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출도(法王出道)-3
사실 진태백은 황보진의 상세를 살펴본 뒤 바로 감숙성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한데 벌써 나흘이 지나도록 출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뭔고 하니…….
“허어, 조선에선 이런 방식으로 약재를 쓰기도 하는군.”
바로 이음당의 당주인 당세평이 진태백을 붙잡아두고 있는 범인이었다. 워낙에 약과 독에 대한 열정이 강하다보니 평생을 자식도 두지 않고 오직 약과 독에만 미쳐서 살아가는 기인이었다. 하지만 당문에서 그의 배분은 당호보다도 높아 신분만 당주일 뿐이지 실제로 그가 당문에서 가지는 지위는 어지간한 장로 이상이었다. 진태백에게 강호상의 배분은 크게 상관없었지만 딱히 갈 길이 바쁘지도 않은데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자신을 붙잡는데 매정하게 뿌리칠 수 없어 아직 당문에 머물며 당세평과 약론(藥論)을 나누며 황보진에게 틈틈이 침을 놓아주고 있었다. 진태백에겐 아주 쓸데없는 일은 아닌 것이 강호에 존재하는 위험한 독물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고 조선과는 다른 약재다루는 법을 익힐 수가 있었던 것이다.
“괜찮겠습니까?”
“음? 뭐가 말인가?”
“솔직히 말해서 어르신께서 가진 약과 독에 대한 소양은 저보다 훨씬 윗줄에 있으십니다. 저야 얻는 것이 적지 않지만 어르신께서 어떠신지 해서 말입니다. 괜히 폐만 끼치는 것은 아닌지…….”
“얻는 것이 왜 없는가? 솔직히 말해서 내가 읽어보지 않은 의서가 없고 써보지 않은 약이 없지. 형편이 이리되다보니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은 생전 시도해보지 않은 새로운 방법이 필요한데 내 이 둔한 머리로 해볼 만한 것은 다해봤단 말일세.”
당세평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태백에게 말했고 진태백 또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이 뭐가 있겠나? 완전히 새로운 방법을 알고자 한다면 자네와 같이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쓰는 비방(秘方)밖에 더 있겠나.”
그의 말에 진태백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방 밖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당주님, 가주께 가실 시간입니다.”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오늘 고마웠네. 가서 쉬도록 하게나.”
당세평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진태백도 더 이상 그의 방에 앉아있을 이유는 없었고 마침 황보진에게 침을 놓아줄 시간도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 당세평에게 인사를 한 후 황보진의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포한추독에 당했다고 했던가.’
진태백은 걸으며 당문평이 당했다는 포한추독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보통의 방법으로 진통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경이 상하며 생기는 신경통임이 분명했고 당세평이 알려준 바로는 포한추독에 당한 부위는 완전히 못쓰게 되지만 감각은 남는다고 했다.
‘신경이 완전히 녹아버리거나 죽는다면 감각조차도 없어야 한다. 혹시 어떤 연유로 인해 그 부위에 마비가 남는 것은 아닐까.’
포한추독의 무서운 점이 신경을 녹여버리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누군가 독이 스며든 부위를 해부해본 것도 아닌데다 신경이 녹아서 없어지는 것이라면 아예 그 부분의 모든 감각이 없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한데 움직이지만 못하고 촉각은 남는다하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호기심이 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면식도 없는 그것도 당문의 가주를 진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자신보다 훨씬 의술에 조예가 깊은 당세평이 그것을 생각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중에 이야기를 해보아야겠군.’
야심한 밤. 서영영은 그들이 묵고 있는 객잔의 방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야행을 하자면 몸이 식을 텐데 들어오시지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창문이 열리며 백의를 입은 미녀가 두 사람과 함께 그녀의 방으로 들어섰다. 뒤에 있는 두 사람도 각각 벽의(碧衣)와 홍의를 입고 있었는데 백의를 입은 여인에 못지않은 미녀들이었다.
“명옥육가인 중의 세분이나 저를 찾아오시다니 별일이군요. 앉으시지요.”
서영영은 그들에게 자리를 권하며 세 개의 찻잔에 차를 따라 그들에게 건넸다. 그들은 서영영의 맞은편에 앉으며 그녀가 건넨 차를 한 모금씩 마셨고 백의미녀가 입을 열었다.
“성녀의 행로를 알 수 있을까요?”
“어째서 그런 것을 묻는지 모르겠군요. 귀궁과 본교는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 아닌가요? 제가 어디로가든 성소저가 관여할 문제는 아닌 것 같군요.”
백의미녀는 바로 명옥육가인 중의 맏이인 성휘연이었다. 그녀를 따라온 벽의미녀는 막내인 장세지였고 홍의미녀는 혈옥(血玉) 주교교(周皎皎)였다.
“역시 그 분광발도 진소협을 만나러가는 건가요?”
“그렇다면 어쩔 생각이지요?”
성휘연은 서영영의 태연한 말에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방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를 만나고자하는 목적은 알고 싶군요.”
서영영은 그런 성휘연의 태도에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이미 짐작하고 있지 않나요? 그가 오륜교에 입교할지 적이 되어 싸우게 될지는 알 수는 없지만 말이에요. 나도 이야기는 들었답니다. 귀교에서 그를 이용하려 들었다가 성소저와 장소저가 혼이 났었다는 건 말이에요.”
“이익!”
서영영의 말에 발끈한 장세지가 발작하려 들었지만 옆에 앉아있던 주교교가 그녀의 무릎을 움켜쥐는 바람에 일어서지도 못하고 씩씩거리고만 있었다.
“본교에서도 그를 시험하려 들었다가 중요한 사람들을 잃었어요. 그들은 장소저처럼 화도 낼 수 없게 되었지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슬픔이 담겨있었다. 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가족과도 같았던 이들을 잃었다면 슬퍼함이 당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를 위해 교주와 금륜법왕까지 설득하여 진태백을 설득하기 위해 길을 떠난 그녀의 행동은 대단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말을 하지만 도대체 몇이나 되는 사람이 그럴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진소협의 행동에 따라 오륜교에서도 그에 대한 대응이 달라진다는 말인가요?”
“그래요. 명옥궁은 어떻죠?”
“본궁에서도 그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어요. 하지만 그와는 처음부터 어긋나버렸으니 어찌해야할지 모르겠군요.”
“명옥궁주라해도 노납의 일이 끝나기 전에는 그를 건드릴 수는 없을 것이오.”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성휘연을 비롯한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들이 지닌 무공으로도 금륜법왕이 언제부터 그녀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애초부터 금륜법왕은 그녀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수였다.
“법왕을 뵙습니다. 명옥궁의 성휘연이라 합니다.”
“성소저의 염명(艶名)은 노납도 들은바 있소. 이번 기회에 명옥궁에 전언을 보내리다. 귀궁이 그 진태백이라는 자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건 노납과의 은원이 해결되지 않은 이상 귀궁이든 어디든 설령 모용대협이라 해도 그에게 야료(惹鬧)를 부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소.”
금륜법왕의 말은 단호했다. 또한 그가 일신에 지닌 무위는 천하오절에 못지않다는 오륜교의 교주와 동수(同手)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말한 일이라면 아무리 명옥궁이라 해도 무시할 만한 성격의 것이 아니었고 성휘연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법왕의 말씀을 본궁에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본궁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거기까지는 노납도 성소저에게 뭐라할 생각은 없소. 그 뒤는 귀궁의 궁주가 결정할 것이고 각자 속한 곳의 방침에 따라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멀리나가지 않겠소.”
성휘연은 서영영에게 눈인사를 보낸 후 동생들과 함께 들어왔던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서영영은 금륜법왕을 향해 말했다.
“그녀들이 과연 가만히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이오, 본교의 힘이 강성할수록 자신들도 힘들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말이오. 허나 서장무림과의 싸움을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 눈에 띌 정도의 행사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오. 뭣보다 그들은 호결원에도 힘을 써야 하니 노납이 직접 움직이고 있는 본교보다 따져보아야 할 것이 많소.”
“명옥궁이 움직이기 전에 진소협과의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군요.”
“그래야 할 것이오. 그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일 때쯤이면 서장무림과의 싸움이나 호결원과의 관계가 마무리 되었을 때일 것이니.”
성휘연을 비롯한 명옥육가인은 서영영과 금륜법왕이 머물던 객잔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달렸다. 금륜법왕의 전언을 명옥궁에 전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그녀들이 떠나기 직전 금륜법왕이 방출한 기세에 질린 탓이었다.
“휴우…….”
한참을 달리던 성휘연이 멈춰섰고 주교교와 장세지 또한 그녀를 따라 멈춰섰다. 성휘연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있었고 손끝이 미미하게 떨리는 것을 보아 격동이 심한 듯 보였다.
“언니 괜찮아요?”
그녀의 안색을 살핀 장세지가 성휘연에게 말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괜찮단다. 금륜법왕이 마교교주와 동수를 이루는 고수라더니 대단하구나.”
“그 땡중이 뭔가를 했나요? 이이…….”
장세지가 분한 목소리로 이를 갈자 조용히 서있던 주교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녀를 질책했다.
“까불지 마라. 마교에 몸을 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는 궁주님과 비견할만한 고수다. 아마도 언니에게 기세를 방출한 것이겠지. 아마 그가 기세를 방출했어도 우리는 느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주교교의 날선 말에 장세지가 불퉁한 표정을 지었지만 말로는 불만을 말하지는 않았다. 천방지축인 그녀가 명옥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 바로 혈옥 주교교였고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장세지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매의 말이 맞다. 마교교주가 안심하고 외유를 할 수 있는 이유가 금륜법왕 덕분이라더니 그 말이 틀리지 않구나. 일단은 궁에 금륜법왕의 말을 전하도록 하자.”
“그래요 언니.”
성휘연의 안색은 어느새 돌아와 있었고 떨림도 멈춰있었다. 금륜법왕에게 그녀들은 딸이나 마찬가지인 연배이니 심하게 손을 쓰지 않은 탓도 있었고 성휘연 또한 여태껏 쌓은 공부가 그리 일천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금륜법왕의 기세로 인한 충격에서 금방 벗어날 수가 있었다.
“분광발도가 시랑보와 싸울 가능성도 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황보세가의 소가주가 요양하고 있는 사천당문에 시랑보의 공격이 곧 있을 것이라는 첩보입니다.”
어두운 암자 안의 조그만 공간, 그곳에서 노승과 흑의인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노승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말했다.
“사천당문에 머무르고 있다면 아무래도 가루라왕(伽樓羅王)과 부딪칠 것이라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백뢰무쌍을 쓰러뜨린 분광발도의 무위라면 그 누구도 쉽게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구주구왕에 꼽히지는 못했으나…….”
흑의인의 말에 노승은 웃으며 말했다.
“구주구왕에 버금가는 자라는 말이 아니냐.”
노승의 말에 흑의인은 고개를 숙였고 노승은 말을 이었다.
“최고와 이인자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느냐?”
“…….”
흑의인은 묵묵부답이었고 노승은 염주알을 굴리며 말했다.
“아무리 버금간다는 평을 듣더라도 최고가 아닌 것은 최고가 될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리 작은 차이라고 하더라도 최고와의 차이는 어마어마한 법이고 고유는 최고가 되지 못한 패배자일 뿐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가루라왕에게 전갈을 넣도록 해라. 분광발도가 사천당문에 있다는 정도면 될 것이다.”
흑의인은 깊게 고개를 숙여 보인 다음 사라졌다. 노승이 내린 명령은 가루라왕에게 전해질 것이고 노승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 작가의말
이직 등등이 걸려서 올리는데 한참 걸렸네요.
재밌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편은 좀 더 빨리 올릴 수 있다면 좋겠네요.
ps. 댓글과 추천은 필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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