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왔소이다!

산동으로-2

진태백은 자신이 묵고있는 방으로 돌아와 짐을 챙겼다. 짐이라고 해봐야 홍삼이 들어있는 함과 옷가지 몇 개, 무담선생이 준 태사혜와 수혜자가 전부였으니 봇짐으로 싸놓으니 그렇게 큰 짐도 아니었다.

똑똑.

봇짐을 챙겨두고 잠시 방을 둘러보던 진태백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방문을 열었다. 방문을 열었을 때 문 앞에 서있던 사람은 팽설이었다.

“팽소저, 무슨 일입니까?”

진태백과 팽설의 관계는 아무리 좋게 봐도 좋다고 하기 힘들었다. 진태백은 진태백대로 팽설의 첫인상이 좋지 않았고 팽설은 팽설대로 진태백에게 두들겨 맞았으니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다.

“아……, 내일 떠나신다고 해서.”

팽설은 말을 더듬으며 진태백에게 말했다. 사실 그녀는 팽철신과 진태백에게 혼이 난 이후 사흘간이나 산 시체처럼 지냈는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진태백에게 얻어맞은 것이 분했으나 자신이 얼마나 주변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했는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요 며칠간 진태백은 그녀를 만나지도 만날 수도 없었지만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랄 정도로 그녀의 행동거지는 변해 있었고 그녀를 가장 자주 만난 그녀의 모친인 장미려도 그녀가 변했다는 것을 인정할 정도였다.

“그 말이 벌써 세가 내에 퍼졌군요.”

진태백은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고 팽설은 자기도 모르게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왼쪽 눈을 가로지르는 흉터까지 있어 험악해 보여야할 진태백의 얼굴이 너무도 빛나보였던 것이다.

“팽소저, 얼굴이 빨간데 몸이 불편하십니까?”

팽설은 진태백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홧빛으로 물든 얼굴을 두어 번 흔든 그녀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 여자가 왔는데 언제까지 문밖에 세워둘 생각인가요?”

“후후, 제가 실수했군요. 들어오십시오.”

진태백의 안내에 팽설은 진태백이 묵고 있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은은한 약초향이 맴도는 방안은 진태백의 성정을 대변하듯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침상에는 잘 말려진 봇짐 하나만 놓여있었다. 진태백은 차를 따라서 그녀에게 주었고 팽설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어떤 용건으로 오셨는지?”

마찬가지로 차를 한 모금 마신 진태백이 팽설에게 물었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질렀다.

“집주인이 집에 묵고 있는 손님도 못 찾아오나요?”

그녀가 소리를 지르자 진태백은 움찔했지만 곧이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이거 또 제가 실례를 범했군요. 미안합니다.”

‘왜 이러는 거야! 멍청이!’

하지만 팽설은 자책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진태백에게 하는 말마다 퉁명스러우니 자신도 당황스러웠다.

탁.

팽설은 소매에서 조그만 옥패(玉佩)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고 차분히 차를 마시던 진태백은 그녀에게 물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팽가의 손님이라는 증표예요. 이것을 가지고 있다면 적어도 장강이북에서는 아무도 진소협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예요.”

팽설은 쉽게 말했지만 그녀가 내민 옥패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곤륜(崑崙)에서만 난다는 귀한 남온옥(藍溫玉)으로 만들어 지닌 이의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사기(邪氣)가 침범하지 못하게 해주는 것으로 팽가에서는 직계후손 외에는 아무도 가지지 못하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뜻은 감사하지만 호의는 거절하겠습니다.”

진태백의 말에 팽설의 눈이 커졌다. 남들은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것을 이렇게 쉽게 거절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째서죠?”

팽설의 눈이 가늘어지고 목소리가 뾰족해졌지만 진태백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제가 비록 군자(君子)는 아니지만 호가호위(狐假虎威)는 하지 않습니다. 팽가에서 그런 행패를 부린 저를 좋게 보아주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제게는 그것이 딱히 필요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팽설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 사실 그녀가 준 옥패는 자신의 것으로 혹시 진태백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핑계로 그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진태백에게 건넸던 것이다.

“당신은……, 하북팽가를 무시하는 건가요?”

‘확실히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군.’

팽설의 말에 진태백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강호의 역학관계(力學關係)에 끼고 싶지 않을뿐더러 지금은 아무런 구속도 없이 중원을 돌아다니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옥패를 가지고 있는 다면 좋건 싫건 그 역학관계에 관여되고 말 것입니다.”

진태백의 말에 팽설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잘 숨기고 다녀도 정체가 드러나는 곳이 강호다. 거기다 구주구왕의 한명인 자신의 아버지와 진태백이 겨룬 것은 이미 전 중원에 퍼져있을 것이 분명했고 진태백의 인상착의가 흔한 것도 아니니 만약 진태백이 옥패를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이들이 알게 되면 진태백은 원치 않는 다툼에 휘말릴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알겠어요.”

“이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팽소저.”

팽설은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옥패를 다시 소맷자락 안에 넣은 다음 말했다.

“차가 식었군요. 한잔 더 주시겠어요?”

쪼르륵.

진태백은 대답 없이 팽설의 찻잔에 차를 부어주었다. 팽설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다음 천천히 말을 꺼냈다.

“사실 진소협에게 혼이 난 다음날 잠을 못 잤어요. 아버지께 혼난 것도 있었지만 진소협에게 뺨을 맞은 게 분해서요.”

진태백이 팽가에 온 첫날의 일을 꺼내자 진태백의 얼굴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것은 자신도 과했다고 생각하는 일이었는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그 일을 들고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거기다 팽설은 당사자인 만큼 진태백이 빠져나갈 구멍도 없다는 것이 제일 큰 이유였다. 그러나 팽설은 진태백의 표정이 변하건 말건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생각을 하다 보니 제가 얼마나 함부로 행동을 했었는지 생각나더군요. 팽가의 여식이 아니라 보통의 집안이었다면 이미 욕을 당하고 죽었을지도 모르지요. 그것을 깨닫고 나니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후후, 정말로 창피하더군요.”

진태백은 가만히 팽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부끄러운 듯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느낀 방종함은 며칠 사이에 없어져 있었고 누가보아도 요조숙녀로 볼만큼의 기품이 느껴지고 있었다.

“덕분에 진소협께는 감사하고 있어요. 여태껏 방종하게 살아온 저를 되돌아볼 기회를 주셔서요.”

“제가 소저께 무례했던 것을 책하지 않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소저께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반성을 하셨다면 이제 남은 것은 스스로 변하는 것뿐입니다. 지금 보니 소저께서는 며칠 사이에 예전의 방종함을 떨쳐내셨으니 충분히 바뀌실 수 있을 겁니다.”

진태백의 말에 팽설은 그를 바라보았다. 진태백의 얼굴에는 진정만이 담겨있었고 그녀는 그가 자신의 멸시하거나 경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던 중 팽설의 얼굴이 붉어졌다. 진태백의 흑백이 분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눈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얼굴이 붉어진 팽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고 진태백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시 뵐 수 있겠지요?”

“당연하지요. 사람의 인연은 질긴 법이니까요.”

진태백의 말에 팽설은 만족한 듯 살짝 고개를 숙인 다음 방을 나갔고 진태백은 방에 남은 팽설의 방향(芳香)을 느끼고는 얼굴이 붉어졌다.

다음날 진태백은 팽철신과 팽철균 등을 만난 다음 팽가를 나섰다. 팽철신은 산동까지는 먼 길이니 말을 타고 가라면서 말을 한필 내주었고 노자까지 넉넉히 챙겨주었다. 진태백이 고사했으나 팽철신은 상처를 입은데 대한 보상이라며 억지로 쥐여 주었고 결국 진태백은 그것을 받아들고 팽가를 나서게 되었다.

무림맹 맹주전(盟主殿). 혁진풍은 며칠 전 있었던 진태백의 팽가 난입사건에 대해서 박상중을 통해 보고받고 있었다.

“그 분광발도(分光拔刀)라는 녀석의 행방은?”

“오늘 아침에 하북팽가를 떠났다고 합니다.”

“예상되는 행선지는?”

“입수된 정보로는 산동으로 간다고 했답니다.”

“황보세가와 산동악가(山東岳家)에 연락을 하도록. 그런데 마도(魔道)나 서장(西藏)의 고수가 아닌 것은 확실한가?”

“그의 출신지는 조선이라고 합니다. 팽가주인 팽철신 대협의 일섬(一閃)을 깬 그의 발도(拔刀)는 바다건너 왜국(倭國)의 무사들이 사용하는 검술과 비슷했다고 하더군요.”

“확실한가?”

“절강성(浙江省)에서 오랫동안 수군(水軍)에 복무했던 이의 말입니다. 틀림없겠지요.”

진태백은 의도치 않게 중원 전역에서 화제 거리가 되고 있었다. 구주구왕인 팽철신을 쾌도(快刀)라는 일부분의 무공에서만이라도 이겼다는 것은 정파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로인해 개방(丐幇)을 비롯하여 여러 문파가 그를 지켜보는 상태였다. 팽가 유일의 쾌도식인 일섬을 깼다하여 분광발도라는 명호가 붙은 것은 물론이고 쾌(快)에 일가견이 있는 이들은 그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중에는 구파일방의 하나인 점창파(點蒼派)도 있었는데 점창파는 무공의 대부분이 쾌(快)와 환(幻)에 중점을 두고 있어 강호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쾌검수(快劍手)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점창파가 변방(邊方)인 운남에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정보력이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녀석을 팽가주가 그냥 보냈다니 이해가 되질 않는군. 조선에서 왔다면 속한 문파도 없으니 딸이라도 줘서 사위삼아 버리고도 남을 텐데.”

“그 딸이 충돌의 원인이니 그럴 수가 없었겠지요.”

“그도 그렇군. 마도나 서장의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그것으로 되었네.”

“하지만 이만한 고수를 그냥 둔다는 것은 좀 불안한 일입니다. 쾌도라는 일부분만이라도 팽가주를 이긴 사람이라면 영입 즉시 큰 전력이 될 것입니다.”

“아직은 이른 일일세.”

혁진풍의 말에 박상중은 의문을 드러냈고 혁진풍은 보고 있던 진태백에 대한 보고서를 툭툭 치며 말했다.

“조직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녀석이라면 애당초 팽가에 쳐들어가지도 않았을 거란 말일세. 중원 무림에 누가 있어 정파의 한축을 받치고 있는 팽가에 그리 무식하게 쳐들어가겠나? 나도 못할 일이네. 거기다 강호의 견식이 부족한 게 분명해.”

혁진풍의 말에 박상중도 고개를 끄덕였다. 삼류무사 정도의 견식만 있어도 천하오절이라던가 구주구왕 등의 강호를 떨쳐 울리는 고수들과 문파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거기다 하북팽가는 개인이 건드리기엔 너무도 큰 세력이었고 혁진풍의 말마따나 천하오절도 혼자서는 어찌해볼 수가 없는 세력이었다.

“그럼 어찌할까요?”

“일단은 행적을 놓치지만 말게. 나머지는 그때 가서 생각해보지.”

“알겠습니다. 밀영대(密營隊)에 전해두지요.”

“섣부르게 자극해서는 안 될 것이네. 그나저나 서장의 동태는 어떠한가?”

혁진풍은 현 무림의 최대 사안(事案)인 서장의 움직임에 대해 물었고 박상중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심상치 않습니다. 서장 최고의 고수인 아극랍(阿克拉)이 직접 움직인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아극랍? 그자는 십년 전에 모용대협에게 패해서 서장으로 물러나지 않았나?”

아극랍, 이 이름을 듣는 이들 중 전율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때는 십년 전 광마혈세의 상처가 거의 아물어가던 무렵이었다. 그들의 침공은 멀리 운남에서 시작되었고 점창파의 최고 고수로 꼽히던 점창섬응(點蒼閃鷹) 백리청(白里淸)이 아극랍에게 패하고 그가 이끄는 서장의 팔괴(八怪)와 십흉(十凶)에 의해 점창파가 궤멸적인 타격을 입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다행히 점창의 진산지보(鎭山至寶)와 절기들은 그대로 남아있었고 몇몇 장로와 일대제자의 대부분이 살아남아 예전의 성세를 찾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으나 점창의 자존심은 크게 상하고 말았다.

그들의 진격은 거칠 것이 없었고 그들을 막고자 나선 이들은 가공할 그들의 무위에 모조리 죽거나 패퇴하고 말았다. 결국 구주구왕과 천하오절들이 직접 나섰고 아극랍 이외에는 모두 패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팔괴와 십흉은 서장최고의 고수들이었기에 구주구왕과 천하오절 중에는 모용대협을 제외하고는 모두 큰 부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모용대협과 아극랍은 최후의 결전지인 무당파의 지척에 있는 비사평(泌娑平)에서 격돌했고 삼일밤낮의 격전 끝에 모용대협의 일검이 아극랍의 가슴을 베어내며 끝이 났다. 그러나 너무도 지친 모용대협은 아극랍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지 못했고 아극랍은 십년 후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떠났다. 그 이후 서장의 무공에 위협을 느낀 무림맹과 사흑련은 수없이 많은 밀정을 보냈으나 아극랍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했다.

“이 정보는 서장에서 의도적으로 흘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십년간 아극랍 그자의 행방을 쫓다가 죽은 밀정들의 수가 세자리 수를 넘어가니 말입니다.”

박상중의 말에 혁진풍도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장의 침공당시 자신은 팔괴 중 셋의 협공을 물리쳤지만 그 대가로 엄중한 내상과 외상을 입었던 것이다. 비록 천하오절에 비해 떨어지는 무위라고는 하지만 그 무공이 크게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형식자체가 상리(常理)를 벗어나고 무척이나 기궤(奇詭)하여 쉬이 물리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단은 정보망을 최대한 가동하고 사흑련에도 협조를 요청하게. 이것은 무림맹 하나의 힘으로 끝낼 성질의 것이 아닐세.”

“알겠습니다.”

혁진풍의 얼굴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십년이 지난지금 다시 한 번 혈겁이 일어날 것을 짐작했기 때문이리라.

[마녀의솥]

잘 읽었습니다.
본문 중에 역학관계라는 용어는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어휘 아닐까요?

[이히힝]

흠.... 모용대협에 이어 야극랍이라... 군림천하가 연상되는건 어쩔 수가 없네요... 제 착각일까요...물론 글 체계나 이런건 다 다르지만요.

[어린愛]

아극랍
중국어론 a ke la
아키라 인가요?^^;

[musado01..]

잘 보고 갑니다.

건 필하세요^^*

[cr******]

잘 보고 갑니다 재밌어요 후후

[pr*****]

건필하십시오^^

[반격]

광마랑 아극랍이랑 둘다 모용대협 부하같은데..

[진짜나메]

감사합니다.

[뿔따귀]

잘보고 있어요..

[김집사]

잘 보고 갑니다^^

[학교]

333

[마녀의솥]

잘 읽었습니다.

[이진진]

먼가 군림천하 느낌이..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