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변고(西安變故)-3
자은사의 참극은 순식간에 서안에 퍼졌다. 그 역사가 서안을 대표할만한 절에서 수십의 스님들이 죽어나갔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더 큰 문제는 자은사 주지인 운장(雲奘)의 죽음이었다. 그는 무공이라고는 일초반식도 펼치지 못하는 평범한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부뿐만 아니라 강호에도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져 있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가 현 소림방장인 운각선사의 사제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본파가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버렸구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부님.”
본명보다 척홍검이라는 별호로 더 이름 높은 철유현은 수염을 쓸며 말했고 그의 제자인 호맹성이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물었다.
“운장선사가 돌아가신 이상 소림에서도 손 놓고 있을 수는 없게 되었단 말이다.”
“하지만 이미 화산파의 사람들도 서안에 와있지 않습니까. 제 생각에는 본파 혼자서 이 일을 해결하려 들기보다는 타파의 사람들과 함께 수사를 하는 것이 더 빨리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최근 있었던 연쇄살인에서 종남과 관계를 맺고 있던 이들만 죽어나간 것은 당연히 아니다. 서안은 섬서성의 주도(主都)인 만큼 넓기도 하거니와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있는 화산파와 관계를 맺고 있는 곳도 적지 않았다. 더군다나 서안을 가지면 섬서성을 가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만큼, 종남과 화산뿐만이 아니라 섬서성의 패주 자리를 노리는 자들은 하나 같이 서안을 노려왔다.
“사안만 따지고 보면 그것이 가장 좋겠지만 과연 잘 될는지 모를 일이다.”
철유현의 말에 호맹성은 고개만 갸웃거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실제로 철유현이 걱정하는 것은 일의 해결이 아니라 이미 화산파가 끼어든 판에 소림까지 끼어듦으로 해서 각 파간의 경쟁 심리가 격화될 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분명 이 일을 해결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곳이 당분간 서안에서 명성이 드높아질 것인데, 종남이든 화산이든 다른 문파가 서안에서 활개치고 다니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을 리 없었다.
종남파는 이미 오랫동안 서안의 터줏대감이었던 전통이 있기 때문에 서안 사람들의 지지가 확고한 편이었고 화산파는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전통의 강자였기에 종남에는 미치지 못해도 제법 많은 사업체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소림까지 끼어든다면 그야말로 이전투구(泥田鬪狗)가 따로 없는 판이 벌어질 것이다. 그 뿐이면 좋겠지만 각파간의 정보가 제대로 공유가 될지도 장담할 수 없으니 철유현은 그야말로 하루가 지날수록 자기 머리가 하얗게 세어가는 느낌이었다.
진태백은 생각 이상으로 고생을 겪었다. 관아에 자은사의 사건을 알린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가 특별한 연고가 없는 떠돌이이며 칼을 허리에 차고 있었기 때문에 관원들이 첫 번째 용의자로 그를 지목한 듯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관원들은 꽤나 상식적인 사람이었고 그가 가진 칼이 날이 서있지 않은 탓인지 그에게서 이상한 점을 찾지 못하자 몇 가지 통상적인 것을 묻고는 그를 돌려보냈다. 그가 머물고 있는 객잔으로 돌아오자 의외의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어제 만났던 호맹성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뵙는군요. 호소협.”
“예, 진소협. 바쁘지 않으시다면 저와 잠시 동행해주시겠습니까?”
호맹성은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이미 안면을 튼 사이인데다 이번 자은사의 혈겁은 관과 무림이 동시에 엉켜버린 기묘한 사건이었다. 자은사는 큰 사찰인 만큼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의 부인들이나 여러 요인들도 자주 방문하는 곳이었고 주지는 소림방장의 사제이니 관과 관계가 깊으면서도 무림에도 발을 걸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은사의 혈겁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시신을 가장 처음, 직접 보신데다 듣기로 진소협께서는 의술에 조예가 깊다고 들었습니다. 스님들의 시신에 기묘한 점이 없었는지 알고 싶어서······.”
“아마도 호소협의 사부님이 저를 청하신 모양이군요. 가시지요. 도움이 될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본 것은 빠짐없이 알려드리리다.”
“감사합니다.”
호맹성은 감사의 인사와 함께 진태백을 인도했다. 사실 이렇게 진태백을 찾아와 데리고 가는 것은 어찌보면 그를 진범으로 의심하고 있다는 반증일 수 있어 호맹성은 한바탕 드잡이 질을 각오하고 온 상황이었다. 그러나 진태백은 상황을 이해하고 순순히 따라나섰고 그것은 호맹성이나 진태백에게나 다행스런 일이었다.
“반갑네. 본인은 종남의 철유현이라 하네.”
“진태백이라 합니다.”
철유현은 부드러운 눈매를 가진 오십대 중반의 남자였다. 듣기로 하늘을 나는 기러기를 검기로 떨어뜨린다 하여 척홍검이라 불리는 이 남자는 종남파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였고 그에 못지않은 심계를 가지고 있어 상대하기 까다롭기로 유명한 사람이검의 었다.
“느닷없이 청하게 되어 미안하게 생각하네만 일이 생각보다 중하여 제자를 보내 자네를 청했다네.”
“알고 있습니다. 종남, 화산, 소림이 전부 연루되었다지요?”
“맞네. 특히나 자은사 주지 운장선사는 소림방장의 사제일세. 소림에서도 가만있을 수는 없겠지. 더군다나 자은사는 서안 최대의 사찰 중 하나이기 때문에 관에서도 이 사건은 가벼이 보고 있지 않네. 우리가 자네에게 도움을 받으려는 이유도 이 혈겁이 관과 무림 모두가 얽혀버린 사건이기 때문이기도 해.”
“하지만 저는 흉수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습니다. 알려드릴 것이라고는 시신들에 남아있던 상처뿐입니다만.”
“조그만 단서라도 우리에게는 필요하니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하네. 그렇게만 해준다면 소림이나 화산에서 자네를 번거롭게 하지는 않을 것이야.”
말이야 부드럽게 한다고는 하지만 거짓을 말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일종의 엄포였고 진태백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가락으로 턱을 짚으며 자은사에서 있었던 일을 철유현에게 말해주었다.
“하지만 이상하더군요.”
“뭐가 말인가?”
“스님들의 목에 남은 상처는 그을린 자국만 없다면 못보고 지나칠 정도로 얇았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땟국으로 착각할 정도로 그을음도 적기는 했습니다만.”
“그런데?”
“원래 사람의 상처는 예리한 것에 베이면 벌어지게 되어있고 또 그을음이 생긴다는 것은 열이 가해졌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당연히 상처는 크게 벌어져야 합니다. 거기다 하나같이 염천혈(廉泉穴)을 베었지요.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출혈이 없었습니다.”
“출혈이 없었다고?”
철유현의 말에 진태백이 고개를 끄덕였고 철유현은 생각에 잠겼다. 열염공(熱炎功)을 깊게 익힌 사람이 검기를 발휘하면 상대를 베었을 때 살을 불태워 출혈이 적어지기는 한다. 하지만 진태백이 말했듯이 상처가 앙다물어져 있어 출혈이 거의 없었다고 하면, 상대가 사용한 흉기는 강한 열기와 흡인력을 가진 신병이기(神兵異器)임이 분명했다. 철유현이 보기에 이번 혈겁의 흉수는 월형 진공검(越形 眞空劍)을 익힌 듯 보였다.
월형 진공검은 선형 진공검의 속도보다 더욱 빠르고 은밀한 수법이다. 하지만 월형 진공검은 그 위력만큼이나 제약 조건이 많은 수법이고 월형 진공검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음공(陰功)을 익혀야만 하는 점을 감안하면 살펴볼 범위를 더욱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이 끝나자 철유현은 즉시 호맹성을 불러 말했다.
“너는 최근에 강호에서 일어난 사건 중 강한 열기를 품은 신병이기가 도난당하거나 새로이 나타나지 않았는지 알아보고 강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음공의 고수가 있는지 알아보도록 해라. 개방 분타에 가면 사흘 이내로 받아볼 수 있을 것이다.”
철유현의 말에 호맹성은 급히 개방 분타로 향했고 철유현은 진태백에게 말했다.
“덕분에 수사의 방향을 잡을 수 있었네. 고맙네 진소협.”
“현장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저이니 당연한 일입니다. 한데, 서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오리무중일세. 다만 조금 이상한 일이 있었지.”
철유현의 말에 진태백이 호기심을 드러냈고 그는 수염을 쓸며 말했다.
“사실 죽은 이들은 본파보다 강씨세가와 연을 맺고 있는 이들이 더 많네. 물론 본파가 서안의 터주대감 노릇을 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서안 지부까지 배출한 적이 있는 강씨세가보다는 못한 게 사실이지. 정작 이상한 일은 강씨세가에서 이 일에 그다지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를 않다는 점이야. 서안의 사업 중 절반 이상이 강씨세가와 연관이 있다고 알려져 있기 까지 한데 말이지.”
확실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진태백은 강씨세가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지만 천하가 아니라 서안 한곳만 보면 종남파의 성세를 훨씬 넘어서는 곳이 바로 강씨세가였다. 더군다나 관직에 올라있는 사람도 많고 집안의 재산만 따지면 서안을 통째로 사버릴 수 있다고 까지 하는 집안이 이런 큰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확실히 이상하군요. 관을 믿고 있는 것인가요?”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죽은 이들이 모두 한 사업체의 주인들인지라 손해가 막심할 텐데······. 애당초 그들은 무림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이들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이번 사건의 피해자들의 사업들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심이 좋을 것 같군요.”
“음? 피해자들이 운영하던 사업들 말인가?”
철유현은 우둔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무언가가 떠오른 듯 생각에 잠겼고 잠시 후 진태백에게 말했다.
“고맙네.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자네가 알려주었어.”
“결국 철대협께서도 떠올리셨을 생각입니다.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진태백은 잠시 몇가지 대화를 더 나눈 다음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마도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그들이 자신을 찾을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진태백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걸음을 옮겼다.
“분광발도의 일은 신경쓸 것 없네.”
화의를 걸친 중년인의 말에 위공의 고개가 들렸다. 불과 몇 시진 전에 그와의 분쟁이 있었음에도 맹재야의 신색은 태연했고 걱정하는 빛이 없어 오히려 위공이 불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보주!”
쟁쟁한 고수인 위공에게 보주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이는 천하에 단 한명, 바로 조양보의 보주인 맹재야 뿐이다. 불안해하는 위공을 다독이며 중년인, 맹재야는 가볍게 말했다.
“먼저 잘못한 것은 연아라고 하지 않았는가? 뭐, 자네도 실수를 하긴 했지만 분광발도가 두고 보자고 말한 것도 아니고 그저 약간의 오해가 있었을 뿐이지. 나중에라도 마주쳤을 때 잘 대처하면 그만일세.”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첫 단추부터 너무 엇갈리지 않았는지 걱정입니다.”
“그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라면 고작 이런 정도로 본보에 원한을 품지는 않을 걸세. 그가 참지 못하는 것은 인의에 어긋나는 일과 자신을 정당치 못한 이유로 이용하려 할 때뿐이야. 그가 돌아갈 때 서로 얼굴 붉히기 싫다면서 돌아갔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결국 지금은 본보와 척을 질 생각이 없다는 게야.”
위공이 생각하기에도 맹재야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와는 얽히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위공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맹재야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왜 그리 생각하는가?”
“그에게는 적이 너무 많습니다. 구파일방에 속하지는 않는다지만 형산파는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고 그것은 호결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그의 친우가 공동파 광천진인 문하라는 것과 소림 현공대사께서 그를 평생의 지기라고 말씀하신 것은 알고 있는가?”
“네?”
“그가 원한다면 공동파와 소림사를 지원으로 얻을 수 있음이야. 물론 자네야 본보의 안위가 최우선이지만 나에게는 본보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 지상과제라네. 그래서 보를 떠나 이곳 강씨세가까지 온 것이고 말이야.”
맹재야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야심이 담겨 있었다. 이미 장성일대를 석권한 조양보이지만 그의 목표는 강호에 몸을 담은 이들이 모두 한 번씩은 꿈꾸는 군림천하(君臨天下)였다.
“강호에 몸을 담고 있으면 언제고 한번은 마주칠 테지.”
향긋한 다향을 맡으며 중얼거리는 맹재야의 말에 위공은 그저 고개를 숙일 뿐,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 작가의말
모두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어느새 총 조회수가 백만을 넘었습니다만 연참으로 보답해 드리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완결까지 더욱 재미있는 글을 쓰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정유년 새해,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어디 저 먹여살릴 여자분 있으면 소개좀......(군만두만 먹어도 좋으니 그냥 틀어박혀서 글만 쓰고 싶네요.)
ps. 추천과 댓글은 필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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