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왕출도(法王出道)-1
콰앙!
금륜법왕이 손을 허공에 휘젓자 네 개나 되는 관뚜껑들이 허공을 날았다. 날아간 관뚜껑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지만 주변에 있는 이들은 단 한 명도 날아간 관뚜껑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이게,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이냐. 어찌하여 너희들이 여기에 누워있는 것이냐!”
금륜법왕의 절규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그러나 그의 물음에 대답할 이들은 관 속에 누워있었고 그 앞에는 법왕사제를 따라 당양으로 갔었던 오행기가 땅바닥에 꿇어 앉아있었다. 그러나 패자는 유구무언, 그들이 법왕을 위로할 방법은 없었다. 주변에 서있는 이들도 말이 없었다. 법왕사제라면 현 강호의 후기지수들 중에서도 최상을 달리는 이들이며 이들 넷이라면 어떤 고수라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으니 그 심정을 어찌 말로 표현하겠는가. 뿐만 아니라 그들의 스승인 금륜법왕은 눈물조차도 흘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 법왕사제는 자식이었다. 중이기 때문에 결혼도 하지 않았고 때문에 가족이 없었다. 법왕사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가 강호를 행도하던 중 우연히 만난 고아들이었고 심지어 막내인 복대성은 돌림병이 돌아 몰살당한 마을에서 어미의 품속에 안겨 있던 것을 데려다 키웠다.
“법왕.”
금륜법왕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교주인 서화담과 성녀인 서영영이 함께 서있었고 그들을 본 금륜법왕은 즉시 입을 열었다.
“말리지 말아주시오.”
“…….”
서화담은 말이 없었다. 교주와 수하이기 이전에 그들은 금란지교(金蘭之交)를 나눈 벗이었고 법왕사제는 서화담 자신에게도 제자나 다름없는 이들이었다. 다는 아니더라도 금륜법왕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녀오시오.”
힘겹게 입에서 흘러나온 서화담의 말은 오히려 금륜법왕에게 의외였다. 아무리 제자들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그의 지위는 호교법왕(護敎法王)이다. 그 위치는 결코 가볍지 않다. 법륜당의 수좌로 오직 교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만 움직이는 그런 위치이다. 한데 서화담은 너무도 쉽게 그의 출도를 허가한 것이다.
“법왕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오. 세상에 어떤 부모가 자식을 잃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겠소. 설령 힘이 부족해 쓰러질지언정 원수를 향해 칼을 휘두르려 하는 것이 당연한 일.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상관없소. 법왕이 복수를 하던 아니면 원수를 무릎 꿇려 데리고 오던 마음대로 하시오.”
“교주의 은혜에 감사드리오.”
금륜법왕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며 서화담을 향해 절을 올렸고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간 법왕이 있었기에 내가 마음대로 외유를 할 수가 있었소. 한데 법왕에게 중대한 일이 생겼음에도 그대의 출도를 막는다면 나는 그야말로 졸렬한 인간일게요. 이번 기회에 강호도 둘러보고 원수도 갚도록 하시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그때 서영영이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고 서화담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미 우리에게 선전포고를 한 녀석이다. 그런데도 그를 설득하려 하느냐?”
서화담의 말에 서영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감(私感)없이 이야기를 해보신다면 두 분께서도 똑같이 느끼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애초부터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또 풍사자의 낙백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낸 사람입니다. 처음부터 그를 시험하려 들지만 않았다면…….”
서영영 또한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서영영에게 있어 곡령봉은 친언니 같은 사람이었고 그녀가 진태백의 손에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을 때는 서영영 또한 슬픔에 눈물 흘렸다. 하지만 오륜교의 성녀라는 직책은 무엇보다도 교의 부흥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진태백이 금륜법왕과 씻을 수 없는 원한을 가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단 한번, 단 한번만 이야기를 해보리다.”
금륜법왕이 쥐어짜내듯 힘겨운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 속에서도 교에 대한 충정을 잊지 않는 그 모습은 교인들에게 벅찬 감정을 느끼게 했다.
“법왕의 행도에 무운을 비옵니다!”
오행기들이 부복하며 큰소리로 외쳤고 다른 이들 또한 땅에 엎드리며 법왕의 행도에 무운을 빌어주었다.
“법왕, 이것을.”
서화담은 품속에서 조그만 패(牌) 하나를 꺼내어 법왕에게 건넸다.
“도움이 될 것이오.”
서화담이 건네준 것은 오륜교에서 교주령인 황룡부(黃龍符) 다음의 권위를 가진 오행령(五行令)이었다. 오행령으로 내려진 명령은 교주 외에는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으며 거역은 오직 죽음뿐인 그야말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물건이었다.
“들으라! 풍운전(風雲殿)은 법왕이 진태백이라는 자를 만날 때까지 그의 행적과 무공을 비롯한 모든 것을 알아내어 나와 법왕에게 전하라! 이는 명옥궁을 상대하는 것보다 우선할 것이다!”
서화담의 말에 주변에 있던 이들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오륜교와 명옥궁은 그야말로 철천지원수로 백년이 넘는 세월동안 피로 피를 씻는 싸움을 해왔던 것이다. 한데 그보다 진태백에 대한 사안을 우선시 하겠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서화담에게는 나름대로의 속내가 있었다.
첫째로는 서영영이 주장한 것과 같이 진태백이 외치(外治)를 담당할 수 있는 인재인지를 알아야 했고 둘째로는 다음대의 오륜교를 이끌어갈 선두주자인 법왕사제를 잃음으로 인해 발생한 손실을 메꿔야 했는데 워낙에 법왕사제가 뛰어나다보니 그에 버금가는 인재가 없었다. 가능하다면 진태백을 오륜교에 입교시켜 다음대의 오륜교를 책임질 무력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짧은 동안의 만남이긴 했지만 서영영의 사람 보는 눈은 교내의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것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안목을 믿고 금륜법왕과 서영영을 동행시켜 제압을 해서라도 진태백을 설득하고자했다.
“교주의 명을 받드옵니다.”
서영영이 서화담의 속내를 짐작한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고 다른 이들도 그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듯 분분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성녀와 법왕은 준비가 되는대로 출발하도록 하시오. 따로 내게 인사할 필요없소.”
서화담은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몸을 돌려 거처로 향했고 사람들은 잠시 웅성거리다 흩어졌다.
호북성 의창에서 사천성 성도까지는 꼬박 이레가 걸리는 뱃길이었다. 진태백은 제갈세가의 도움으로 쉽게 성도로 향하는 배편을 탈 수가 있었고 별다른 일 없이 성도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성도 외곽에 있는 나루터에 배가 닿자 배에서 내린 진태백은 선장을 비롯한 이들에게 인사를 한 후 성도 성문을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휴우……. 배를 오래 타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로구나.”
조선에 있을 무렵 목포진에서 한양까지 갈 때 조운선을 탄 경험이 있긴 했지만 때때로 배에서 내려 땅을 밟을 수 있었던 조선과는 달리 제갈세가에서 내어준 배는 쾌속선의 일종으로 이레 동안 단 한 번도 땅을 밟지 못했기 때문에 피로가 제법 심한 편이었다. 성문 근처의 작은 객잔에 짐을 푼 진태백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상에 앉아 운기에 들어갔다. 명옥육가인과의 만남이후 북명심공의 중요성을 알게 된 진태백은 그 이후 북명심공과 부동명왕공의 합일(合一)을 시도하고 있었고 매일 한 시진 이상을 북명심공과 부동명왕공의 운공에 쏟고 있었다.
운공삼매에 빠져 있던 진태백이 눈을 뜬 것은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 한데 눈을 떴음에도 불구하고 진태백은 가부좌를 튼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표정이 전에 없이 심각한 것으로 보아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음양의 기운이 상반된다고는 하지만 합일하지 못할 바가 아닐 텐데. 어차피 근본이 같으니 합일이 가능할 터.”
진태백의 고민은 바로 북명심공과 부동명왕공의 기운이 상충(相衝)한다는 것이었다. 북명심공의 음기와 부동명왕공의 양기를 중단전에서 합일시키려 할 때마다 온몸의 기혈이 들끓으며 공력이 역류하려 했고 음기는 하단전을 공격하고 양기는 상단전을 공격했기 때문에 그것을 억누르는데 만도 엄청난 심력이 소모되었다.
‘중단전에서 합일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공격한다. 만약 이것을 억누르지 못하면 나는 상반신은 타버리고 하반신은 얼어붙은 기묘한 상태로 죽을 것이 자명한데…….’
진태백은 음기와 양기에 대한 근본적인 사색에 잠겼다. 일원(一元)에서 발현하여 음양이기(陰陽二氣)로 나뉘어 무겁고 차가운 기운은 아래로 향하며 가볍고 뜨거운 기운은 위로 향한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을 이루며 두 기운이 화합할 때 수기(水氣)가 이루어지고 반발할 때 뇌기(雷氣)를 이룬다. 이리하여 건(乾)에서는 양괘(陽卦)인 진감간(震坎艮)이 이루어지고 곤(坤)에서는 음괘(陰卦)인 이태손(離兌巽)이 이루어져 음양팔괘(陰陽八卦)를 이룬다. 이것이 때로는 화합하고 때로는 반발하며 자연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몸은 다르다. 수승화강(水昇火降)이라하여 인간의 몸에서는 음기가 위로, 양기가 아래로 내려가야 건강을 지킬 수 있는데 이 또한 그저 방치하게 되면 양기가 상체로 음기가 하체로 몰려 건강을 해치게 되며 양기가 상체로 향하게 되면 그 강렬한 기운 때문에 성질이 급하고 사나워진다.
‘비록 불가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근본은 상고시대부터 내려온 수련법. 그렇다면 반발이 아니라 화합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 상충하는 기운을 뻗어내면 막강한 파괴력을 발휘할 것이지만 그것은 스스로의 몸을 망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죽지 않으면 다행이고 십중팔구는 내기(內氣)를 이기지 못하고 팔이든 다리든 터져버릴 것이다.
‘방법이 있을 것이다. 북명심공의 기운은 부드럽고 느리며 부동명왕공의 기운은 강하고 급하다. 그렇다면…….’
그때 진태백의 머릿속에 퍼뜩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부딪치기 때문에 상충한다면 두 가지를 전사경의 원리로 꼬아 비틀어 회전을 시키면 되지 않겠는가. 회전이라 함은 밖으로 뻗어나가는 원심력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한가운데로 모으는 집중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회전에 의한 힘으로 양기와 음기가 합일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다!”
진태백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무리 해도 되지 않던 음기와 양기의 합일에 대한 단초를 얻은 것이다. 스승인 무담선생은 북명심공과 부동명왕공의 합일에 대해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라며 진태백에게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단 한번 두 심공(心功)에 대해 말해준적이 있었다.
-필요한 것은 모두 네 자신 안에 있다. 스스로 찾아내느냐 못 찾아내느냐는 스스로의 관조(觀照)가 가장 중요할 것이다.
스승의 말은 과연 틀림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며 스스로가 두 심공의 합일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고 스스로 가진 것에 대해서 관조를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스승이 전해준 것 안에서 음양의 합일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진태백은 그 즉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두가지 기운을 끌어올렸다. 상단전으로부터 차가운 기운 한줄기가 중단전을 향해 내려왔고 하단전으로부터는 뜨거운 기운 한줄기가 중단전을 향해 치솟았다. 진태백은 조심스럽게 두 기운이 중단전에 도달하자 천천히 두 기운을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실이 꼬이듯 음기와 양기가 어우러졌고 점점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바늘 끝처럼 모여든 음기와 양기가 회전하며 조금씩 서로 간에 녹아들기 시작했고 점점 회전이 강해지며 중단전을 넓히기 시작했다.
우우웅!
그때 갑자기 진태백의 몸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고 진태백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진동이 더욱 심해졌다.
‘위험하다!’
진태백은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전사경의 원리를 이용해 중단전으로 북명심공의 기운과 부동명왕공의 기운을 합일시키기 시작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그 회전이 자신의 생각보다 더욱 강해서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버린 것이다. 지금 잘못하게 되면 기의 폭발로 자신이 묵고 있는 객잔이 날아가 버릴 것이다. 진태백은 즉시 부동명왕공의 부동결(不動訣)과 북명심공의 석관결(石貫訣)을 이용해 회전하는 기운을 통제하려 했다. 부동결은 심맥을 보호하고 날뛰는 기혈을 억누르는데 뛰어난 효과를 가지고 있는 구결이었고 석관결은 낙숫물이 돌을 뚫듯 강한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구결이었다.
‘제발!’
진태백은 필사적으로 부동결과 석관결을 운용했다. 회전하는 이 기운을 제압하지 못하면 그 순간 자신은 폭사할 것이다. 한참동안이나 씨름을 한 끝에 진태백은 겨우 회전하는 기운을 가눌 수가 있었고 점점 회전이 느려졌다. 그 회전이 완전히 멈출 무렵 진태백은 중단전에 어떤 덩어리가 생겼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것은…….”
진태백은 기진맥진한 상태였지만 중단전에 생겨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했다. 스스로의 몸에 무슨 일이 생긴 지도 모른 채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에 진태백은 그 즉시 부동명왕공을 운기하여 중단전에 생긴 덩어리를 살짝 건드려 보았고 그는 깜짝 놀랐다. 부동명왕공의 양기가 그 덩어리에 마치 하나였던 것처럼 흡수되어 버렸던 것이다.
“단(丹)이로구나!”
진태백은 탄성을 흘렸다. 북명심공의 음기와 부동명왕공의 양기가 회전에 의해 뭉치면서 형태를 가진 단을 형성한 것이다. 본디 조선의 선도(仙道)는 우상(偶像)을 세워 섬긴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육식을 금하고 약초를 먹으며 운기조식을 통해 자연과 하나 되는 독화지신(獨化之神)을 추구한다. 그 과정에서 천지간의 기운이 체내에 뭉쳐 내단(內丹)을 이루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진태백에게 일어난 것 또한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일인 것이다. 무담선생이 곁에 있었다면 좀 더 안전한 방법으로 천천히 단을 형성했을 것이지만 형편상 그렇지는 못했고 위험천만하기는 했지만 그동안 쌓아온 공(功)이 헛되지는 않아 단을 형성하는데 성공했고 이제 남은 것은 꾸준한 수련뿐이었다. 또한 언젠가는 무살(無殺)의 경지에 오를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작가의말
면목없습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핑계겠지요.
본의 아니게 잠수를 타게 되어 심려와 지루함을 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결코 이 글을 잊지 않았습니다. 기다려주시는 독자분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연재가 끊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화는 유독 쓰기가 힘들더군요. 일반인보다는 낫지만 아직도 무협을 쓰기엔 저 자신의 공부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좀 더 동양철학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만 그것마저도 쉽지가 않군요.
다음 회차는 되도록 빨리 올릴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항상 기다려주시는 독자제현께 감사의 말씀 올리며 이만 줄입니다.
2016년을 앞둔 날 朝鮮俠客 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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