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북여로(湖北旅路)-1
영웅대회는 정사연합체의 탄생을 선포하고 성황리에 끝났다. 사람들은 각 지단별로 갈라져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먼저 출발하기도 하고 준비를 갖추는 등 분주한 모습이었다. 다만 수뇌부만 정해지고 세부 사항은 군웅들에게 맡기는 바람에 어수선한 분위기는 어쩔 수가 없었다. 또한 지단이라고 해도 이름만 지단이지 실상은 수십, 수백 개의 소규모 단체가 난립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인지라 결국 각 지단주들은 서로 갈라져서 출발하되 합류지점을 정해 모두 합류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영웅대회가 끝난 다음날 소림사에 모인 군웅들의 절반 이상이 소림사를 떠났고 남아있는 것은 구파일방 등 거대문파의 사람들 정도였다.
“흐음…….”
진태백은 소림사의 경내를 걸으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영웅대회가 끝난 소림사는 워낙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기 때문인지 휑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고 진태백의 명성은 아직 다른 사람들이 신경을 쓸 정도로 높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사천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남북쌍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호북성과 감숙성으로 가야할지가 문제였다. 남두권 포숙의 고향은 호북성 당양이니 소림사에서 먼 거리가 아니었지만 북두검 한결의 고향은 감숙성 농서였다. 소림사에서 아무리 빨라도 한 달은 걸릴 거리이니 진태백이 고민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휘익!
그때 진태백을 향해 무언가가 날아왔고 진태백은 손을 뻗어 날아오는 물건을 덥석 잡아챘다. 날아온 물건은 빨갛게 잘 익은 사과 한 알이었고 사과가 날아온 방향을 보자 그곳에는 오륜교의 집법사자인 풍래소가 얼굴에 웃음을 띤 채 서있었다. 영문을 몰라 뚱한 표정으로 서있는 진태백을 한동안 쳐다보던 풍래소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에게 다가왔다.
“하하하, 역시 범상치 않은 사람이군. 나를 마주하고서도 흔들리지 않다니 말이야.”
“용건이 있습니까?”
사실 진태백은 풍래소에 대한 첫인상이 좋지 않았다. 물론 자신이 속한 집단을 함부로 매도한다면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손을 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가 격산타우의 수법을 사용해 현공대사에게 사람을 집어던졌다는 것 또한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용건이라……, 난 그저 발도의 승부에서 도왕을 이겼다는 젊은 영웅을 보고자 왔을 뿐이라네. 정사를 떠나서 자네의 행동은 참으로 통쾌한 일이었지. 군자연(君子然)하는 정파의 가면을 부숴버린 느낌이랄까. 아, 사과는 먹도록 하게. 맛있을게야.”
진태백은 손에 쥔 사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옷에 두어 번 쓱쓱 문지른 다음 입으로 가져갔다. 풍래소의 말처럼 사과는 아주 달고 맛있었고 선 자리에서 진태백이 주저 없이 사과를 먹어 치우는 것을 본 풍래소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내 평생 내가 건넨 음식을 자네처럼 주저 없이 먹어버리는 사람은 처음 보는군. 아주 맘에 들어.”
“잘 먹었습니다. 용건이 없다면 이만 실례하지요.”
진태백이 무덤덤한 말투로 답한 다음 몸을 돌리려하자 풍래소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아직 순진하군. 상대가 주는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먹다니 말이야.”
그의 말에 걸음을 옮기려던 진태백의 몸이 멈칫했고 풍래소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걱정말게. 아무리 내가 안하무인이라도 감히 소림사에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는 일이지.”
“나와 싸우고 싶은 것입니까?”
진태백의 어조가 차가워졌지만 풍래소는 얼굴의 웃음을 지우지 않고 말했다.
“천만에, 내 비록 세상에 무서울 것 없는 사람이라지만 남북쌍두를 단신으로 격파한 자네에게는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할 수는 없네. 나는 그저 자네와 이야기를 나누고자 온 것일 뿐. 그 이외에는 성녀께서도 허락지 않으실 것이네.”
진태백은 풍래소의 말속에서 오륜교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풍래소는 경험이 많은 노회한 사람이었으나 자기도 모르게 성녀를 언급함으로써 자신이 진태백을 찾아온 것이 개인의 호기심뿐만 아니라 오륜교의 누군가가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이미 진태백이 허창에서 명옥육가인의 성휘연과 장세지를 제압한 것은 소문이 퍼져있었고 그 소문이 오륜교의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분명 그날 밤 성휘연은 자신의 입으로 명옥궁의 가장 큰 적이 마교, 즉 오륜교라는 것을 언급했으니 명옥궁과 오륜교는 원수지간일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상황에서 명옥궁과 이미 좋지 못한 일을 겪은 진태백에게 오륜교측에서 관심을 두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뭐니 뭐니 해도 진태백은 강호의 젊은 층에서 중협의 손자인 모용천을 제외하고는 가장 큰 화두로 떠오른 사람이었고 뭣보다 속해있는 집단이 없다는 것이 큰 매력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내게 관심이 있다면 당사자가 찾아오라고 하십시오. 나는 숨지도 도망치지도 않을 것이니. 하지만 이런 식으로 떠보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랍니다. 다음에도 이런 행동을 한다면 귀교와 나는 적이오.”
진태백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 몸을 돌렸고 풍래소는 그런 진태백의 모습을 흥미로운 듯 바라보다가 뒤에 누군가 나타난 것을 알아채고는 말을 꺼냈다.
“어떻습니까.”
“과연, 이라고 할까요. 풍사자의 낙백인(落魄引)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다니 말이에요.”
“성녀께선 어찌하실 생각하실 생각이십니까?”
풍래소의 뒤에 나타난 사람은 바로 오륜교의 성녀였다. 머리에 죽립을 쓰고 죽립에 검은 면사가 둘러져 있어 얼굴은 전혀 볼 수가 없었으나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뒤흔드는 힘이 있었다.
“정체를 숨기고 그와 동행해볼 생각이에요.”
“그가 알아차리지 않겠습니까?”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오륜여(五輪轝)에서 흘러나온 내 목소리예요. 뿐만 아니라 그때는 공력으로 변성(變聲)을 했으니 알아차릴 수는 없을 거예요.”
“그래도 알아본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때는 그를 인정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그는 잘만 사용하면 명옥궁에 치명타를 줄 수 있는 강력한 패가 되어줄 것입니다. 호위를 맡을 사람의 선별은 풍사자에게 맡기겠습니다.”
“성녀의 말씀 받자와 봉행하겠습니다.”
진태백은 소림사에서 내려와 현공대사의 암자에 들렀다. 자신의 무력엔 자신이 있었으나 현 강호의 정세에는 그다지 밝지 못했으므로 현공대사의 조언을 듣고자 함이었다. 현공대사는 영웅대회가 끝나자마자 번잡한 것은 딱 질색이라며 소림사의 산문을 박차고 나와 암자로 되돌아 와버렸고 덕분에 소림승들은 한바탕 소란을 겪었다. 특히나 운자배의 승려들은 자신들이 현공대사에게 무언가 결례를 저지른 것이 아닌가하고 뒤쫓아 갔다가 현공대사에게 한바탕 호통을 듣고 돌아와야 했다. 팔대세가의 사람들과 함께 있다가 그 일을 들은 진태백은 그저 현공대사답다고 생각하며 웃음을 지었을 뿐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아 많은 이들을 궁금증에 빠뜨렸었다.
“대사님, 계십니까?”
“오오, 진소협 왔구먼. 어서 들어오게나.”
진태백을 반기는 현공대사의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비록 번잡함이 싫어 소림사에도 기거하지 않는다지만 마음이 통하는 지기의 방문은 언제나 즐거운 법이듯, 현공대사는 진태백이라는 젊은 지기와의 만남을 진정으로 즐겁게 여기고 있었다. 암자는 진태백이 처음 방문했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낡은 서탁과 다구(茶具),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자루 몇 개. 그것이 이 노승이 가진 전부였다.
“길을 떠나기 전에 인사를 드리고자 왔습니다.”
“그랬군. 행로는 정한 것인가?”
현공대사는 진태백이 찾아올 것을 짐작이라도 한 듯 불에 올려둔 주전자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려오자 찻잎을 한줌 넣은 찻잔에 물을 부어 진태백에게 건넸고 진태백은 그것을 받아 차를 한 모금 마신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인의 유해(遺骸)를 고향이 아닌 곳에서 계속 떠돌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닌 듯하여 먼저 그쪽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진태백의 말에 현공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진태백과 남북쌍두간의 사투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었고 진태백의 그들의 유해를 수습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좋은 생각일세. 설령 적으로 만났다 하나 그 두 사람 또한 무림의 고수였으니 그에 맞는 예는 갖추어야겠지. 특히 포숙, 그 사람은 말이야.”
“포노인과 안면이 있으십니까?”
진태백의 물음에 현공대사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벌써 수십 년도 전의 일이지. 그는 젊은 층에서 권법의 제일인자 소리를 듣는 사람이었고 노납 또한 남과 겨루어본 적은 없었으나 소림의 제자였던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소문이 퍼져있었던 게야. 한데 포숙 그 사람이 어찌된 영문인지 나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찾아왔더란 말일세. 나는 불법(佛法)의 수련 과정으로 무예를 익혔기 때문에 비무를 청하는 그의 요구를 한사코 거절했지만 그 사람의 집념은 참으로 집요했네. 결국은 노납이 그의 집념에 지고 말았고 우리는 십초의 대결을 벌이기로 했지.”
진태백은 묵묵히 현공대사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평생 남과 단 한 번도 겨루어본 적이 없다는 현공대사가 사실은 평생에 단 한번 포숙과 겨루었다는 것은 강호상에서 본인들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다만 나는 그를 공격할 생각이 전혀 없었네. 포숙 또한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사생결단 대신 초술로만 대결하자고 말을 꺼냈고 나 또한 그것이 서로간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지.”
현공대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찻잔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는 현공대사의 눈에는 후회와 함께 진한 아쉬움이 담겨있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비무의 결과는 노납의 승리였다네. 포숙의 낙성권은 그야말로 강호일절이었지만 당시의 노납은 금강부동신법(金剛不動身法)에 입문하여 상당한 성취를 이루고 있었네. 그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포숙의 낙성권이 아직 절정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는지는 노납도 모르겠지만 포숙의 주먹은 노납에게 단 한 번도 닿지 못했고 십초의 초식을 썼음에도 노납에게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한 그는 자신이 패했음을 인정하고는 노납을 능가했다는 자신을 얻기 전까지는 다시는 하남 땅에 발을 디디지 않겠다고 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을 내려가 버렸지.
후에 그가 북두검 한결과 짝을 지어 남북쌍두라는 이름을 얻었음에도 단 한 번도 노납을 찾아오지 않았다네. 뿐만 아니라 그가 호결원이라는 곳에 소속되어 좋지 못한 일을 한다는 것을 들었을 때는 참으로 애석했었다네. 당시의 노납이 조금만 더 현명했다면 그의 이름은 살성(殺星)이 아니라 대협(大俠)으로 알려졌을지도 모를 일이지. 아마 그는 자신의 최후가 그리 좋지 못할 것을 알았는지도 모르겠군.”
“포노인도 대사의 마음을 알았으니 조금은 편히 눈감을 수 있을 것 입니다.”
진태백의 말에 현공대사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그리된다면 좋은 일이지. 좋은 일이고말고.”
- 작가의말
돌아왔습니다!!!
왜 이제야 온거냐고 말씀하신다면 몸이 좀 아팠습니다.
결석에 감기에...........ㅜㅜ;;;
이제부터 조금 달려볼까 합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ps 추천과 댓글은 필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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