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대회(英雄大會)-3
현공대사가 진태백을 이끌고 간 곳은 상당히 외진 숲에 있는 조그만 암자(庵子)였다. 특별히 정해진 이름도 없는 듯 현판도 달려있지 않았고 무성한 잡초들만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지만 진태백은 그것이 부잡스럽다거나 하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암자의 주인인 현공대사의 기품이 배어있는 듯 비었으나 비어있지 않고 고요하지만 적막하지 않았다.
“여기가 내 거처일세. 초라하지만 어서 들게나.”
암자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현공대사의 뒤를 따라 진태백이 암자 안에 들어서자 눈에 보인 것은 결코 상등품이 아닌 낡은 다기(茶器)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자루 몇 개, 그리고 낡은 서탁이었다.
“좋은 곳이로군요.”
진태백의 말에 현공대사는 주름진 얼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허허허, 이 늙은 중의 거처를 칭찬하는 이는 소협이 처음일세. 기분이 좋구먼.”
현공대사의 웃음에 진태백도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중원에 들어온 뒤 처음 만난 이 고승은 스승인 무담선생의 벗인 공법대사를 떠올리게 했다. 어릴 적 두어 번 만나본 것이 다이지만 보는 이를 푸근하게 감싸는 자비가 있었다. 한데 이 고승에게서도 비슷한 느낌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보다, 이것을 받게.”
현공대사는 품속에 손을 넣어 아까 진태백에게 건넸던 밀랍으로 감싼 환약을 내밀었다. 밀랍으로 싸여있었음에도 환약에서는 머리를 맑게 하는 청량한 향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것만 보아도 그 환약이 보통의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케 했다.
“아까 스님께 구명지은을 입었다 말씀 드렸습니다. 더 이상의 은혜는 제가 감당키가 어렵습니다. 거두어주십시오.”
진태백의 말에 현공대사의 얼굴에 떠올라있는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허허허, 소협은 너무 겸손하군. 이것이 아무리 귀한 약이라 해도 노납(老衲)에게는 아무런 필요가 없는 신외지물(身外之物)에 불과하네. 내 평생 남과 겨룬 적이 없어 이 약을 쓸 일이 없었는데 이렇게 소협을 만나 부상을 치료하라고 건네주는 것 또한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因緣)이 아니겠는가.”
현공대사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거절한다면 오히려 그것은 무례일 것이다. 두 손으로 공손히 환약을 받은 진태백은 밀랍을 벗겨내고 약을 삼켰다. 청량한 향기가 코끝에 맴돌며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 진태백의 눈이 커졌고 현공대사는 조용한 목소리로 진태백에게 말했다.
“그대로 운기를 하도록 하게. 자네와 싸웠던 형산파의 정대협은 형산파가 자랑하는 신공인 유정진기(幽炡眞氣)를 십이성 대성한 사람일세. 그의 검을 맨손으로 쳐냈으니 세맥(細脈)으로 그 내상이 침투해 들어갔을 터.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나중에 큰 고생을 하게 될게야.”
현공대사의 말에 진태백은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고 부동명왕공과 북명심공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진태백이 눈을 떴을 때 이미 날은 저물어 있었다. 어두운 방안에서 염불을 하며 염주를 굴리던 현공대사는 긴 날숨과 함께 진태백이 눈을 뜨자 현공대사는 예의 그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진태백에게 말했다.
“내상은 모두 치료하였는가?”
진태백은 자리에서 일어나 현공대사를 향해 큰절을 하며 말했다.
“대사님의 은혜 덕에 모두 치료했습니다. 헌데 제가 먹은 그 약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응? 아, 별것 아닐세. 소환단이라 부르는 말 그대로 조그만 약효를 가진 약일뿐이네.”
현공대사는 정말 별것 아닌 듯 말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천하에서 최고의 영약을 꼽을 때 절대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소림사의 대환단(大還丹)과 무당파의 자소단(紫素丹)인데 이것보다 약간 떨어지는 것이 바로 진태백이 복용한 소환단이었다. 아무리 진태백의 견문이 얕다고는 하지만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영약 중 하나인 소환단을 모를 리가 없었다.
“어찌 그런 귀한 것을 저에게…….”
“허허허, 말했지 않은가. 노납의 나이가 벌써 일흔인데 평생 단 한 번도 남과 다투어본 적이 없었네. 당연히 그런 영약이 필요할 리가 있겠는가. 어차피 죽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소협의 내상을 치료하는데 쓰인다면 약이 만들어진 이유는 다한 것이 아닌가. 정작 필요한 이에게 쓰지 않을 것이라면 없느니만 못한 것일세.”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을지…….”
진태백은 쉴 새 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 그를 보던 현공대사는 천천히 일어나 절을 하고 있는 진태백을 일으켜 세운 다음 말했다.
“되었으니 그만하게나. 모두가 인연인 게지. 그나저나, 이제 내가 물어본 것에 대해 대답을 해줄 수 있겠나?”
“네? 어떤…….”
진태백은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그제야 아까 정청백과 맞붙었을 때 현공대사가 물어본 것이 기억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현공대사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익힌 무예의 특성입니다.”
“허어……, 어떤 무예이기에 그런 광포한 살기를 품고 있단 말인가? 내 평생 남과 다툰 적은 없지만 견문은 누구 못지않다고 생각하네만.”
“저는 명국 사람이 아니라 해동의 조선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소협이 익힌 무예는 조선의 무예라는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허어, 참으로 이상한 일이로다. 그런 살기를 품고 있으면서도 소협의 눈에는 사기(邪氣)가 깃들어있지 않으니 말일세.”
현공대사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당금 강호의 최절정을 달리는 고수들인 팽철신과 황보광도 비슷한 의문을 품었으니 말이다. 진태백은 현공대사에게 금강벽에 대해서 자세히 말해주었고 진태백의 설명을 들은 현공대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처음에는 살아남기 위한 무예였으나 후에는 위의(威儀)를 갖추도록 변화하였다는 말이로군.”
“하지만 아직 저의 수련이 부족한 탓에 아까 형산파의 사람들과 맞붙었을 땐 정말로 큰일이었습니다. 스님의 불호가 아니었다면 아마 저는 온몸의 혈맥이 터져죽거나 광인이 되어 죽었을 것입니다.”
“선재(善哉), 선재로다.”
현공대사는 흐뭇한 웃음을 얼굴 가득 띠고 있었다. 진태백이 광포한 살기만 품은 살인마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일단 기뻤고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청년을 보는 것 또한 기꺼운 일이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자네가 익힌 무예를 보여줄 수 있겠는가?”
사실 현공대사가 이렇게 묻는 것은 큰 금기를 범하는 것이었다. 세상에 어느 누가 자신의 무예를 남에게 보여주려 하겠는가. 스스로 가진 약점과 장점이 모두 드러날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이런 성향은 강호의 명문정파일수록 강했는데 심한 경우 자파의 절기를 보호하기 위해 죽을 위기에 처해서도 자파의 절기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형편에 진태백에게 스스로 지닌 무예를 보여 달라고 한다는 것은 아무리 현공대사의 배분이 높다고 해도 무례한 일이었다.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이곳은 좁으니 밖으로 나가시지요.”
그러나 진태백은 허탈할 정도로 쉽게 현공대사의 부탁에 응했고 자리에서 일어나 암자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하늘에는 보름이 가까워진 탓인지 거의 둥글게 변한 달이 밝게 하늘을 비추고 있었고 덕분에 어렵지 않게 앞을 분간할 수가 있었다. 현공대사도 진태백의 뒤를 따라 암자 밖으로 나섰고 진태백은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윽.
특별한 기수식(起手式)이랄 것이 없는 진태백의 준비 자세는 평범했다. 그러나 그의 움직임이 시작되자 현공대사의 눈은 놀라움으로 크게 떠졌다. 형(形)이 있으나 무형(無形)이었고 쾌(快)속에 둔(鈍)이 있었으며 살기(殺氣) 속에 활기(活氣)가 있었다.
또한 진태백의 움직임 속엔 무당파 특유의 전사경이 있었다. 그것도 속가제자들이 사용하는 외전사(外纏絲)가 아닌 내공의 회전을 통해 더욱 큰 힘을 이끌어내는 무당파의 적전제자들이나 전수받는 내전사(內纏絲)가 분명했다. 거기다 진태백의 움직임은 분명 어떤 무기를 들건 바로 무기술이 될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허어, 과연 정대협이 무당파와의 관계를 물어볼 만도 하구나. 내전사와 더불어 무당 태극권과 같이 무기를 손에 쥠과 동시에 무기술이 되는 권법이라니.’
현공대사는 진태백의 움직임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해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분명 무당파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할 정도의 유사점이 진태백의 움직임에서 보이고 있었다. 다만 태극권은 물이 흐르듯 부드러운 움직임 속에 경력을 실어 상대의 힘까지 이용하는 반면, 진태백의 움직임은 전사경으로 끌어올린 경력을 최단거리, 최단시간에 뻗어낸다는 점이 달랐다.
“그만, 그만 하게나.”
현공대사의 말에 진태백의 움직임이 멎었다. 현공대사는 잠시 숨을 고르는 진태백을 바라보다가 그를 다시 암자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차를 끓였다. 그가 차를 끓이는 것을 보고 진태백이 나서려고 했지만 현공대사는 손을 들어 올려 그를 제지했고 물이 끓어오르자 찻잎을 담은 잔에 물을 부은 다음 진태백에게 건네며 말했다.
“확실히 소협의 무예는 무당파의 태극권과 유사한 점이 있네.”
“그렇습니까?”
“그렇다네. 경력을 끌어올릴 때 소협이 사용하는 방법을 중원에서는 전사경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중원의 어떤 문파도 사용하지 않는다네. 아니, 사용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맞겠지.”
“어째서 입니까?”
“보통 중원의 권법은 유(柔)가 아닌 강(剛)으로 경력을 뻗어낸다네. 노납이 익힌 소림권도 그렇고 대부분이 그렇지. 유를 사용한다 해도 그것이 회전을 이용하는 것은 아니야. 오히려 일직선으로 뻗어낸다고 말해야겠지. 다만 그 힘의 발휘에 있어서 상대의 힘과 정면으로 맞부딪치느냐, 아니면 흘려보내며 휘어들어 가느냐의 문제라네. 흔히 허(虛)로 실(實)을 치는 방식인데 무당파의 무예는 완전히 다르지. 무당파의 태극권은 회전을 이용하여 상대의 공격을 되돌려 상대의 힘으로 상대를 치는 방식이라네.”
“그렇다면 저의 무예는 전사경외에는 그다지 관계가 없는 듯 합니다만.”
“그렇지만 문제는 자네가 발휘하는 전사경이 그저 근육만을 이용하는 외전사가 아닌 내공을 사용하는 내전사라는데 있네. 자네는 모르는 듯 하지만 이 내전사는 체계적인 가르침과 훈련이 없으면 오히려 스스로가 다치게 되는 수법이네. 그리고 이 내전사는 스스로의 힘만으로도 충분한 위력을 발휘할 수가 있고 수발이 자연스러워 질수록 보통의 경력보다 훨씬 강한 경력을 발휘할 수가 있지. 때문에 무당파에서도 적전제자가 아닌 이상 이 내전사를 가르치지는 않는다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것입니까?”
진태백의 말에 현공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당파의 문인이 아닌 자신이 보기에도 확실한 내전사를 구사하는 이가 무당파의 적전제자가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문제가 될 수가 있었다. 적절한 해명이 없다면 무당파에서는 진태백을 제거하려 들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정작 진태백은 그 상황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노납이 생각하기엔 소협의 무예가 중원으로 넘어온 것이라고 생각되네. 그것이 중원에서 다듬어지고 발전한 것이 무당파의 태극권이라는 느낌이 강하군.”
“어째서 그리 생각하십니까?”
“무당파가 세워진 것이 언제인지 아는가?”
현공대사의 물음에 진태백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중원으로 건너 온지 2년도 되지 않아 중원의 문파들도 온전히 알지 못하는 진태백이 그런 것을 알 리가 없었다.
“원나라와 명나라의 교체기에 세워졌다네. 따지고 보면 삼백년도 되지 않은 비교적 신흥문파나 마찬가지라네. 하지만 소협이 익혔다는 그 금강벽이라는 무예는 무려 천년이상을 전해오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더 오래된 것이 유입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둘 다 독자적으로 발생하여 발전해왔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겠지. 가장 확실한 것은 무당파에 직접 물어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현공대사의 말에 진태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강벽과 같은 전사경을 이용하면서도 전혀 다르게 발전한 무예가 있다는 것은 진태백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했다. 어차피 포숙의 유해를 뿌려주기 위해서라도 호북성에는 가보아야 했으니 이번 영웅대회가 끝나면 무당파를 방문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닐 것이었다.
“필요하다면 노납이 무당파와 다리를 놓아줄 수도 있네.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려면 그편이 좋지 않겠나?”
진태백은 생각에 잠겼다. 이미 현공대사에게 감당할 수 없는 큰 은혜를 입은 형편이었다. 더 이상 그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면목이 없는 일이었으나 현공대사의 오지랖이라면 진태백이 거절하더라도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할 수도 있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실제로 진태백과 무당파간의 오해가 생길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이미 호결원과 형산파라는 적이 생긴 진태백으로서는 훨씬 힘든 일이 생길수가 있었다.
“허허, 노납에게 폐가 된다는 생각은 하지 말게. 오히려 소협과 무당파의 불필요한 오해를 줄여서 싸움으로 인한 사상자가 생기지 않게 하려는 이 몸의 욕심일 뿐이네.”
어느새 진태백의 속내를 짐작한 듯 현공대사가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고 진태백은 다시 한 번 그에게 큰절을 올렸다. 진태백이 스스로의 일에서 벗어나지 못해 편협한 생각을 하는 중에도 현공대사는 자비심으로 서로의 오해를 줄이고 싸움으로 인해 생겨나는 사상자를 걱정하고 있었다. 지닌 무공의 고하를 떠나 현공대사는 이미 완성된 대인(大人)이었다.
- 작가의말
아아........아침에 출근해야 하는데 갑자기 밤중에 글이 잘써져서 한편을 완성하고 말았군요.
독자님들은 좋아하실 일이니 저도 기쁘지만 출근을 앞두고 이걸 올리는 심정은 꽤나 복잡합니다. ^^;;;
최근 유료연재가 열리면서 유료연재에 대한 유혹을 좀 강하게 받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도 덜 익은 글을, 그것도 취미로 하는 활동에 대해서 대가를 받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제 마음이 허락하질 않는군요.
후에 좀 더 여문 글을 쓸 수 있게 되거나 마음이 바뀌어서 유료연재로 전환할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유료연재보단 무료연재를 하면서 독자분들과 좀 더 함께 호흡을 했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큽니다.
여튼 재미있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저도 투베 top10 안에 한번 들어봤으면 좋겠네요. 후후후.......
ps 추천과 댓글은 필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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