라 했소. 그런데 진소협이 굳이 그 책임을 질 필요는······.”
“제 스스로 결정한 일입니다. 한노인의 친족이 제게 침을 뱉건 돌을 던지건, 제가 감내해야지요. 정당한 싸움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진태백의 말에 사정전은 더 이상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거기에 생각이 닿자 사정전은 진태백에게 불쑥 말을 꺼냈다.
“한대협의 친족이 있는 곳을 알려드릴 수는 있소. 다만 조건이 있소이다.”
“무엇입니까?”
“본인도 진소협과 동행하겠소. 부당한 핍박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있을 것이오.”
단단히 결심한 듯 사정전의 눈에서는 신광이 번뜩였고 진태백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저곳이 한노인의 친족이 살고 있는 곳일세.”
사정전이 가리킨 곳은 조그만 부락이었다. 농서 성내를 벗어나 한 시진 가량을 말을 달려 도착한 곳은 산자락에 기대어 있는 마을이었고 그것은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이었다.
“이곳은 한씨 집성촌(集性村)일세. 나도 한대협에 대해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오랫동안 수소문 한 결과 간신히 알아낸 곳이지. 하지만 그의 사부가 누구인지, 사문이 어디인지는 끝내 알아낼 수가 없었다네. 그가 열 살 어린나이에 어떤 이를 만나 길을 떠났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단서도 남아있질 않더군.”
말을 이끌고 걷는 중 사정전은 한결에 대해 자신이 알아낸 것을 진태백에게 들려주었다. 그러나 결국 그의 출신지와 언제 마을을 떠났는지만 알 수 있을 뿐 수년에 걸친 조사로도 거기까지가 한계였던 것이다.
“이곳이 촌장댁일세. 들어가 보세나.”
낡고 허름한 집이었다. 촌장은 거의 한결과 동년배로 보였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탓인지 한결보다 더욱 늙어보였으나 사정전은 이전에도 이곳에 온 적이 있어 그가 한결과 먼 친척관계이며 어릴 적 같이 놀던 동무라고 말했다.
“그래, 무슨 일로 오신게요?”
평생을 밭뙈기만 갈고 살던 촌장은 무공이 무엇인지 무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결국 진태백은 한노인이 자신에게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말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들이 무인이라면 떳떳하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은원을 정리했을 테지만 평생을 농사꾼으로 살아온 그들을 피를 피로 씻는 원한의 사슬 속으로 몰아넣을 수는 없었다. 때문에 그저 우연히 그의 유해를 수습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찾아왔다고만 말했다. 그러자 촌장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진태백이 건넨 한결의 유품과 유골함을 껴안고는 잘 돌아왔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너무 마음에 두지 말게나.”
사정전이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위로가 되지는 못했다. 수십 년 만에 한줌의 백골이 되어 돌아온 벗의 모습을 보고 울던 촌장의 모습은 진한 자책이 되어 진태백의 가슴을 짓눌렀다. 차라리 왜 구하지 못했냐며 그를 매도했더라면 이렇게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촌장은 원수가 누구인지, 왜 구하지 못했는지를 묻지 않았다. 원망보다는 감사를, 복수보다는 용서를 택한 촌장의 모습은 그 무엇보다도 커다란 그림자를 진태백에게 남겼다. 진태백은 그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위로의 말을 건네던 사정전은 괜스레 머쓱해져서 그의 뒤를 따랐고 어느새 저물어가는 해는 그런 그들의 뒤에 진한 땅거미를 드리웠다.
농서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해는 거의 서산 너머로 지고 있었다. 사정전의 권유로 자신이 묵고있는 객잔에서 두 사람은 말없이 술을 마셨다. 침묵이 너무 길었는지 사정전은 진태백에게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스스로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인가?”
사정전의 말에 진태백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무림을 행도하다 보면 때로는 원치 않는 살생을 해야 할 때가 있지. 나도 그랬고 말일세.”
“관주께서는 스스로의 손에 묻은 피를 기억하십니까?”
“모두를 기억하지는 못하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를 얽맬 필요는 없지 않은가.”
사정전의 말에 진태백은 고개를 들어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뱉으며 말했다.
“얼마 전 누군가에게 잘난 듯 오상(五常)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진태백의 말에 사정전의 눈이 그를 향했다. 그러나 진태백은 사정전이 그를 바라보던 말던 말을 이었다.
“오늘 촌장어른을 보며 생각해봤습니다. 잘난 척 아는 척 하며 오상에 대해 말해도 역시 저 또한 단 한 가지도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염불만 한 셈이지요. 물론 그것이 제가 오상을 실천하기 위해 정진하지 않을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배우지 않았어도 몸소 실천하는 사람을 보니 그것이, 그것이 너무도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제야 사정전은 진태백이 침울해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지자(知者)가 행자(行者)를 보며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촌장은 배우지 못하고 알지 못하나 행자였고 진태백은 배우고 알았으나 행자가 되지 못했다. 그것이 진태백이 침울해 하는 이유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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