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랑대전(唐狼大戰)-3
당호는 중늙은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영산철각(影散鐵脚), 그대의 말이라면 믿을 만하지.”
영산철각이라는 말에 당호의 주변에는 경악이 흘렀다. 장호법이라는 지칭과 전주, 그리고 영산철각이라는 별호. 이 세 가지와 당호를 거리낌 없이 광생이라고 부르는 저 당당한 태도. 그것이 말하는 것은 단 한가지였다. 바로 광무전의 전주이자 천하오절 중 동왕 순우천. 그가 당문에 나타난 것이다.
“장호법의 말을 믿어주어 고맙소.”
중년인, 아니 동왕 순우천의 말에 당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자네가 아무리 실없는 사람이라고는 해도 이만한 건에 농담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네. 그러니 저 영산철각 같은 사람도 아직 그대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닌가.”
언뜻 들어보면 순우천을 깎아내리는 듯한 말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문과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순우천과 장철패는 화를 내지 않았다.
“하여, 우리 둘을 시랑보와의 싸움에 일조하도록 해주시면 좋겠소.”
장철패의 말이었다. 당문과 시랑보가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버린 지금 원칙대로라면 그들의 참전을 승낙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말대로라면 당문과 시랑보의 싸움은 단순히 강호의 두 방파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서장무림과 중원무림간의 전초전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긴 당호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겠지. 다른 누구도 아닌 천하오절 중의 동왕이 함께한다면 아이들의 사기도 오를 것이고.”
“그럼 승낙하는 게요?”
신나게 싸워볼 생각에 눈이 반짝거리는 순우천을 보며 당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쉰이 넘어서도 저런 순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좋게 생각해야 할지 아니면 철이 덜 들었다 생각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허나 조건이 있네.”
“조건?”
당호의 말에 순우천이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말했다. 자신이 나선다면 쓸데없는 인명피해도 줄이고 당문의 전력도 고스란히 유지될 테니 군소리 없이 승낙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일단 시랑보와의 싸움은 표면적으로는 본가와의 분쟁일세. 그렇기 때문에 다른 누구도 함부로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
“그것은······, 알고 있소.”
“하지만 쳐들어온 놈들이 노골적으로 서장의 무공을 사용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겠나?”
당호의 말에 순우천의 눈이 커졌다. 그의 말인즉 시랑보의 고수들이 서장의 무공을 쓴다면 그것은 서장무림이 두 집단간의 싸움에 무언가 농간을 부리거나 끼어들었다는 말이니 그가 싸움에 뛰어들어도 좋다는 말이었다.
“알아들었나보군. 잊지 말게, 놈들이 서장의 무공을 쓰지 않는 이상 자네가 싸움에 뛰어들어서는 안 될게야. 본가의 일은 본가에서 책임질 터이니 말일세.”
“하하, 광생의 말씀 잘 알아들었소. 걱정 마시오. 내 아무리 싸움을 밥먹는 것보다 좋아해도 그만한 분별은 있으니 말이오.”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는 순우천이었지만 당호는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분별이 있기는 무슨, 그랬으면 장호법이 아직도 네놈을 따라다니며 뒷수발을 들겠느냐?’
순우천을 믿는 마음보다는 아직도 천둥벌거숭이같은 그를 따라다니며 뒷수발을 드는 장호법에 대한 연민이 더욱 큰 당호였다.
이른 아침. 진태백은 상쾌한 아침공기를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밤새 쌓인 탁기가 빠져나가며 조금은 멍했던 정신이 새로이 깨어나는 것을 느낀 그는 천천히 주먹을 앞으로 뻗었다 거두었다.
‘거의 회복이 되었군. 이제 감숙성으로 갈 때가 됐다.’
포숙의 유해를 당양에 안치한 것이 벌써 사순(四旬)이 넘어가고 있었다. 중원이 넓다고는 하지만 당양에서 감숙성 농서까지는 한 달이면 될 거리였지만 이런 저런 일들이 겹치면서 늦어지고 만 것이다. 비록 포숙처럼 마음의 유대를 가지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그의 유해를 그의 고향에 안치하기로 정했고 그 약속은 자신이 지켜야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진태백은 다시 길을 떠나려하는 것이다.
부스럭.
진태백의 뒤에서 풀밟는 소리가 들려왔고 진태백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벽의(碧衣)를 곱게 차려입은 미인이 서있었고 진태백은 입을 열었다.
“당소저셨군요. 이른 시간인데 어떻게.”
그녀는 당문의 금지옥엽인 당산옥(唐珊玉)이었다. 며칠 전 진태백이 자리보전을 하고 있을 때 찾아와 안면을 튼 사이였으나 문제는 그곳에 황보용도 있었다는 것이다. 두 여인간의 미묘한 신경전이 있었지만 진태백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었고 그런 진태백의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당산옥은 이틀에 한번씩은 그를 찾아와 담소를 나누곤 했었다. 한데 오늘은 이른 새벽에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진소협께서 아침마다 이곳에 나오신다는 말을 듣고 와본 것입니다. 아직 몸이 성치 않으신데 무리를 하시는 것은 아닌지······.”
“하하, 이거 본의 아니게 당소저께 심려를 끼친 모양이군요. 너무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약골은 아니니까요.”
진태백이 웃으며 말하자 당산옥은 옷소매로 입을 가리며 살풋 웃었다. 그녀의 행동거지는 하나하나마다 매우 기품이 있어 매력적으로 보였고 진태백 또한 남자이다 보니 그런 매력적인 여자를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피싯!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날아들었고 진태백은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아챘다.
“무슨······?”
당산옥이 무슨일이 있었는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검은 그림자 여럿이 진태백과 당산옥을 향해 날아들었고 진태백은 소나기의 수법으로 그 그림자들을 걷어찼다.
파바바바방!
북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들은 진태백과 멀찍이 떨어져서 땅바닥에 착지했고 진태백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소저, 빨리 안으로 가서 습격을 알리시오!”
“네? 네!”
한순간 진태백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당산옥은 그대로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검은 그림자는 검은 야행복에 눈만 내놓은 자들이었고 그들 중 몇몇이 그녀의 뒤를 쫓으려 했지만 진태백이 시의적절하게 그들의 앞을 가로막아 당산옥을 놓치고 말았다.
“당신들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런 시간에 담장을 넘어온 것을 보니 좋은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알겠소. 지금이라도 물러난다면 뒤를 쫓지는 않으리다.”
진태백의 말에 흑의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각자의 병장기를 빼들고 진태백을 향해 달려들었다.
진태백과 당산옥이 습격을 받은 것과 때를 같이하여 당문에 대한 시랑보의 공격은 시작되었다. 정문을 비롯한 당문으로 통하는 출입문은 모두 당문의 정예가 버티고 있었고 사주경계를 서던 이들은 모두 부상을 입었지만 적의 공격을 알리는데 성공했다. 기습이라는 것은 원래가 적이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예측하지 못한 시간에 시도해야만 효과가 있는 것인데 당호는 이미 그들의 기습을 예측함으로써 기습의 묘용을 살려보기도 전에 시랑보의 공격이 막혀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당호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후원으로부터의 공격이었다. 당문의 후원은 넓게 펼쳐진 정원이 있어 몸을 숨기기에는 여의치 않았고 또 담장 밖에는 넓은 연못을 파두었기 때문에 잠입을 한다 던지 하는 데는 좋은 곳이 아니었다. 한데 시랑보에서는 후원으로 기습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새벽마다 후원을 산책하던 진태백에 의해 차단되어 버렸고 급히 달려온 당산옥이 숨을 헐떡거리며 후원의 기습을 알리자 당호는 급히 몇몇 고수들을 불러 진태백을 지원하게 했다.
“허허, 이거 또 본의 아니게 빚을 지고 말았구먼.”
쯔컥!
인체에서 가장 약한 뼈 중 하나인 턱뼈가 부서지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흑의인 하나가 멀찌감치 나가떨어졌다. 진태백의 몸에서는 살벌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흑의인들은 이미 그의 살기에 압도되어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고 있었다. 이미 멀리서 들려온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에 진태백은 당문에서 싸움이 벌어졌다는 것을 눈치 챘고 또 그들이 시랑보의 고수들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황보세가 사람들이 걱정이었고 되도록 빨리 싸움을 정리하기 위해 맘먹고 살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진태백의 몸에서 드러난 살기는 마치 그 동안 억눌렸던 한을 풀 듯 그의 몸에서 흘러나와 넘실대는 파도처럼 흑의인들을 압박했고 그 압박에 못 이긴 흑의인 하나가 악에 받친, 비명과도 같은 기합을 내지르며 진태백을 향해 달려들었다.
“끼야아아!”
날카로운 칼이 날아들자 진태백은 옆으로 비켜서며 검배(劍背)를 주먹으로 후려친 다음 무릎으로 흑의인의 복부를 내질렀다.
콰직!
척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소름끼쳤다. 벼락오름의 일격으로 흑의인은 절명했고 으스러진 척추뼈 때문에 기묘하게 구부러져 쓰러져있는 그 모습에 다른 흑의인들은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애써 모르는 척하며 무기를 움켜쥐었다.
“안 덤빌 거요?”
진태백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수가 많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까지 기선을 제압당하면 방법이 없다. 진태백의 살기도 살기지만 한방 한방에 사람을 걸레짝처럼 만들어 버리는 그의 주먹과 발에 얻어맞는 것이 더욱 두려웠다. 그때 진태백의 뒤에서 암기들이 날아오기 시작했고 흑의인들은 더 이상 버티는 것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소협! 무사한가?”
삼극당에 속해있는 당철기(唐鐵驥)가 진태백을 향해 물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철기에게 물었다.
“시랑보입니까?”
“그렇다네. 감히 본가를 공격하다니. 본때를 보여주마.”
당문의 역사상 본가가 직접 공격을 당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한데 고작 사파의 무리인 시랑보 따위가 당문을 공격해 왔으니 스스로에 대한 애착이 강한 당문사람들의 분이 오죽하겠는가. 일각도 채 되지 않아 후원을 공격해온 흑의인들은 독과 암기에 고슴도치 형상이 되어 고통 속에 죽어갔고 진태백은 어느 정도 주변이 정리되자 당철기에게 물었다.
“황보세가 사람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은 지금 본가의 서문에 있네. 그곳으로 가려는가?”
진태백은 고개를 끄덕였고 당철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네가 가지 않아도 위험은 없을 걸세. 더군다나 자네는 본가의 귀한 손님이고 아직 몸도 성치 않은데 이런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 낄 필요가 있겠는가?”
그의 말에 진태백이 입을 열었다.
“위험하지 않다 하더라도 벗이 싸움터에 있는데 어찌 일신의 안위만을 생각하겠습니까. 그리고 몸은 거의 회복되었으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허허, 황보세가의 소가주가 부럽구만 그래. 이렇게 뜨거운 우정을 가진 벗이 있으니 말이야. 알겠네. 사람을 붙여주지.”
“감사합니다.”
“아닐세. 자네가 아니었다면 이놈들의 급습을 받아 본가의 피해가 커졌을 게야. 오히려 내가 고맙네. 어서 가보게나.”
“네, 그럼 이만.”
당철기가 붙여준 사람을 따라 진태백은 당문의 서문으로 향했고 그 뒷모습을 보며 당철기는 혼자 중얼거렸다.
“거참, 탐나는 친구로군.”
- 작가의말
본격적인 액션씬은 다음 편부터.....
재밌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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