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살자재(活殺自在)-4
진태백은 약속된 비무를 마치고 나서는 그야말로 한량이 되었다. 동수진인을 비롯한 장로들은 진태백과 유재의 비무를 위해 준비 중이었고 박대용은 박대용대로 연단이며 여러 할 일이 많아 식사 때나 얼굴을 마주할 뿐이어서 진태백이 하는 일이라고는 명상에 잠기거나 공동산의 여러 봉우리에 올라 경치를 감상하는 정도였다.
그렇게 칠주야가 지난 저녁. 식사를 하러 모인 자리에서 광천진인이 입을 열었다.
“내일 미시말(未時末)에 비무를 할 수 있겠는가?”
“에엑? 지난번 비무로 끝난 거 아니었어요?”
광천진인의 말에 박대용이 반문했다. 진태백이 유재와 비무를 하기로 한 것은 공동파 내에서도 장로를 비롯한 수뇌부뿐이었는데, 그 이유는 만에 하나라도 대제자인 유재가 패하는 모습을 다른 제자들에게 보여서 득 될 것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명색이 대문파의 대제자라고 하면 다음 대를 이끌어갈 장문후보인 동시에 다른 제자들의 정신적 지주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더군다나 젊은 제자들은 혈기만 왕성하여 그저 강한 것이 일인자의 미덕인줄로만 알기 때문에 대제자인 유재가 패하는 모습을 보면 제자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위험이 있었다.
“너는 가만히 있거라.”
광천진인의 엄한 말에 박대용은 입을 삐쭉 내밀고는 궁시렁 거렸지만 당사자가 아닌 탓에 궁시렁 거리는 것으로 그쳐야 했다. 진태백은 그런 박대용을 보고 살짝 웃으며 말했다.
“문제없습니다.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장소는 마천원(摩天園)일세. 위치는 금단이 알고 있네.”
그 말에 박대용을 바라보자 그는 입을 딱 벌리고서는 말했다
“마천원이면 금지(禁地)나 마찬가지잖아요! 내 친구 죽일 일 있습니까!”
그의 격렬한 반응에 진태백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고 광천진인이 호통을 쳤다.
“인석아! 누가 네 친구를 해하려한다는 게냐! 넌 네 사부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더냐!”
“그럴 사람으로 안 봤으니까 더 큰일이죠!”
박대용의 말에 광천진인은 머리가 아픈 듯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쥐었다. 의(義)에 어긋난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절대로 손을 뻗지 않는 저 심성이 든든하기도 했지만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더군다나 성격이 급해 자신의 말을 들으려하지도 않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기다려봐라, 대용.”
“뭘 기다리냐! 제자의 친구를······.”
“아, 이놈아 그런 게 아니라니까!”
광천진인이 버럭 성을 내자 광성원 전체가 쩌렁 울리며 요동을 쳤다. 제자라는 놈이 사부를 어찌 보기에 제 친구를 팔아먹는다 생각할까 하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핑 돈다. 하기사 제 놈한테는 말도 없이 칼이 날아다니는 비무에 제 친구를 밀어 넣었으니 자업자득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보다는 아들처럼 키운 제자한테 그렇게 믿음을 주지 못한 스승인가라는 생각이 들어 제자 놈한테 원망스런 마음이 먼저 고개를 들고 비어져 나온다. 박대용은 한 번도 본적 없는 사부의 눈물에 당황했는지 말까지 더듬으며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사, 사부님. 우는 거 아니죠? 그쵸?”
“아이고, 아이고, 하나 밖에 없는 제자 놈이 제 사부도 못 믿고. 내 살아서 뭐하누!”
광천진인이 숫제 대성통곡을 하려하자 박대용은 그저 바닥에 넙죽 엎드려 빌었다.
“아이고! 사부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사부님 말씀은 들어보려고 하지도 않고 성만 냈으니 제가 죽일 놈입니다.”
둘의 모습을 바라보는 진태백의 얼굴에는 실소가 떠올라 있었다. 암만 봐도 사제지간이라기 보단 장난기 넘치는 아들을 둔 부자간 같은 모습이었다. 한참을 박대용이 어르고 달래며 싹싹 빈 후에야 광천진인은 평정을 되찾았고 박대용은 얌전해진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광천진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저놈이 저리 발광한 이유는 마천원이 본파 장문인의 거처 뒤에 있는 정원이기 때문일세.”
“그렇군요.”
진태백은 광천진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본디 장문인의 거처는 각파의 가장 깊숙한 심처(深處)에 두기 마련이다. 장문인은 문파를 대표하는 대표자임과 동시에 문파의 상징이다. 때문에 적의 습격이나 여타 위험에서 지켜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장문인의 거처는 일종의 금지나 마찬가지였고 그런 곳으로 그를 데려가라는 말을 들은 박대용의 입장에서는 몰래 진태백에게 해를 끼치려는 수작으로 보일수도 있었다.
“내 천천히 설명을 하려 하는데 저놈이 저리 발광을 하니 원······.”
“미안하다 대용. 너한테는 미리 말을 해두었어야 하는 건데.”
“말 나온 김에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해봐라. 며칠 전에는 일대제자들이랑 비무를 하더니 이번엔 또 뭔 일이냐?”
“네 대사형과 비무를 해달라는 장문인의 요청이 있었다.”
진태백의 말에 박대용은 마치 붕어마냥 입만 뻐끔거렸고 진태백은 그런 박대용을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말했다.
“갑자기 붕어가 된 게냐? 왜 입만 뻐끔거리고 있느냐?”
“대, 대사형이랑 비무를 한다고?”
박대용의 말에 진태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에 담긴 차를 마셨고 박대용은 사나운 눈으로 광천진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부님, 오늘은 꼭 설명을 들어야겠습니다.”
여지껏 본적 없는 사나운 눈으로 자신을 보는 박대용에게 찔끔했는지 광천진인은 이미 다 식어버린 찻잔만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뭘 말이냐?”
“며칠 전에 태백이를 데리고 가서 비무를 한 것까지는 뭐, 태백이의 무공은 궁금한데 장문인이나 장로님들 체면에 젊은 사람 붙잡고 드잡이질 할 수 없으니 그렇다 쳐요. 그런데 왜 또 대사형이랑 태백이가 비무를 해야 하는 겁니까?”
박대용의 말에 광천진인은 대답할 말이 옹색했다. 그렇다고 있는 대로 말해주자니 그것은 또 장문인과 자신들의 체통문제였다. 그러나 그때 진태백에게서 구원의 손길이 뻗어왔다.
“그만해 둬라, 대용. 내가 먼저 청한 것이다.”
“뭐? 네가 왜?”
“내가 여기서 면벽수련 중에 대사형이 와서 비무를 한번 청하더라고 말했었잖느냐. 며칠 전에 다른 사람들과 비무를 했더니 문득 그게 떠올라서 장문인께 내가 말씀드렸다. 다행히 역정내지 않으시고 들어주셨는데 대사형 체면에 남들 앞에서 비무를 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좋은 날과 시를 정해서 알려주겠다 하셨다. 그래서 진인께서 오늘 말씀해 주신 거다.”
“정말이냐?”
“내가 너한테 거짓을 말하겠느냐?”
진태백의 말에 박대용은 궁금증이 풀렸는지 자리에 앉았다. 광천진인은 그 모습에 한시름 놓였는지 진태백에게 눈인사를 건넸고 진태백도 마주 눈인사를 건네며 씨익 웃을 뿐이었다.
다음 날 미시말. 진태백은 박대용을 따라 마천원에 도착해 있었다. 미리 나와 있었는지 동수진인은 차를 마시고 있었고 그 뒤로는 공동오로와 공동파 내에서 명망이 높은 장로 몇몇만이 동석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대제자의 비공식적인 비무인 만큼 말이 새나가지 않을 정도의 지위에 있는 이들만 부른 듯 했다.
“오, 어서 오게나. 본파에 머무르는 것이 불편하지는 않았는가?”
동수진인의 말에 진태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벗이 있는 곳인데 초막이라도 호사지요. 신경써주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진태백의 말에 동수진인은 흐뭇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잘 있다니 다행이군. 얼마든지 머물러도 좋으니 가끔 차나 한잔씩 들도록 하세나.”
“장문인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자, 올 사람도 다 왔으니 이제 시작함이 어떠한가.”
공동오로의 첫째인 명신진인의 말이었다. 진태백이 서있는 곳에서 삼장여. 그곳에는 유재가 검을 허리에 찬 채 눈을 감고 묵상에 잠겨있었다. 진태백은 겉옷을 벗어놓은 다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조선 금강벽 이백삼십팔대 제자(朝鮮 金剛擘 二百三十八代 弟子) 진태백이 공동파 대제자 유재도사께 논검을 청합니다.”
진태백의 당당한 비무 신청에 묵상에 잠겨있던 유재는 눈을 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무의 순간이었다. 유재는 마주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공동파 사십삼대 제자(崆峒派 四十三代 弟子) 유재입니다. 진소협께 한수 청합니다.”
서로 인사를 한 후 진태백과 유재는 동시에 칼을 뽑았다. 한쪽은 도(刀)이며 무인(無刃)인데 반해 유재가 들고 있는 검(劍)은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있어 그 기세만으로도 살을 에일 정도였다.
진태백과 유재는 한동안 서로를 마주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의 사이에서 조그만 돌풍이 일어남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서로가 발출하는 무형기(無形氣)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었다.
사실 무형기로 겨루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자신의 무형기가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지만 상대의 무형기가 자신의 것보다 강할 경우 최소 중상이고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방식인 것이다.
“유재가 너무 무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고송진인의 말이었다. 검도에 있어서 공동파의 최고수인 그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이미 진태백은 구주구왕과 동격의 고수임을 증명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진태백은 막대한 살기를 다뤄왔기 때문에 기세의 조절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질 리가 없었다. 한데 아무리 뛰어난 고수라고는 하지만 유재는 아직 후기지수에 불과했다. 뛰어난 고수와 겨루어 승리를 한 적도 없었고 수라장을 헤쳐 나온 경험도 일천했다. 그래도 그가 인정받고 있는 것은 공동파의 대제자이기 때문이었다.
“믿어 보세나. 본파의 대제자가 자신의 역량도 모른 채 자신보다 뛰어난 고수에게 도전할리는 없으니 말일세.”
한편 유재는 기를 쓰고 진태백의 무형기를 제압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진태백의 무형기는 마치 끈적거리는 액체처럼 자신의 무형기에 달라붙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상대의 무형기에 틈이 있어야 파고들 것인데 자신의 무형기가 힘을 더하는 만큼만 힘이 더해지고 있으니 그의 무형기를 뚫을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유재는 방법을 바꾸기로 마음먹고 일시적으로 강하게 무형기를 발출하며 움직였고 진태백도 그에 맞춰 무형기를 강하게 발출하며 움직였다.
꽝!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강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의 무형기가 부딪치며 난 소리였는데 만약 두 사람의 무형기가 부딪치는 순간 그 사이에 있었다면 금강동인(金剛銅人)이라 해도 산산조각 나고 말았을 것이다.
두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비무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유재의 검이 영활하게 움직이며 진태백의 전신 요혈을 찔러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신기한 것은 검이 마치 형체가 없는 것처럼 진태백의 방어를 뚫고 파고들었다는 것인데 그 때문에 진태백은 상처를 입지는 않았으나 옷이 여기저기 찢어져 낭패를 보고 말았다.
“진공검(眞空劍)! 유재 저 아이가 어느새 저 정도의 진공검을!”
고송진인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진공검이란 검을 진기화(眞氣化)시키는 절정 검도의 한 종류로 검에 진기를 불어넣다보면 어느 순간 검날을 타고 기가 흐르기 시작하는데 이것을 검기(劍氣)라 부른다. 한데 검기를 발출하는 것이 아니라 응축시키는 방법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렇게 검기를 응축시켜가다 보면 어느 순간 검이 진기화 되어 상대의 초식을 파고들기 시작하는데 이것을 진공검이라고 이른다. 그러나 진공검은 기의 조절이 어렵기도 하거니와 실전에서 쓰는 것이 매우 어려워 적당히 입문만 하는 경우가 많은데 유재의 진공검은 흠잡을 곳이 전혀 없는 완벽한 것이었다.
“요 며칠간 수련을 한 것이 진공검 때문이었군.”
동수진인의 말이었다. 진태백과의 비무가 결정된 이후 그는 두문불출하며 수련에 매진했는데 그것이 진공검의 수련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었다.
- 작가의말
지난 편에 필자의 의견에 동감해주시는 독자분들이 많아서 대감동!
열심히 쓰겠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세요.
ps. 추천과 댓글은 필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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