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양혈투(當陽血鬪)-1
휘익!
파공성을 듣고 급히 머리를 숙인 진태백의 머리 위로 법왕사제 중 셋째인 호상직(胡相直)의 검이 스치고 지나갔다. 무려 삼십 명이나 되는 고수들을 쓰러뜨리고 가장 강한 넷과의 결전을 치르는 진태백의 움직임은 체력의 소모 탓인지 한 박자 느렸고 그 때문에 입지 않을 부상까지 입고 있었다.
“탓!”
진태백은 기합을 지르며 자신의 뒤를 향해 작열포를 날렸다. 작열포는 발차기와 함께 충격파가 뒤따르는 것으로 보통 발차기는 피하더라도 충격파로 인해 타격은 입지 않더라도 상대를 주춤거리게 하는 효과는 있었다. 하지만 법왕사제의 둘째인 곡령봉(曲靈峰)은 충격파의 범위를 손쉽게 벗어나며 손에 들고 있던 대도(大刀)를 휘둘렀고 진태백은 뻗은 다리를 거둘 틈도 없이 공중으로 몸을 띄워 빙글빙글 돌아 착지했다. 그런 모습을 본 법왕사제의 맏이인 조무웅(趙武雄)은 질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대의 실력은 우리를 놀라게 하는군.”
진태백은 온몸 여기저기에 자잘한 상처를 입고 있었고 땀에 젖어있었지만 그 눈빛만은 형형히 살아있었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쉰 다음 말했다.
“당신들은……, 내 경고를 귓등으로 흘려들은 모양이군.”
진태백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법왕사제들은 자신들을 옥죄어오는 살기에 숨쉬기조차 힘들어지는 것을 느꼈고 그때 진태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르륵.
진태백은 당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서서 포숙의 유골을 바람에 태워 날려 보내고 있었다. 인생의 마지막에 적수로 만나 스스로 생을 끊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포숙의 유골을 그의 고향인 당양에 뿌리는 것은 진태백에게 복잡한 상념을 전해주었다.
“내세에서나마 바라던 바를 이룰 수 있기를 빌겠소.”
진태백은 포숙의 유골 중 마지막 한줌은 당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묻은 다음 미리 준비해온 목비(木碑)를 세웠다.
南斗拳 包肅之墓 朋友 眞太白 立
목비에 새겨진 말은 오직 이 열세개의 글자뿐이었다. 진태백은 쓸데없는 미사여구를 붙이는 것을 싫어하는 성품이었지만 평생을 외롭게 살아온 노인의 마지막을 지켜보았고 약간이나마 그의 마음을 헤아린 사람으로서 벗이라는 말을 목비에 새겨놓았던 것이다.
“이런, 제갈형이 기다리겠군. 잘 있으시오 포노인. 한노인의 유골도 고향에 뿌려주고 언젠가 자리를 잡는다면, 꼭 찾아오리다.”
진태백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언덕을 내려갔다. 다른 어떤 것보다 포숙에 대한 신의를 지켰다는 것이 그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주었다.
“포대협의 장례는 잘 치렀소?”
제갈정은 당양에 제갈세가에서 세운 객잔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거대한 가문인 만큼 제갈세가의 사업은 여러 개가 있었는데 그 중 호북성 북부에 걸친 많은 수의 객잔들이 제갈세가와 연결이 되어있거나 직접 투자한 객잔들이 많이 있었다.
“덕분에 고인을 잘 모셨소. 고맙소이다.”
“포대협이라면 강호의 명숙이지 않으셨소. 그런 분을 보내는 길에 같이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그분이 진형 외에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장례를 치르는 것을 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소.”
제갈정은 찻잔에 차를 따라 진태백에게 건네주며 말했고 그는 차의 향기를 한껏 들이키며 눈을 감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양을 좀 둘러볼 생각이오?”
“그리할 생각이오.”
“안내할 사람을 붙여주는 것이 좋겠소?”
제갈정의 말에 진태백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객잔의 위치는 기억했으니 길을 잃지는 않을 거요. 제갈형도 일이 많은 모양인데 폐를 끼칠 수는 없지 않겠소. 혼자 다녀오리다.”
“폐라고까지 할 게 있겠소. 조심해서 다녀오시오.”
진태백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객잔을 나섰다. 진태백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제갈정의 뒤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다가와 그에게 말했다.
“제 존재를 알아챈 것 같습니다만.”
“진형은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설령 말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생각을 이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복룡대(伏龍隊)에서 알아낸 것을 알려주십시오.”
그 무렵, 법왕사제는 진태백의 행적을 쫓아 당양에 도착해있었고 진태백에 대한 정보수집에 여념이 없었다.
“분광발도는?”
“포숙의 유골을 뿌린 뒤 제갈세가의 소가주를 만났습니다만 곧 그와 떨어져서 당양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흐음, 둔한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을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군.”
법왕사제의 첫째인 조무웅은 대사형답게 생각이 깊고 진중한 인물이었다. 별호는 쌍룡수사(雙龍秀士)로 법왕사제 중에서도 금륜법왕의 절기인 용형륜(龍形輪)을 익힌 유일한 인물이었다. 법왕사제는 하나같이 개성이 강하고 독불장군식의 인물들이었지만 단 두 사람, 스승인 금륜법왕과 대사형인 조무웅에게만은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따르고 있었으니 조무웅의 통솔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알기 힘든 인물이군요.”
둘째인 곡령봉의 말에 조무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곡령봉은 법왕사제 중 유일한 여성으로 여성으로서는 특이하게도 중도(重刀)를 다루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무기와는 달리 그녀는 재색을 겸비한 미녀로 오륜교내에서 이름 높았고 중원에 출두해서도 이름난 도객 몇몇을 꺾어 미봉선자(美鳳仙子)라는 별호를 얻었다.
“사저의 말대로 알기 힘든 인물이라면 일단 붙어보는게 어떻겠습니까.”
막내인 복대성(卜大成)의 말에 셋째인 호상직이 쏘아붙였다.
“어리석은 놈! 알기 힘들다는 것은 그의 실력도 어느 정도의 경지인지 알 수 없다는 소리다. 그런 상대와 붙어서 수하들을 잃는다면 어떻게 할 셈이냐?”
“그, 그것은…….”
호상직은 쾌검의 고수로 복대성이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었다. 복대성은 호상직의 말에 주눅이 들었는지 고개를 푹 숙였고, 호상직 또한 워낙에 냉정하고 과묵한 인물인지라 냉엄한 눈으로 복대성을 쏘아보고 있었다.
“막내를 너무 나무라지 마라. 셋째의 말도 일리가 있고 막내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호상직의 물음에 조무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 조무웅을 보며 복대성은 곡령봉에게 물었다.
“대사형에게 방법이 있을까요?”
“대사형이라면.”
짧은 대답이었지만 복대성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가 아는 한 조무웅은 불가능을 모르는 사람이었고 사저인 곡령봉에게 어울리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상직.”
생각을 마친 듯 조무웅이 호상직을 불렀고 호상직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네, 사형.”
“우리를 따라온 오행기는 몇 명이냐?”
“주화기(朱火旗)에서 열다섯, 백금기(白金旗)에서 열다섯이 따라왔습니다.”
“그들에게 명령을 내려라. 진태백이란 자의 실력을 먼저 시험해 보아야겠다.”
“알겠습니다.”
조무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호상직은 방 밖으로 나갔고 곡령봉은 약간 걱정이 된다는 투로 조무웅에게 말했다.
“진태백이라는 자의 무예는 살기가 강하다고 들었습니다. 쓸데없는 희생이 되지 않을까요?”
“한명이라도 죽이게 된다면 오히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그 정도 수라면 대성도 한명도 죽이지 않고 제압할 수 있는 인원이 아니냐.”
조무웅이 자신을 칭찬하는 말에 복대성의 얼굴은 밝아졌지만 곡령봉의 얼굴엔 오히려 그늘이 졌다. 조무웅은 아직 진태백을 크게 인정하고 있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진태백이 상대한 사람들의 면면을 따지면 오히려 자신들의 격이 부족한 것이다.
‘부디 무사히 끝나기를.’
그런 곡령봉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무웅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진태백은 목적지를 두지 않고 걷고 있었다. 처음에는 관우의 몸이 묻혀있다는 관릉(關陵)에도 가보았으나 특별한 감흥이 없었다. 용맹하고 지략에 밝았으나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 자신의 몸을 해친 관우에 대해서는 단 한줌의 존경심도 느끼지 못했다. 결국 진태백은 객잔에서 간단한 음식과 독하지 않은 술 하나를 산 다음 야트막한 산에 올라 당양의 경치를 구경하기로 했다. 얼마쯤 걷자 이름도 없는 조그만 정자 하나가 나타났고 진태백은 천천히 음식을 먹으며 주위의 경치를 구경했다.
부스럭.
그때 정자의 뒤편에서 조그만 소리가 들려왔고 진태백은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적의(赤衣)를 입은 이들과 백의(白衣)를 입은 이들이 서있었는데 모두 병장기를 지니고 있어 무림인임을 짐작케 했다.
“그대가 분광발도 진태백인가?”
호리병을 들어 술을 마시던 진태백은 그들이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자 안주로 가져온 음식을 하나 집어먹고 나서 그것을 꿀꺽 삼킨 뒤 말했다.
“분광발도는 어쩌다보니 얻은 허명일 뿐이지만 내가 진태백인 것은 맞소. 한 모금 하시겠소?”
진태백은 들고 있던 호리병을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백의인에게 휙 던져주었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좋은 술이로군.”
“아무리 좋은 술인들 벗과 마시는 물에 비하겠소. 하지만 당신들은 내 벗이 되고자 찾아온 이들은 아닌 것 같군.”
“우리가 그대와 벗이 될지 원수가 될지는 그대의 실력에 달렸소.”
백의인의 말에 진태백은 날카로운 눈빛을 발하며 말했다.
“결국, 당신들은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찾아온 것이군.”
“그렇소.”
“얼마 전 소림사에 들렀을 때, 당신들과 같은 이들을 본적이 있소.”
진태백의 말에 백의인들과 적의인들의 몸이 움찔했고 진태백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나, 당신들은 오륜교에서 온 모양이군. 입은 옷을 보니 오행기 중의 주화기와 백금기인 듯 한데 풍래소라는 사람에게 내가 한말이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오?”
“무슨……?”
“다시 한 번 이런 식으로 나를 시험할시 오륜교와 내가 적이 될 것이라는 것!”
쉬익!
진태백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그와 대화를 나누던 백의인의 앞에 나타났다. 이 움직임은 도깨비걸음이라는 금강벽 특유의 경신법(輕身法)으로 이것은 이매(魑鬽)와 망량(魍魎)으로 나뉜다. 이 중 이매는 공격을 위한 경신법으로 상대의 눈을 피해 접근하는 방식이고 망량은 그 어떤 공격이라도 피부에 닿는 순간 피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경신법이었다. 둘 모두 사용할 때 신형이 흐릿해진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망량은 이전에 숭산에서 정청백의 공격을 피하는데 사용했었다.
“으헛!”
백의인은 기겁하여 뒤로 물러섰지만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완전히 근접한 상태에서 사용하는 금강벽 특유의 발차기인 그림자차기가 그의 턱을 올려 찬 것이다.
빡!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백의인의 신형이 하늘로 솟아오르며 입에서 핏물을 뿜어냈다. 그와 동시에 오행기는 진태백을 향해 달려들었고 진태백은 한껏 공력을 일으켜 그들과 맞부딪쳤다.
쉬익!
진태백은 자신의 등을 향해 날아오는 검을 빙글 돌아 피하며 주먹을 내질렀고 미처 그 주먹을 피하지 못한 적의인 한명이 피를 뿜으며 뒤로 넘어갔다. 하지만 그들은 표면적으로 오륜교의 무력을 나타내는 존재였고 지겨울 정도로 집단전(集團戰)을 수련해온 자들이기도 했다. 고작 두 명의 희생만으로 그들은 이미 전열을 갖추고 있었고 창을 든 자들은 진태백의 견제를, 검이나 도를 들고 있는 자들은 직접 진태백을 향해 공격해 들어왔다.
“크윽!”
적의인의 검이 진태백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고 뒤이어 그의 어깨를 향해 백의인이 휘두르는 도가 떨어져 내렸다. 그때 진태백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사라졌다. 망량의 경신법으로 사라진 진태백은 어디론가 사라져있었고 일시적으로 공격대상을 잃은 백의인은 초식을 거두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외쳤다.
“이런!”
그때 진태백은 이미 포위진에서 벗어나 무인금강을 뽑아들고 창을 들고 있던 자들을 모조리 때려눕히고 있었다. 망량으로 일시적으로 포위망을 벗어난 그를 찾는데 소요된 몇초가 그들에게는 치명타로 다가왔고 삼십 명이라는 압도적인 숫자에도 불구하고 이미 진태백에 의해 쓰러진 사람의 수는 열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 작가의말
분량조절에 실패해서 원래는 당양행로 3편이 되어야할 글이 다른 챕터로 전환이 되었습니다.
이번에 추가된 건지 뭔지는 모르지만 이제 독자통계기능도 생겼더군요.
제글은 10대는 거의 없고 거의 20~50대 이상분들이 읽어주시더군요.
어느정도 성숙해있는 글이라는 증거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다음편은 거의 액션이라는 정도?밖에 해드릴 말씀이 없군요.
재밌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ps 추천과 댓글은 필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Comment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