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기변(四川奇變)-3
휘익!
황보진이 내지른 주먹이 진태백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가 이번에 사용한 무공은 패권(覇拳)의 압두굴슬(壓頭屈膝)이라는 초식으로 마치 망치로 못을 때려 박듯 머리를 내리치는 초식으로 패권이라는 무공명에 걸 맞는 무척이나 강맹한 공격이었다. 말이 머리를 눌러 무릎을 꿇게 하는 초식이지 실제로는 머리를 부숴버리는 무시무시한 살수(殺手)로 이름 높았고 황보진 또한 이 초식으로 금강두(金剛頭) 오준(吳雋)이라는 흑도의 고수를 때려죽이고 금강권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진태백은 황보진의 오른 주먹이 자신의 정수리로 떨어지는 것만을 막기 위해 약간 비스듬히 움직여 황보진의 품속으로 뛰어들었고 그것을 본 황보진은 급히 초식을 바꾸어 왼손으로는 가장 빠르게 사용할 수 있는 초식인 쾌활삼십권의 오수퇴몽(午睡退夢)의 초식을 쳐냈다.
타닥.
그의 왼손이 진태백의 몸에 닿기도 전에 진태백은 오른손을 활짝 펼쳐 그의 왼손을 바깥으로 밀어내고 왼발로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황보진은 통증이 상당한 듯 얼굴을 찌푸렸으나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고 천왕삼권 중의 천왕정천(天王頂天)의 초식을 내찔렀다.
“흡!”
진태백은 자세가 무너질 줄 알았던 황보진이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주먹을 뻗어오자 그 즉시 훌쩍 뒤로 물러났고 황보진은 그가 물러서자 기회를 놓치기 싫은 듯 주먹을 내뻗은 기세를 타고 공중으로 떠올랐다. 뒤로 물러선 진태백은 공중에 떠오른 황보진의 공격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그가 주먹을 뻗는 것과 동시에 금강벽의 발차기 기술인 작열포(灼熱暴)를 날렸다.
펑!
황보진의 권력(拳力)과 진태백이 날린 경기(勁氣)가 부딪치자 폭음이 터져 나왔다. 황보진은 공중에서 공중제비를 한번 넘은 다음 땅에 착지했으나 진태백이 날린 기운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하고 세 걸음 정도를 물러난 반면, 진태백은 발을 떼지 않은 채 한걸음 정도 뒤로 밀려나 있었다. 그것으로 둘 중 누가 우세했는지 확연히 드러났다. 황보진은 공중에서 진태백을 공격했고 진태백은 땅에서 공격했으니 황보진이 유리한 조건을 갖춘 셈이었지만 황보진은 세 걸음을, 진태백은 한걸음 정도 밀려났으니 누가 봐도 진태백이 우세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정말 대단하오! 진형.”
“황보형의 마지막 초식도 매우 좋았소.”
“이번엔 내가졌지만 다음에는 지지 않을 것이오.”
황보진은 못내 분한 듯 말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땀과 함께 기분 좋은 웃음이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통쾌하게 싸워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그저 그런 비무만 해왔던 그에게 있어 진태백과의 겨룸은 분명 기분 좋은 일이었다.
“덕분에 요즘 고민하던 것에 대해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소. 고맙소, 황보형.”
진태백은 황보진을 향해 포권하며 말했고 황보진은 궁금한 듯 진태백에게 물었다.
“고민이라……. 폐가 되지 않는다면 물어도 되겠소?”
황보진의 물음에 진태백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공(無空)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오.”
“무공?”
“시간이 늦었군. 이만 들어가 보겠소.”
“아, 즐거웠소. 내일 봅시다.”
진태백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숙소로 돌아갔고 황보진은 잠시 진태백이 말한 무공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하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황보진은 잠에서 깨자마자 의관을 정제한 후 조부인 황보태에게 찾아갔다.
“조부님, 소손 진이 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허허, 우리 손자가 무슨 일로 이 할아비를 찾아왔는고?”
황보진은 간단한 문안을 드리고 자리에 앉아 황보태가 따라주는 차를 한잔 마시며 용건을 말했다.
“어제 진형과 무공을 겨루어 보았습니다.”
“!”
황보태의 눈이 커졌다. 아비인 황보광 조차 만만치 않은 상대로 인정한 진태백과 겨루었다고 보기엔 황보진의 상태는 과도할 정도로 정상이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게냐?”
“네, 진형이 사정을 봐준 듯합니다.”
“설마 그의 실력이 너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지는 말거라. 너보다 훨씬 많은 피를 묻힌 사람이다. 네 아비조차도 그와 정식으로 겨루면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것은 이 할아비도 마찬가지고.”
“정말입니까?”
이번에는 황보진이 놀랄 차례였다. 어제 겨루어본 바로는 진태백이 강하기는 하나 전력을 다하면 해볼 만하겠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전보다 경지가 깊어져 훨씬 공력의 수발이 능숙해진 것일 게다. 작년에 그를 보았을 때 이미 네 아비와 호각이었다.”
“…….”
황보진은 할말을 잃었다. 일 년이라는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무공에 있어 일 년은 극히 짧은 시간으로 그 사이에 깨달음을 얻어 경지가 깊어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 아침부터 나를 찾아온 것은 무슨 연유냐?”
황보태가 주의를 환기시키며 말을 꺼내자 황보진은 어제 진태백과의 비무를 그에게 이야기하며 마지막에 진태백이 말했던 무공이라는 말을 전했다. 그런데 황보태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입으로 찻잔을 가져가던 손을 멈추고 반문했다.
“분명 그가 무공이라고 했느냐?”
“틀림없습니다. 소손과 겨루고 난 후 고민에 대한 실마리를 잡았다면서 제게 고맙다고 했습니다.”
“흐음…….”
황보태는 침음성을 삼켰다. 도대체 무공이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권왕이라 불리는 황보태에게 이런 반응을 이끌어낸단 말인가.
“아침을 들고 아범과 함께 그 녀석에게 가보자꾸나.”
“알겠습니다.”
“무공……, 무공이라!”
황보태는 진태백이 말한 무공이라는 단어를 중얼거리며 차를 마셨고 황보진은 자리에서 물러나 황보태의 말을 전하기 위해 황보광에게로 향했다.
진태백은 천천히 주먹을 내질렀다. 주먹이 완전히 뻗어지자 그것은 천천히 거두며 발을 내뻗었다. 압쇄(壓刷)의 수련이었다. 조선에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무시무시한 살기 대신 미미하지만 활기(活氣)가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진태백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급변했다. 지금까지 느껴지던 기운이 그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면 지금은 뭐라 표현할 수가 없는, 마치 무저갱(無底坑)의 끝없는 바닥과도 같은 공(空)이 그에게서 느껴지고 있었다. 그 순간 진태백의 몸이 사라지며 굉음이 들려왔다.
팡!
진태백의 몸이 있던 자리에서 폭발이라고 할 만한 공기의 유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진태백의 몸이 나타났을 때 그의 옷소매는 너덜너덜해져있었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주먹을 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에 타버린 듯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흐음……. 이게 아니야.”
진태백은 뻗었던 주먹을 거두며 중얼거렸다. 황보진과의 비무로 실마리를 잡았다 생각한 무공의 경지는 스승에게 들었고 스스로 체험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무슨 일인 게냐?”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진태백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황급히 달려온 듯한 모습으로 황보태를 비롯한 황보세가의 식솔들이 서있었고 진태백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아마도 아까 주먹을 내질렀을 때 들린 폭음에 놀라 달려온 듯싶었다.
“실마리가 잡혔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닌 모양입니다.”
진태백의 말에 황보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를 향해 말했다.
“일단 들어가자. 너와 이야기할 것이 있으니.”
“그리하시지요. 이쪽으로.”
진태백은 그들을 자신의 숙소로 안내했고 황보태는 다른 사람들은 물린 채 황보광과 황보진만을 대동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방안에 들어선 진태백은 차를 따른 뒤 그들에게 차를 내밀었고 황보태는 자리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마시고선 말을 꺼냈다.
“아까의 폭음은 주먹을 내질러서 낸 소리인 게냐?”
“알고 계셨습니까?”
진태백의 물음에 황보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옷소매가 헤어지고 불에 탄 듯 그을려있어 짐작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다면 네가 내지른 주먹은 분명 백열(白熱)의 경지일터.”
황보태의 말에 황보광과 황보진은 깜짝 놀랐다. 백열의 경지라 함은 주먹을 내지르는 속도가 공기와 마찰하여 불이 붙을 정도로 빠른 주먹을 말함이 아닌가. 그것은 권법을 수련하는 권사(拳士)에게 있어서 신검합일과 동일하거나 그 이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절정경지였다. 고작 약관에 불과한 진태백이 그런 경지라고 하니 놀라지 않으려야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을 중원에서는 백열의 경지라고 이르는가 보군요.”
“그렇다. 나 또한 몇 년 전에서야 겨우 그 경지에 이르렀다. 허허, 너를 보니 구주구왕 중의 권왕이라는 명호를 너한테 넘겨줘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과찬이십니다. 어르신.”
“그런데 어제 진이와 비무를 한 뒤 무공에 대한 실마리를 잡았다고 했다 들었다. 정말로 무공에 대한 실마리를 잡은 것이냐?”
황보태의 말에 황보진은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할아버님, 도대체 그 무공이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이리 동요하십니까?”
“너는 심즉검(心卽劍) 검즉심(劍卽心)이라는 말을 들어보았느냐?”
황보태의 말에 황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검도의 최상승 경지인 심검(心劍)을 일컫는 말이 아닌가. 아무리 권법이 최상승 무공이라고는 하지만 뇌진검법(雷震劍法), 태산십팔반검(泰山十八盤劍), 오대부검(五大夫劍), 쾌활삼(快活三)등의 절정 검공을 보유하고 있기도 한 곳이 바로 황보세가였다.
“그것에 대응하는 권법의 경지가 바로 무공(無空)의 경지이다. 다른 말로는 무공권(無空拳)이라고 하는 경지이기도 하고.”
“!”
황보광과 황보진의 얼굴이 진태백을 향했다. 그들 또한 백열지경(白熱之境)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무공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경지인 백열지경을 넘어선 경지를 진태백이 바라보고 있으니 놀랄만한 일이었다.
“어르신께서는 이미 짐작하신 듯하군요.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무공의 경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느냐?”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경지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말이냐?”
“제 스승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실제로 겪어보기도 했고요.”
“무공권을 체득한 이가 있단 말이냐?”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제 스승님께 들었다고요. 제 스승님께서 바로 무공권을 체득하신 분입니다.”
황보태는 할 말을 잃었다. 드넓은 중원에서도 마지막으로 무공권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백 년 전의 소림승(少林僧)이며 천하제일이라고 불렸던 홍진대선사(弘榛大禪師)뿐이었다. 그런데 중원의 변방, 바다건너 붙어있는 조그만 나라인 조선의 야인(野人)이 무공권을 체득하고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 어떠했는가. 무공에 이른 사람의 권법은?”
할 말을 잃은 황보태를 대신하여 황보광이 물었고 진태백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무담선생과 비무를 했을 때 그가 내지른 주먹은 진태백의 인지를 넘어선 무엇인가가 있었다. 얼굴을 치겠다고 해서 얼굴을 막으려고 하면 그 전에 이미 무담선생의 주먹이 자신의 코끝에 닿아있었고 발차기로 대퇴부를 차겠다고 말해 뒤로 물러서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무담선생의 발은 그의 대퇴부에 닿아있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습니다. 움직인다고 인지할 수가 없으니까요.”
“인지할 수가 없다?”
“그렇습니다.”
“말 그대로 심검과 동일한 경지로구나. 모용대협의 검이 그렇다고 들었다. 그가 검을 휘두르면 곁에 서있던 사람들도 인지하지 못하고 그가 검을 언제 빼들었는지 조차도 모른다고 하니…….”
황보태의 말은 자조(自嘲)와도 같았다. 백열지경에 이르러 천하에 자신과 주먹을 겨룰 이가 없다고 생각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좌정관천(坐井觀天)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스스로가 얼마나 오만해 있었는가를 안 것이다.
“내일부터 폐관에 들겠다.”
황보태의 말이었다. 진태백의 말에 자극을 받은 것이 분명했고 오랜만에 그의 눈에는 열정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버님……. 알겠습니다. 세가 내의 일은 저에게 맡기시고 대공(大功)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고맙네, 가주. 그리고 진가, 네게도 고맙다는 말을 하마. 내가 얼마나 나태해져 있었는지 깨달았다. 진보가 없는 순간부터 무인은 퇴보하는 법. 정말 고맙구나.”
“제가 말씀을 드렸다 해도 어르신의 의지가 없다면 의미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황보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환갑을 넘은 그의 몸에서는 거침없는 패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가 폐관을 깨고 나오는 날. 중원은 또 한명의 무공에 이른 고수를 보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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