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대면(法王對面)-2
“갸아아아악!”
밀실 안의 공기는 후덥지근했다. 기분 나쁜 습기가 맴도는 공간 안에서 마수광은 머리꼭지가 일어나는 고통을 견디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직도 할 말이 없소?”
인독당 소속의 고수인 당사원(唐史爰)의 물음에 마수광은 입을 벌릴 힘도 없는지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어떻게 된 고문이 이쯤 되면 고통에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매번 새로운 고통이 새롭게 그의 신경을 타고 흘렀다. 당문의 고문은 굉장히 색다른 것으로 인두로 지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뭔지 모를 액체를 뿌린다거나 침으로 몸 여기저기를 쿡쿡 찌르는 정도인데 그러고 나면 이런 고통이 있을까 싶을 정도의 고통이 밀려드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신경을 생으로 뽑아내는 느낌이라 할까.
원래 고문은 받는 자의 몸을 망가뜨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을 고사(枯死)시켜 자포자기하게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당문에서 행해지는 고문은 분명 효과적인 것이었다. 죽을 염려가 없이 끔찍한 고통만을 느끼게 하니 말이다. 그러나 마수광의 정신력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사흘이 넘도록 고문을 당하면서도 입을 열지 않는 자는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촤악!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자 정신을 잃었던 마수광이 흐릿한 눈을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구원이 있을 리가 없다. 순우천에게 기해혈이 파괴당한 이상 스스로 심맥을 끊고 자진할 수조차 없는 상황. 마수광의 강인한 정신력도 깨지기 직전이었다.
“아직도 멀었느니라. 네 뒤에 있는 자를 토설하기 전엔 마음대로 죽지도 못할 것이다.”
다시 고문이 시작되었고 밀실 안은 마수광이 토해내는 비명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마수광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가진 존자(尊者)에 대한 존경심과 그를 모신다는 자부심이 끝끝내 그의 입을 막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 비명을 지르던 마수광이 다시 정신을 잃자 당사원은 혀를 차며 말했다.
“참으로 지독한 놈이로군. 좋아, 오늘은 이쯤 해두지. 어차피 새털같이 많은 날이 있으니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당사원은 밀실을 나갔고 뒤이어 마수광을 보살피라는 명령을 받았는지 노복(老僕) 한명이 물통과 화권(花捲) 몇 개를 가지고 들어왔다. 입가에 물을 흘려주어 마수광이 정신이 들게 한 노복은 화권을 조금씩 뜯어 그에게 먹였다. 두어 개쯤 먹다 목이 메어 물을 달라고 하려는 순간 노복이 화권을 얼굴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 순간 마수광의 눈에 화권에 조그맣게 쓰인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단설(斷舌).
단 두 글자에 불과했지만 마수광은 대번에 그 뜻을 알아차렸다. 자신을 구할 생각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구할 수 없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혀를 끊고 죽으라는 뜻이었다. 목숨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자신의 존재가치가 고작 이 두 글자 뿐인가 라는 생각에 마수광은 허탈감을 느꼈다. 문득 보니 노복은 물통을 자신의 입가에 갖다대고 있었고 마수광은 물통에 담긴 물을 모조리 마셨다. 아주 달게.
황보진이 정신을 차린 것은 모든 일이 수습되고 사흘이 지나서였다. 그만큼 엄중한 부상이기도 했지만 자칫 잘못됐으면 평생 닦은 무공까지도 잃을 수 있었던 위험한 순간이었다. 황보용은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오라비인 탓에 그 옆에서 사흘간을 뜬눈으로 지새웠고 진태백도 부상을 수습하기가 무섭게 직접 황보진의 상세를 돌보았다.
“이거 진형에게 신세만 지는구려.”
“그런 말마시오. 황보형이 무사히 깨어난 것만으로도 충분하오. 아직도 내 선택이 옳았는지 의심스러운 지경이니 말이오.”
진태백은 인노와의 싸움이 끝나고도 한참을 고민했지만 아직도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 틀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황보진이라는 벗을 잃는 위험을 무릅쓰기 싫었다면 황보진이 혼자서 인노와 대적할 때 뛰어들었어야 했고 그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서는 그가 패했을 때 뛰어든 것이 옳았을 것이다. 하지만 황보진이 목숨을 잃었다면 진태백은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고 또 황보세가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었을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진형. 진형의 선택은 옳았다오.”
황보진은 걱정스런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진태백을 격려했다. 결과적으로 진태백은 자신의 목숨과 자존심, 둘 모두를 지켜준 것이다.
“설령 진형이 나섰더라도 내가 막았을 것이오. 고맙소. 내가 비겁하지 않게 해주어서.”
황보진의 말에 진태백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만 끄덕였다. 어째선지 눈물이 날것만 같아서였다. 원기가 많이 상한 탓인지 피곤해하는 황보진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 방을 나온 진태백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다소곳이 서있는 황보용이었다. 어쩐지 그녀를 볼 면목이 없어 간단히 목례만 하고 지나치는 그를 황보용이 불러 세웠고 둘은 후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진소협은 오라버니가 다친 것이 본인의 탓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한참동안을 후원만 바라보고 있던 황보용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진태백은 대답할 말이 옹색해서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데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진소협은 신이 아니에요.”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황보용의 말에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진태백의 말이었다. 스스로 실언이라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숙이는 그를 보고 황보용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째서 자신을 그렇게 몰아가는 거지요? 진소협은 방금 스스로 신이 아니라는 것을 말했어요. 그렇다면 스스로를 그렇게 자책할 필요가 없어요.”
“내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내 스스로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태백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살아오면서 자신이 이렇게 말주변이 없었는가 싶을 정도로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말을 해야 했다.
“막을 수 있었던 일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 나를 견디기 힘들게 합니다.”
“그건 오라버니가 심한 부상을 입었기 때문인가요?”
황보용의 말에 진태백은 고개만 끄덕일 뿐 말이 없었고 그녀는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다.
“진소협!”
깜짝 놀라 자신을 바라보는 진태백에게 황보용은 단호하게 말했다.
“오라버니께서 인노라는 사람에게 도전한 것은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에요. 오롯이 오라버니의 책임이고, 선택이었습니다. 두 분이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나눌 수 있는 벗이라는 것도 잘 압니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지 마세요. 오라버니는 스스로 무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인노와 싸운 것입니다. 진소협이 계속 오라버니의 부상을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면, 오히려 그것이 오라버니를 부끄럽게 하는 것임을 왜 모르십니까? 저도 그날 오라버니께서 외치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스스로의 비겁이 무섭다는 오라버니의 말을 듣고 솔직히 저는 감동했습니다. 비록 저는 출가외인(出嫁外人)이 될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사람이 제 오라비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단 말입니다!”
황보용의 목소리에는 어느 샌가 물기가 섞여있었다.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때로 필부의 만용이 될 수 있기에 진태백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는 것이다.
“황보소저의 말은 알겠소. 그러나 황보형과 나는 입장이 다르오.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필부이기에 비겁하지 않고자 하는 것이오. 가진 것이 없는 자가 비겁하게 되면 그것은 자신의 존재마저도 잃는 것이니까. 허나, 황보형은 후에 황보세가라는 거대한 가문의 주인이 되어야할 사람이오. 강함도 있어야 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부드러움을 갖춰야 하는 것이 우두머리의 책무요. 비겁이 두렵다하지만 자신이 보살펴야할 식솔들을 외면한 채 제 갈 길만 가는 것도 도리가 아니지 않소. 설령 자신을 잃더라도 자신이 보살피는 자들을 살리는 것, 그것이 제왕지도(帝王之道)인거요. 인노와 싸울 때의 황보형은 제왕의 덕을 보인 것이 아니라 그저 필부의 무용(武勇)을 보인 것에 불과했소.”
진태백의 말에 황보용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녀와 오라비가 무인(武人)으로서의 상황만 보고 있었다면 진태백은 황보세가의 다음 대 주인이 될 황보진의 미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보는 시점이 다르니 의견도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때문에 나는 자책하고 있는 것이오. 다른 것보다 그의 생명을 중요시하지 않았다는 것이 화가······, 나오.”
따져보면 진태백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다. 살아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명예를 잃어도 되찾을 수 있고 부를 잃어도 되찾을 수 있다. 하지만 목숨만큼은 되찾을 수 없다. 오늘 같은 상황이 또 다시 일어난다고 했을 때 진태백과 같은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 것인가. 아마 일푼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태백은 스스로를 자책하고 분노하며 우울해 하는 것이다. 그때 황보용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괜찮을 것입니다. 오라버니도 이번 싸움으로 얻은 것이 있을 것이고, 또.”
황보용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른 다음 확신에 찬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진소협과 같은 벗이 있지 않습니까. 그릇된 길로 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진태백은 확신에 찬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은하수처럼 빛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자 스스로의 자책감이 사라지고 그녀의 말이 옳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황보소저의 말씀이 맞소. 황보형이라면 분명 정도(正道)를 걷는 훌륭한 가주가 될 것이오.”
진태백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지자 황보용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살풋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 옆에 나와 당신이 함께 있으면 좋겠어요. 바보 같은 사람.’
처녀의 가슴에 훈풍이 불고 있었다.
서영영과 금륜법왕은 성도(成都)에 도착해있었다. 사천당문이 있는 금당까지는 이제 하루정도면 도착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 진태백이 당문에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서영영이나 금륜법왕이 당문을 무섭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장무림이 중원을 침공한 상황에서 가뜩이나 격전을 치르느라 예민해져 있는 당문을 자극하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물론 그 상황을 뻔히 알고 있는 두 사람이 일부러 당문을 자극하는 바보짓을 하지는 않을 테지만 말이다.
“진소협이 언제 당문을 떠나는지는 아직 모르는 건가요?”
배를 오랫동안 탄 탓인지 약간은 수척해 보이는 서영영의 물음에 그녀 앞에 부복해있던 풍운십사호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현재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레 안에는 출발할 것이라는 것이 공통된 의견입니다.”
“인노라는 자의 정체는 알아냈나요?”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풍운십사호의 말에 서영영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어째서죠?”
“기련검마나 폭풍곤의 경우에는 워낙에 특색이 강한 무공을 지녔습니다. 하지만 비류경이라는 발경과 일성삼척이라는 각법은 본교나 다른 곳에서도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앞서 말한 둘의 경우에 비춰보자면 최소 이십년간은 강호에서 활동한 적이 없는 자인지라 조사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렇군요.”
풍운십사호의 말에 서영영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십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이 즐비한 강호에서 이십년이나 활동이 없었다면 잊히기에는 충분한 시간인 것이다.
“다만, 그가 포숙과 뭔가 인연이 있는 듯하여 조사 중입니다.”
“포숙? 남두권(南斗拳)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진태백이라는 자에게 말하길 자신을 장강이북에서 권법의 제일인자라고 했다합니다.”
“흐음······.”
서영영은 생각에 잠겼다. 남두권 포숙이라면 그 실력이 권왕과 비견되는 실력자였다. 그런데 스스로 강북제일권(江北第一拳)이라 자처했다면 분명 그는 분명 대단한 실력의 소유자임이 틀림없었다.
“일단 그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뒤로 미루세요. 진소협에게 물어보면 알지도 모르는 일이고 또, 지금부터 교주께서 풍운전에 내린 명령은 해제하도록 하겠어요. 이미 정보수집이 필요없을 만큼 가까워졌으니 풍운전은 서장의 정보를 수집해서 본교로 복귀하도록 하세요. 특히, 아극랍의 제자라는 사람에 대해서 상세히 조사하도록 하세요. 그는 분명 큰 변수가 될 것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풍운십사호의 말에 서영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풍운십사호는 깊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성녀의 분부 받들겠습니다. 부디 옥체보존 하십시오.”
- 작가의말
재밌게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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