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으로-4
북경(北京). 명나라의 수도이며 대도(大都)라고 불리는 이곳은 명나라의 문화, 권력의 중심지로 그 위치가 굳건했다. 사신 행렬을 따라 북경에 입성한 최부자의 상단은 북대가(北大街)에 위치한 커다란 객잔에 여장을 풀었고 최부자는 곧 조선에서 가져온 인삼을 팔기위해 바쁘게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진태백은 진태백대로 자신이 들어갈 표국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날 무렵. 진태백은 행랑아범인 박서방이 급히 자신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갔다.
“무슨 일이오, 박서방?”
“아이고, 도련님. 큰일 났습니다요!”
진태백은 흔히 들을 수 없던 박서방의 허둥거리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서방은 비록 양인(良人)에 불과하지만 그 사람 됨됨이가 바르고 쉽게 경동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최부자가 가장 신임하는 수하였기 때문이었다.
“앉아서 천천히 말씀해보시오. 대관절 무슨 일이기에…….”
진태백은 방에 있는 탁자로 다가가 의자에 앉은 다음 주전자로 차를 두잔 따라서 하나는 박서방에게 하나는 자신 앞에 두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 진태백의 침착함에 박서방은 한결 차분해진 모습으로 진태백과 마주앉아 말을 꺼냈다.
“아, 글쎄. 이 미친 되놈들이 담합을 했습니다요!”
“담합?”
진태백이 반문하자 박서방은 목이 마른 듯 차를 한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도련님도 아시다시피 삼(蔘)은 우리 조선 것이 최고 아닙니까요?”
“그렇지요.”
“여태껏 장사를 해온 인맥도 있고 해서 항상 거래하던 약재상을 갔습지요. 그런데 약재상에서 삼 한 근에 열 닷 냥 이상은 주기가 어렵다는 게 아닙니까요. 삼 한 근에 은 서른 냥은 받아도 싸게 파는 것인데 열 닷 냥이 말이나 됩니까요.”
“서른 냥이 평균 거래가격 입니까?”
“아닙지요. 절대 아닙니다요. 작년 같으면 은 쉰 냥에도 산다는 약재상이 부지기수였는데 이놈들이 미쳤는지 어느 약재상엘 가도 열 닷 냥 이상은 안 된답니다요. 올해는 풍년이라 천삼(天蔘)하고 지삼(地蔘)이 작년의 삼 할은 더나왔는데 그 가격이면 본전도 못 찾습니다요.”
“성재 어른은 어디계십니까?”
“그거야 방에 계십니다만…….”
진태백은 찻잔에 담긴 차를 단숨에 들이킨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은 성재 어른을 뵈어야겠습니다.”
박서방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진태백은 최부자가 묵고 있는 방으로 갔다. 방 앞에 서자 문이 닫혀있음에도 지독한 술 냄새가 밖으로 풍기고 있었고 진태백은 최부자를 부르지도 않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은 여기저기 술병이 굴러다니고 난잡하게 어지럽혀져 있어 깔끔하던 최부자의 풍모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고 최부자는 의자에 앉아 술을 병째로 들이켜고 있었다.
“안주는 필요 없다지 않았느냐! 딸꾹!”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딸꾹질까지 하는 최부자를 보고 진태백은 뚜벅뚜벅 걸어가 찻물이 담긴 주전자를 들어 공력으로 차를 식혔다. 금세 주전자가 차가워지고 주전자 밖에 물방울이 맺힐 정도가 되자 진태백은 차를 따라서 최부자에게 건넸다. 갑자기 들이밀어진 찻잔에 최부자는 눈을 힐끔 돌리고는 깜짝 놀라 자세를 바로 했다.
“혀, 현단도령!”
최부자는 허둥지둥 흐트러진 의관(衣冠)을 정제하려했으나 술에 취한 탓인지 잘되지 않았고 진태백은 묵묵히 그가 의관을 정제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어느 정도 최부자의 품세가 정리되자 다시 한 번 찻잔을 건넸다. 최부자는 진태백이 건넨 차를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어느 정도 술기운이 가시는지 말했다.
“후우, 시원해서 좋구려. 한잔만 더 마실 수 있겠소?”
진태백은 다시 한 번 차를 따라주었고 그렇게 연거푸 석 잔이나 차를 마신 최부자는 그제야 좀 더 편안한 기색이 되어 말했다.
“현단도령도 바쁜 터에 이 사람을 찾아오다니. 박서방이 알렸나보오?”
“그렇습니다. 박서방에게 들으니 약재상들이 담합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렇소이다. 작년이라면 없어서 못 팔 정도여야 하는데 올해는 이놈들이 무슨 야료(惹鬧)를 부리는지 알 수가 없소.”
“시간 여유가 얼마나 됩니까?”
“아마 한 달반 정도 남았을 거요. 사신들이 돌아갈 때 우리도 같이 동행해야 하니 말이오.”
“흐음…….”
진태백은 생각에 잠겼다. 마음 같아서는 좋은 해결책을 내밀어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자신이 여태껏 배운 것은 무예와 학문뿐이었다.
“현단도령, 도와주시오. 이대로 가다간 올해 상행을 모두 망치게 생겼소.”
최부자는 주먹을 꼭 쥐고 진태백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무담선생에게 진 빚도 다 갚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 제자인 진태백에게까지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면목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술기운에 달아오른 얼굴이 더 붉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최부자의 생각일 뿐이었고 진태백은 오히려 자신이 그에게 빚을 졌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저도 묘안이 떠오르지를 않는군요. 좀 더 생각을 해봐야겠습니다. 그러니 성재 어른께서도 술은 그만 드시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십시오. 술은 과하면 독일뿐더러 마음속의 화(禍)를 끌어내기 때문에 마음이 급해지고 좋은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 법입니다.”
“알겠소이다. 내 현단도령만 믿겠소.”
최부자와 이야기를 한 진태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뒤 진태백은 열흘 동안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러나 상재(商材)라고는 쥐뿔도 없는 그가 생각을 한다고 해서 묘안이 생각날 리도 없었고 마음의 부담만 커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머리도 식힐 겸 진태백은 박서방과 바둑을 두게 되었다. 박서방은 양인 치고는 꽤 괜찮은 바둑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무담선생과의 대국(對局)을 통해 실력을 키운 진태백의 상대는 전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박서방이 장고 끝에 포위된 진형을 포기하기 위해서 사석(死石)을 두자 진태백의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거다!”
느닷없는 진태백의 외침에 박서방은 깜짝 놀라 진태백에게 말했다.
“어이쿠! 도련님. 깜짝 놀랐잖습니까요. 무슨 일이길래 그러십니까요?”
“하하하! 되었습니다. 박서방! 상행을 망치지 않을 방법이 생각났습니다!”
“정말입니까요?”
“정말이다마다요!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성재 어른을 뵈어야겠습니다.”
진태백은 그 즉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최부자에게로 달려갔고 박서방은 내기에 걸린 오리구이를 사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최부자는 진태백의 말에 따라 요 며칠간 의관을 단정히 하고 머리를 비우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 계단을 뛰어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며 그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성재 어른!”
“현단도령이 아니오?”
최부자는 말 그대로 머리를 비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진태백에게 활로(活路)를 열어달라고 부탁했던 것마저 잊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면 요 며칠간 그는 미쳐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되었습니다. 되었어요!”
“되다니? 무슨 말이오?”
“삼을 원래의 가격이 아닌 몇 배의 가격에 팔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났단 말입니다!”
진태백의 말에 최부자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믿기지가 않는 듯 진태백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이오? 정말로 방법을 찾아내었소?”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사람들을 보내 각 약재상의 주인들을 불러 모으시고 불을 크게 피우십시오.”
확신에 찬 말이었다. 최부자는 진태백의 말을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즉시 약재상의 주인들을 부르게 하고 공터를 수배하여 크게 불을 피웠다.
타닥. 탁.
불티가 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공터에서 최부자는 약재상들 가운데 진태백과 함께 서있었다. 그의 뒤에는 이번 상행에 가져온 삼이 실린 수레가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약재상들은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작게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딘지 모르게 긴장한 모습이었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긴 했소만……. 이제 어찌할 생각이시오?”
최부자는 진태백에게 작게 소근거렸고 진태백은 단 한마디만을 말했다.
“불태우십시오.”
“!”
최부자의 눈이 크게 치켜떠졌다. 진태백이 말하는 것은 명백했다. 스스로 삼을 들어 불속에 집어넣으라는 것. 최부자는 잠깐 망설였다. 진태백의 말을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고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잠깐 눈을 들어 진태백의 얼굴을 본 최부자는 망설임을 버렸다. 그의 눈에는 확신만이 차있었고 최부자는 바보가 아니었다. 스스로 죽음으로 살아나는 것. 그것이 진태백이 말한 이 상황의 해결책이었다. 확신이 서자 최부자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수레로 달려가 삼이 들어있는 상자를 들어 그대로 불길 속에 집어던졌다.
화륵!
삼이 들어있는 상자를 집어삼킨 불이 한순간 크게 치솟았고 그것을 본 약재상들이 술렁거렸다. 설마 스스로 삼을 불길 속에 집어넣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최부자는 아랑곳없이 삼 상자를 불에 집어던졌고 그렇게 술렁임은 더욱 커져갔다. 최부자가 대략 열 개의 상자를 불속에 집어던지자 그들은 결국 참지 못하고 최부자를 만류하기 시작했다.
“그만두시오!”
“왜 그러는 것이오! 말을 하시오!”
최부자는 그들의 외침에도 계속 상자를 집어던졌고 그렇게 다섯 개를 더 불태우자 결국 약재상들이 몰려나와 최부자를 붙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성재 선생, 그러지 말고 이야기를 합시다. 왜 이러는 것이오.”
최부자를 붙잡은 약재상 중 하나가 말을 꺼내자 최부자는 몸부림을 치며 그들을 떼어낸 다음 소리를 질렀다.
“몰라서 묻는 거요! 내 이 삼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리려는 거요!”
최부자의 눈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어차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식의 해결방법이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던지 그 독기에 진태백마저도 섬짓할 정도였다.
“그러지 말고 나한테 파시오! 얼마면 되겠소!”
“흥! 지난번처럼 열 닷 냥이라고 해보지 그러시오!”
독기를 품은 최부자의 말에 말문이 막힌 약재상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고 약재상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가격을 높여 부르기 시작했다.
“내, 서른 냥에 사겠소!”
“마흔 냥! 마흔 냥에 사겠소!”
갑자기 경쟁적으로 가격을 높여 부르는 약재상들의 외침에 귀가 아플 지경이 되자 진태백은 최부자와 약재상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그들을 떼어내고 외쳤다.
“그만들 멈추시오! 성재 선생께서 말씀하실 거요!”
진태백의 목소리에 공력이 실렸는지 그의 목소리는 소란스러운 가운데에서도 약재상들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그 덕에 주위는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최부자는 잠시 셈을 해보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한 근에 일흔 냥! 일흔 냥에 팔겠소! 그리고 천삼은 백오십 냥! 지삼은 백 이십 냥에 팔겠소!”
최부자의 외침에 약재상들은 입을 딱 벌렸다. 예상은 했지만 어마어마한 가격을 부른 것이다.
“말도 안 되오! 그 가격이면 너무 엄청난 폭리요!”
한 약재상의 외침에 다시 최부자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거의 폭동에 가까운 소란이었지만 진태백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기세를 피워 올리자 기운을 감당하지 못한 약재상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고 최부자는 다시 한 번 외쳤다.
“폭리? 흥! 당신들이 삼을 열다섯 냥에 넘겨받으려 한 것은 폭리가 아니오? 그리고 이것은 당신들 때문에 지체된 시일에 대한 보상금과 지금 불태워 버린 삼 값을 포함한 가격이오! 이 가격을 받지 못한다면 차라리 내손으로 이 삼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릴 것이오!”
약재상들이 할 말이 있을 리 없다. 아무리 그들이 변명을 한다 해도 담합을 한 것은 사실이며 터무니없는 금액에 삼을 사려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침묵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최부자의 한마디로 인한 것이었다.
“참고로, 하루 지날 때마다 삼 가격은 열 냥씩 오를 것이오! 거래를 원하는 분은 북대가의 평원객잔으로 오시오!”
최부자는 그 말만을 남기고 수레와 사람들을 챙겨 돌아가 버렸고 진태백은 한동안 혼란에 빠진 약재상들을 구경하며 웃음 짓고 있었다.
- 작가의말
재밌게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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