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살자재(活殺自在)-2
진태백은 동수진인이 제의한 비무에 응하기로 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공동파내로 퍼졌다. 도사들마다 제자들을 부르고 연무장을 치우는 등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진태백과 공동파의 수뇌들은 조금 한적한 방으로 자리를 옮겨 차를 마시고 있었다.
“드시게. 복건(福建)의 명차(名茶)인 백호은침(白毫銀鍼)일세.”
“잘 마시겠습니다.”
진태백은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풍부한 맛과 그 뒤에서 느껴지는 담미(淡味)가 아주 좋은 느낌이었다.
“한데, 많은 사람들이 자네의 재주를 볼 것인데 괜찮겠는가?”
즉흥적인 제안이었지만 실상 동수진인의 비무제안은 상당히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실전에서 싸우는 경우가 아니라면 자파비전의 유출을 막기 위해 가급적 자제하는 편이었다. 또한 사용하는 무공 또한 잘 알려진 무공을 사용하려 해서 실제 진산절기를 구경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같이 어려운 일이었다. 때문에 각 문파들은 새로운 절기를 만들어 내는 것뿐만 아니라 이미 알려진 무공을 보완하는데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이기는 것이지, 초식이 사람을 이기는 것은 아니지요.”
진태백의 그 말에 동수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각파의 진산절기를 전수할 때 세심하게 사람을 가리는 이유는 초식의 위력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습득하고 펼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도 한몫하고 있었다. 물론 진산절기로 일컬어지는 무공들은 매우 뛰어난 위력을 가지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일단 기초가 탄탄해야 하고 운기토납을 통한 내공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함부로 무공을 익혔다가는 오히려 자신의 몸이 상하게 되고 본래의 위력을 발휘할 수도 없는 것이다. 고수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는 어린아이가 들고 있는 명검보다 낫다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듯 같은 초식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서 그 궤를 달리하게 되는 이치였다. 더군다나 금강벽은 유형임에도 무형인 무예, 비무로 그 형(形)을 보인다 해도 진태백을 능가하는 고수가 아닌 이상은 쉽게 약점을 찔릴 리가 없었다.
“장문인, 대연무장의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방문 밖에서 비무 준비가 끝났음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동수진인은 남아있는 차를 들이키며 말했다.
“자, 가보세나.”
공동파의 연무장은 매우 고풍스러웠다. 값비싼 청석이나 특이한 부분은 없었지만 여기저기 나있는 칼자국이라던지 보법을 연습하느라 파인 돌바닥은 공동파가 지닌 유구한 역사를 몸소 보여주고 있었고 진태백과의 비무를 위해 그의 맞은편에 서있는 공동파 제자들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도를 흘리고 있어 과연 명문대파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인마, 태백아!”
어느새 왔는지 박대용이 진태백을 향해 손짓을 하며 그를 불렀고 진태백은 박대용에게 다가가 말했다.
“언제 온거냐?”
“언제오기는, 사부영감이 너랑 일대제자들 비무하는 거 보러 오라고 사람을 보냈더라.”
아마도 광천진인의 배려였을 것이다. 아무리 가장 친한 벗이 있는 곳이라 하더라도 진태백의 입장에서 공동파는 타지(他地)임에는 틀림없었고 그런 상황에는 아무리 담대한 사람이라도 제 실력을 드러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때문에 사람을 보내 박대용을 불러온 듯싶었다. 진태백이 시선을 돌려 공동오로의 자리를 보자 광천진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고 진태백은 가벼운 목례로 그의 배려에 감사를 보냈다.
“그런데 괜찮겠냐? 내 사문의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진짜로 만만찮은 사람들도 있는데.”
“죽기 살기로 목숨을 걸고 싸우자는 것도 아닌데 괜찮겠지. 네 사부님 수준만 아니면 괜찮을 거다.”
진태백의 말에 박대용은 씨익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박대용도 귀가 있는지라 진태백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했을 리 없었고 소문의 절반만 사실이어도 구파일방의 일좌(一座)를 차지하고 있는 공동파의 일대제자들이라지만 옷깃도 건드려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몸조심해라.”
“그래.”
진태백은 겉옷을 벗어둔 다음 연무대에 올라섰다. 그리고 나서는 주변을 둘러본 뒤 포권을 취하며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귀파 장문이신 동수진인의 배려로 여러 도사님들과 논검을 하게 된 진태백이라 합니다. 어느 분께서 먼저 가르침을 주시겠소?”
진태백의 말에 일대제자들의 얼굴이 동수진인을 향했고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정렬해 있던 일대제자들이 일제히 자리에 착석했다. 그 중 팔이 유난히 길고 하관이 쭉 빠진 도사 한명이 연무대에 올라와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고송진인(古松眞人)의 제자, 청보(靑寶)라 합니다. 한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그는 공동오로의 막내인 고송진인의 제자였다. 고송진인은 공동파에서 검의 일인자로 이름 높았는데 근 백여년 내에 유일하게 복마검법(伏魔劍法)을 십이성 대성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공동파는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뛰어난 검법을 많이 보유하고 있지만 모두 복마검법만큼 유명하지는 않았다. 공동파에 갓 입문한 제자가 배우는 검법도 복마검법이고 오랜 세월 무공을 연마한 도사가 펼치는 것도 복마검법이지만 십이성으로 대성한 복마검법은 공동의 그 어떤 검법도 따르지 못하는 최강의 검법이었다. 그런 고송진인의 제자라면 분명히 검에 대한 조예가 깊을 것이었고 진태백은 이미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그의 무형기(無形氣)에 청보의 수양이 얕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선공은 청보였다. 예전초식인 태상연화(太常蓮花)을 펼쳐 예의를 갖춘 그는 대뜸 복마검법의 소양탁류(掃陽濁流)를 펼쳐 진태백을 찔러왔고 진태백은 그의 미간을 향해 날아드는 검극을 손등으로 밀어내며 소엽퇴(掃葉腿)의 수법으로 청보의 아랫도리를 걷어찼다. 청보는 그런 진태백의 공격을 예상한 듯 뒤로 훌쩍 물러서며 평전무여(平前無慮)의 수법으로 검을 휘둘러 그의 접근을 막았다.
“호오, 청보의 검술이 많이 늘었군. 사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진태백과 청보의 비무를 지켜보던 명신진인이 고송진인에게 물었고 고송진인은 흡족한 듯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직 멀었지만······, 제법 수련을 한 티가 납니다.”
스스로 도달해있는 검경(劍境)만큼이나 칭찬에 박한 그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청보의 수련을 인정한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청보가 보인 한수는 복마검과 공동의 또 다른 절기인 소양검(少陽劍)의 초식을 절묘하게 배합한 것으로 두 검법에 어지간히 능통하지 않고는 보일 수 없는 수법이었다.
진태백은 전신의 요혈을 찔러오는 청보의 검극을 피하며 점점 그와의 간격을 좁히고 있었다. 주먹과 검의 간격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고수들 간의 싸움에서 간격이라는 것은 그저 팔다리의 길이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공격을 차단하고 자신의 공격을 성공시키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쉬익!
가볍게 뻗은 진태백의 주먹이 청보의 얼굴을 스쳤다. 어느 샌가 주먹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간격에 청보는 대경하여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진태백은 마치 그림자처럼 그에게 달라붙었다. 청보가 진태백을 떼어놓기 위해 검을 휘두른 순간 진태백의 손이 움직였고 청보의 오른손이 봉쇄당하며 진태백의 다리가 그의 목을 감았다. 그와 함께 진태백이 몸을 빙글 돌리자 그의 다리에 목을 잡힌 청보도 공중에서 빙글 돌아 땅바닥에 드러눕고 말았다. 청보가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진태백의 주먹이 그의 이마에 닿아있었고 청보는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패배를 인정하시겠습니까?”
진태백의 말에 청보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의 다리가 목을 휘감았을 때 청보는 이미 진 상황이었다. 상대에게 목을 붙잡히는 것은 신체의 자유를 빼앗기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육박전으로 상대방의 구속을 풀 수밖에 없는데 청보의 백타(白打)는 진태백에 비하면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진태백이 구속된 그의 사지를 풀어주고 일으키자 청보는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저의 검은 진소협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청보의 정중한 말에 진태백도 마주 포권을 하며 예를 갖추었고 두 사람의 깔끔한 비무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청보가 연무대에서 내려오자 또 다른 도사가 경신법을 뽐내며 연무대 위에 올랐다.
“본인은 풍양진인(楓亮眞人)의 제자인 건하(乾廈)라 하오. 진소협께 한수 청하겠소.”
풍양진인은 공동오로의 넷째로 공동파 장법(掌法)의 일인자였다. 그의 장법은 구주구왕의 범천왕(梵天王)인 일장단악(一掌斷岳) 포문정(包文正)과 비견될 정도로 그가 조금만 호승심을 가졌다면 구주구왕의 자리를 가졌을 것이라는 것이 강호의 평가였다. 그러나 그는 유독 싸움을 싫어했고 반드시 싸워야 할 때는 가급적 상대를 다치게 하는 것을 삼갔기 때문에 혹자는 그를 무무진인(無武眞人)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그 제자인 건하는 달랐다. 공동파 내에서도 유독 호승심이 강했고 유난히 거만한 천성 때문에 크고 작은 문제를 자주 일으켰다. 뛰어난 무재가 아니었다면 예저녁에 쫓겨났을 테지만 일대제자 중 손꼽히는 무위 덕에 그의 자리는 흔들리지 않고 있었지만 사부인 풍양진인도 그다지 탐탁찮아하고 있었다. 늘 좀 더 겸손하라고 풍양진인이 가르치고는 있었지만 쉽게 고쳐지지를 않고 있었다.
사실 이번에도 건하는 새로 익힌 장법을 수련하기 위해 두문불출하고 있었으나 풍양진인이 억지로 끌어내어 진태백 앞에 세운 것이었다. 그의 심성을 고치기 위해서는 충격요법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풍양진인이 같은 연배임에도 이미 훨씬 뛰어난 성취를 이루고 있는 진태백을 상대로 철저히 깨져보라는 심정으로 내보낸 것이다.
건하는 예전초식인 헌단노군(獻丹老君)의 자세를 취했고 진태백은 한손은 쭉 내밀어 건하를 겨누었다. 특별한 자세도 취하지 않는 그 모습에 자존심이 상한 듯 건하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그는 처음부터 공동파의 절기인 통천장(通天掌)을 펼쳤다.
공동파의 무공은 도가문파 답지 않게 강맹하고 직선적인 것이 특징인데, 통천장은 마치 그런 공동파 무공을 대변하듯 강맹하기 이를 데 없는 무공이었다.
쉬이익.
막강한 경력을 품은 장력이 진태백을 엄습했지만 그는 옆으로 한걸음 옮기는 것만으로 건하가 날려 보낸 장력을 흘려낸 뒤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한걸음에 상대에게 접근하는 부동명왕보가 공동파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그 광경에 동수진인은 물론 공동오로를 비롯해 연무장에 모인 모든 이들의 눈이 커졌다.
“저 보법은!”
마고일장을 연상시키는 그 모습에 가장 놀란 것은 건하였다. 일장이 넘는 거리를 한걸음에 좁히는 보법은 자신이 알기로도 단 한가지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코앞으로 다가온 진태백을 떨쳐내기 위해 통천장의 환주탁생(還住托生)의 수법으로 진태백의 가슴을 갈겼다. 그러나 진태백은 처음 그의 장력을 피했던 것처럼 옆으로 한걸음을 옮겨 그의 공격을 피해냈고 손날 끝을 그의 이마에 갖다 댔다.
“이익!”
건하는 거칠게 이마에 닿아있는 진태백의 손끝을 쳐내며 상박복마(相撲伏魔)의 수법으로 진태백을 공격했으나 그 공격은 진태백에게 닿지도 못했다. 아무렇게나 걷는 듯 보이는 진태백의 발걸음은 건하가 펼치는 장력의 틈새를 절묘하게 파고들었고 건하는 자신이 진태백이 없는 곳만 공격하는 듯한 착각마저 느꼈다.
“정정당당히 승부하라!”
분에 못이긴 건하가 외치자 진태백은 뒤로 훌쩍 물러나더니 입을 열었다.
“경신술에 자신이 있는 것 같아 경신술로 상대했는데 뭐가 불만인거요?”
“뭐?”
“연무대에 올라올 때 한껏 경신술을 뽐내기에 제일 자신 있는 것이 경신술인 줄 알았소만?”
“웃기지 마라! 내가 가장 자신 있는 것은 장법이다! 정면으로 맞붙지 않고 도망만 칠 생각이냐?”
진태백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아마도 동수진인은 이렇게 아집에 빠져있는 제자들의 눈을 틔워 주기 위해 자신에게 비무를 제안한 것이 분명했다. 이미 동수진인의 부탁에 응한 이상 그에 부응하지 않으면 그것도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진태백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물으리다. 무(武)란 무엇이오?”
- 작가의말
절!단!신!공!
다음 편은 조금 빨리 올라올겁니다.
재밌게 읽어주세요.
ps. 추천과 댓글은 필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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