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수련(空洞修練)-4
진태백은 마치 목상처럼 눈을 감고 앉아만 있었다. 수련에 임한지 이레째. 하루에 한 그릇의 죽과 물만 먹는 탓인지 얼굴은 부쩍 수척해져 있었고 제멋대로 자란 수염은 거칠게만 보였다. 그뿐인가 머리와 의복에는 먼지가 내려앉아 모르는 사람이 보면 광인(狂人)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한없이 깊게 내면으로 침잠한 진태백은 미동도 없이 앉아만 있었다.
“환장하겠네. 이러다 저놈 죽는 거 아녀?”
박대용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진태백이 좌선(坐禪)하고 있는 동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좌선에 임한 것은 벌써 이레째. 더군다나 사흘째에는 막강한 살기가 흘러나와 공동파 문인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순식간에 몰려든 장로들과 제자들을 대천진인이 나서서 물리치기는 했지만 모르는 상황에서야 대단한 살성(煞星)이 숨어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할만한 상황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이었다. 다행히 일이 커지기 전에 대천진인과 명신진인이 나서서 사람들을 진정시켰고 당연히 두 사람은 장문인인 동수진인에게 불려가야 했다.
딱!
멍하니 동굴을 바라보고 있던 박대용의 머리에서 경쾌한 소리가 나며 그는 머리를 싸쥐고는 몸을 웅크렸다. 대천진인이 작대기로 그의 정수리를 두들긴 것이다.
“이놈아! 할 일은 하고 걱정을 하던 시중을 들던 해라!”
“어구구! 머리 나빠지니까 머리는 때리지 마시라니까요!”
딱!
다시 한 번 대천진인의 작대기가 그의 정수리를 때렸고 통증에 머리를 감싸 쥔 박대용을 보며 대천진인이 말했다.
“나빠질 머리나 있는 놈이 그러면 이해라도 하겠다, 이놈아. 네 친구 놈이 그리도 멍청하더냐?”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견디지 못할 일을 하는 놈이냔 말이다.”
“그건 아니지만······.”
“네놈이 걱정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안되지도 않고 안 될 일이 되지도 않는다. 걱정을 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네 할 일을 못함으로 인해 친구가 부담스러워 할 것을 생각하란 말이다.”
대천진인의 말에 박대용은 얼얼한 정수리를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마(心魔)의 극복은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 꾸준한 수련과 공부가 극복의 단초(端初)는 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깨달음이다. 때문에 수많은 무인과 문인들이 어느 순간 닥치는 심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정체되고 퇴락하는 것이다.
“알아들었으면 어서 연단이나 시작하거라. 오직 일심(一心)만이 진짜 연단에 다다르는 길이니라.”
개봉의 한 장원. 그 후원에서는 지금 수려한 용모의 중년인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저 수평(水平), 수직(垂直), 사선(斜線) 이 세 가지만으로 휘둘러지는 칼의 궤적은 단순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칼이 휘둘러질 때마다 막강한 경기(勁氣)와 함께 묵직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중년인이 펼치고 있는 도법의 이름은 수라사절도(修羅死截刀)라는 것으로 도(刀)나 검(劍)을 휘두름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동작만으로 이루어진 도법이었다. 그러나 그 기초적인 동작 안에 극쾌(極快)와 태중(泰重)이 실려 있기 때문에 무공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심후한 공력이 없이는 시전 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도법이었다.
우우웅!
그때 갑자기 칼에서 울리는 소리가 더욱 무거워지며 중년인의 손이 움직였다. 한 순간에 수평과 수직, 사선의 움직임을 구현해낸 그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분광발도가 공동파에 있다?”
중년인의 뒤에는 가루라왕의 제자가 부복해 있었다. 아마도 진태백의 행방을 알리는 것이 목적인 듯 그는 고개를 더욱 깊이 숙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농서에서 북두검의 유해를 그의 가족들에게 전달한 이후 명옥궁의 옥대랑을 살해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 공동파에 나타난 것을 보면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닐지······.”
그의 말에 중년인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스승인 가루라왕과 동수(同手)를 이룬 진태백을 직접 처치할 수 없으니 자신을 이용해 진태백을 죽이려는 차도살인(借刀殺人)의 술수를 부리려 하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형작(炯雀), 상대가 자신의 속내를 짐작하고 있을 때 술수를 부리려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중년인의 말에 가루라왕의 제자, 형작은 당황한 듯 떠듬떠듬 말했다.
“그, 그것이 아니오라······.”
“뭐, 아무래도 좋다. 그 녀석이 남북쌍두와의 약조를 지킬 때까지 손을 대지 않겠다고 했었으니 이제 슬슬 건드려도 좋겠지. 한 가지만 묻자.”
중년인의 말에 형작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푸른 번개와 같은 눈으로 형작을 바라보며 물었다.
“분광발도를 죽이려하는 진짜 이유를 말해라.”
형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호결원이라는 단체에 소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팔부왕들이 호결원에서 활동하는 이유는 각기 달랐다. 어떤 사람은 희귀한 물건을 얻기 위해서, 또 어떤 사람은 권력을, 눈앞의 중년인은 오직 강자와의 싸움을 원했기 때문에 호결원에 속해있는 것이다. 때문에 서로의 목적에 따라 경쟁자가 되기도 하고 협력자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서로를 죽이려는 살수(殺手)가 되기도 한다. 믿을 것은 오직 자신뿐. 그 누구도 쉽사리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스승님께서 회복하시려면······, 그의 죽음이 필요합니다.”
한참을 망설이던 형작은 결국 목적을 털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팔부왕 중 최고수로 알려진 사람은 천왕과 용왕, 그리고 눈앞에 있는 중년인, 아수라왕이었다. 그 중 천왕과 용왕은 전언(傳言)만 보내올 뿐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행적을 알 수가 없었고 다른 팔부왕들은 가루라왕과 비교했을 때 그 무위(武威)가 특별히 더 낫다고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그가 매달려 볼 수 있는 가장 뛰어난 고수는 아수라왕뿐이었고 때문에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부를 두고 먼 길을 달려 중년인, 즉 아수라왕을 찾아온 것이었다.
“호오? 한 달 정도 정양하면 나을 수 있는 부상이라 들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구나?”
아수라왕은 흥미가 동한 듯 형작에게 물었고 형작은 원독(怨毒)이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사부님의 상처에 맺힌 살기 때문에 상처가 낫지 않는다 합니다.”
“살기 때문이라? 도대체 얼마나 강한 살기이기에 산사람의 몸에 난 상처가 낫지 않는단 말이냐?”
“사천에서 그를 보았을 때 일류라 불릴만한 고수들도 그의 살기를 견디지 못하고 기절할 정도였습니다. 반경 이십장에 이르는 거리에 떨어져 있던 고수들이 기절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십장?”
아수라왕은 깜짝 놀라 물었다. 아무리 단련한 무형경기(無形勁氣)라도 삼장을 넘어가면 상대에 대한 구속력이 상실된다. 한데 단련된 기운도 아닌 살기만으로 반경 이십장에 이르는 거리에 있는 그것도 일류고수들을 기절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스스로도 일류고수라 할 만한 이들을 기세만으로 기절시킬 수는 있지만 이십장이나 떨어져 있는 자들을 기절시킬 수는 없었다.
“와하하하하하! 그야말로 물건이구나! 그만하면 직접 손을 써볼만 하지!”
아수라왕은 광소(狂笑)를 터뜨렸다. 실로 오랜만에 직접 손을 대볼만한 상대가 나타났다는 희열에 그는 몸을 떨었다. 천왕과 용왕을 찾아가 손을 섞어보려 해도 귀중한 전력이 상해서는 안 된다는 상좌와 원주의 만류로 손을 털어야 했던 것이 몇 번인가. 강자와의 대결에 굶주린 그에게 있어 진태백의 출현은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였다. 세불양립의 적이자 자신이 겨뤄볼만한 고수라는 조건을 충족하는 자들은 많지 않았다. 천하오절과 겨뤄보려 해도 모두가 크고 작은 집단의 우두머리였고 아수라왕의 공식적인 신분은 그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위치였다.
“허면 청을 들어주시는 것입니까?”
아수라왕의 광소가 멎자 형작이 물었고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른 팔부왕들에게 전해라. 본좌가 직접 손을 쓰기로 마음먹었으니 절대로 건드리니 말라고. 그를 건드리는 순간 본좌는 상좌나 원주가 나서더라도 그들을 쓸어버릴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진태백을 양보하지 않겠다는 듯 말하는 그의 몸에서는 그야말로 막강한 패기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형작은 고개를 숙인 채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수라왕은 그저 싸움에 굶주린 광견(狂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유재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며칠 전 느낀 막강한 살기의 주인공인 진태백과 한번 겨뤄보고는 싶은데 명분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폐관에 가까운 수련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이를 다짜고짜 찾아가 ‘당신의 실력이 궁금하니 한번 겨뤄봅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에게도 자신의 사제인 박대용에게도 못할 짓을 저지르는 것이었다.
“여기는······.”
무언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다고 느낀 그가 고개를 들자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광성원의 대문이었다.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느낌에 그는 뒷걸음질 쳤지만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는 광성원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금단, 있느냐?”
“어라? 대사형이 웬일이십니까?”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솥에 불을 지피던 박대용이 그에게 말했지만 유재는 할 말이 궁했다. 어떻게 ‘네 친구 실력이 궁금해서 한판 붙어보려는데 어디에 있냐’라고 말하겠는가. 사실 유재도 며칠 전 있었던 엄청난 살기의 분출에 놀란 사람 중 한명이었다. 처음 살기를 느낀 순간은 그 어마어마한 살기에 두려움을 느꼈다. 산 것을 죽이고자 하는 막강한 기운 앞에서 생물이라면 겁을 먹는 것이 당연하다. 그것이 바로 스스로를 지키는 첫걸음, 바로 무(武)의 시작이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무에 숙달되어 갈수록 약자는 강자가 되고 그 힘을 사용하고 싶어지게 된다. 힘을 이용해 이전의 자신이었던 약자를 지키고 부당한 일을 막는 사람은 협객(俠客)이라 불리며 존경을 받지만 스스로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용하는 자들은 마두로 불리며 경멸(輕蔑)받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두려움에 계속 이끌려가지는 않는다. 아주 작은 계기로도 용기를 되찾고 두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다. 유재의 나이는 이제야 스물여섯, 무인으로서는 매우 젊은 나이이며 사회에서도 많은 나이는 아니다. 그런 만큼 가슴속에서 들끓는 호승심과 진태백의 살기에 느꼈던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에 광성원으로 온 것이다.
“진소협은 아직도 수련중이냐?”
유재의 물음에 박대용은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스런 눈으로 진태백이 있는 동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정과 정오에 한 번씩 살기가 흘러나오는데 그 기세가 며칠 전보다는 훨씬 약해졌습니다. 며칠만 더 있으면 아마도 수련을 끝내고 나오겠지요.”
유재의 물음에 박대용은 의문을 느꼈다. 유재는 비록 대사형이기는 하지만 같은 사부를 모시고 있지도 않고 그저 데면데면하게 안면만 있던 사이였다. 더군다나 자신은 사부의 연단을 돕느라 공동파 내에서도 그리 발이 넓지 못했기 때문에 요 며칠간 자주 찾아오는 대사형의 속이 무엇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진소협이 수련을 마치고 나오거든 한번 만나자고 전해다오. 내가 논검(論劍)을 청한다하면 알 것이다.”
유재의 말에 박대용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잠시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눈 뒤 유재는 광성원을 나섰고 박대용은 잠시 후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허, 저양반이 저런 면이 있었네. 생전 안하던 비무를 태백이하고 하고 싶어 하니.”
- 작가의말
글은 느긋하게 써야 제맛!
빠른 연재가 독자분들 입장에서는 좋다는 걸 알지만 역시 제게는 마이페이스가 제일이네요.
빨리쓸수록 글의 질이 떨어지니 말이죠.
재밌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ps. 추천과 댓글은 필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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