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변고(西安變故)-4
소림과 화산의 고수들이 종남파의 초청을 받고 모인 것은 자은사 사건 이후 닷새 만이었다. 종남파에서는 척홍검 철유현이 이번 서안에 일어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책임자로 내려와 있는 상태였고 화산파는 장로 중 노화검(爐華劍) 자문일(慈文溢)과 남전검(嵐鐫劍) 조경(趙硬)을 필두로 매화사절(梅花四絶) 중 청매(靑梅) 두중영(杜中詠)과 오매(烏梅) 사호춘(史豪春)을 비롯한 제자들이 서안에 와있었다.
소림의 경우 방장의 사제가 죽었다는 사안 때문인지 나한전주(羅漢殿主)인 운성(雲醒)을 비롯해 다음 대 소림방장으로 일컬어지는 소신승(小神僧) 홍엽(洪葉)을 비롯한 이들이 강행군으로 하남성의 숭산에서 섬서성 서안까지 사흘 만에 주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들은 지금 익성장(翊成莊)이라는 조그만 장원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 익성장은 서안에 있는 종남파의 거점 중 하나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기도 했고 서안의 터줏대감인 종남파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종남, 화산, 소림의 삼파 회합의 장소로 삼은 것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운성대사.”
“자대협과 조대협께서도 강녕하시니 빈승의 마음도 편안합니다.”
자문일과 조경의 부드러운 인사에도 불구하고 운성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사형인 운장선사의 죽음은 소림의 입장에서도 큰 충격이었고 특히나 운성은 운장선사와 각별한 친분이 있어 매년 한번씩은 시간을 내어 그를 만나러 오곤 했었고 여의치 않은 경우 귀한 차와 함께 서신을 보냈었다. 한데 오랜만에 들려온 소식이 운장선사의 피살소식이었으니 혼자서 승포를 휘날리며 달려와 다른 사람의 멱살을 잡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의 인내심은 칭찬할 만 했다. 종남제자들이 내온 차가 식어갈 무렵 철유현이 모습을 드러냈고 앉아있던 이들은 모두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오랜만입니다. 철대협.”
“자대협과 조대협, 오랜만에 뵙습니다. 운성대사께서도 오랜만이군요.”
운성은 말없이 편수반장(片手半掌)으로 인사를 대신했고 철유현은 그들에게 자리를 권하며 앉아 입을 열었다.
“서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듣고자 하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본인의 무능함으로 인해 아직까지도 일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부끄럽지만 이번 사안이 워낙에 중차대한지라 여러분들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철대협께서 이번 사안을 해결하고자 동분서주하신 것은 알고 있습니다. 본파에서도 사람을 시켜 조사를 해봤지만 이번일은 마치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천을 둘러친 것처럼 너무도 복잡합니다. 본파의 경우 요인(要人)이라고 할 만한 사람을 잃지는 않았지만 귀파나 소림의 경우엔······.”
쾅!
조경의 말이 길어지자 운성이 탁자를 두드리며 큰소리로 소리쳤다.
“반드시 흉수를 잡아야 할 것이오! 운장사형께서 무공을 익히셨다면 몰라도 그 분은 나한권의 일초반식조차 펼칠 줄 모르는 분이였소! 더군다나 빈승이 들은 바로는 흉수는 월형 진공검을 익혔고 흉기는 강한 열기와 흡인력을 가진 칼이라 들었소. 그런 실력을 가졌다면 분명 흉수는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자임에 틀림없소이다!”
“운성대사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저희로서도 온 힘을 다해 흉수를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서안에 왔던 이름난 고수들 중 월형 진공검을 익힌 자도 없을뿐더러 강한 열기를 품은 신병이기의 출현소식이나 도난에 대한 소문도 전혀 없는 상황입니다. 개방분타에 협력도 요청해 보았지만 여전히 흉수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지요.”
철유현도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운성은 자신의 말이 좀 과했음을 깨닫고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험험, 죄송하오, 철대협. 빈승의 성질이 급한지라.”
“괘념치 마십시오. 당장 중요한 것은 한시라도 빨리 서안과 자은사 혈겁의 흉수를 찾는 일입니다.”
서안에서 가장 유명한 가문을 꼽으라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강씨세가(康氏世家)를 꼽는다. 누대에 걸쳐 내려온 재산과 권력은 관부조차도 쩔쩔맬 정도여서 서안에 자리를 잡고 싶으면 강씨세가와 척을 져서는 안 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칫, 도대체 그게 어떻단 말이야?”
조양보 보주 맹재야의 금지옥엽인 맹소연(孟召燕)은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며칠 전 자은사에 놀러갔다가 진태백과 드잡이 질을 하게 된 이후 맹재야는 그녀가 더 이상 천방지축으로 날뛸 수 없도록 금족령을 내렸다. 하지만 워낙에 타고난 성질이 활달한데다 대동에서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본적이 없던 그녀가 순순히 아버지의 말을 들을 리 없었고 몰래 강씨세가를 빠져 나오고 말았다. 그녀로서는 가출 아닌 가출을 한 셈이었으나 이곳은 자신의 손바닥 안에 있는 대동이 아니라는 것을 잊고 만 것은 큰 실책이 아닐 수 없었다.
“에이, 일단 뭣 좀 먹고 보자.”
그녀가 새벽에 빠져나올 때는 긴장과 흥분 때문에 배고픔을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은 해가 중천에 떠서 점심때가 다 되어있었다. 하지만 평상시에 돈을 가지고 다니지 않던 습관 때문에 지금 가진 것이라고는 고작 은자 두 냥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자신을 따라온 시비를 기절시키고 나서 퍼뜩 생각이 나서 챙긴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은 무일푼으로 돌아다녀야만 했을 것이다.
일단 시장기를 느끼자 맹소연은 강렬한 식욕을 느꼈고 가진 돈이 얼마 없어 주변에 보이는 조금은 허름한 객잔으로 들어갔다. 객잔에는 대낮부터 술판을 벌이고 있는 장한 네다섯과 흑포를 걸친 냉막한 인상을 가진 두 남녀가 앉아있었다. 일신에 지닌 무공이 장한 몇을 겁낼 정도는 아니라지만 흑포를 걸친 두 남녀는 어딘지 모르게 꺼려져 그녀는 그들에게서 떨어져 있는 구석으로 가 몇 가지 음식을 주문했다.
가진 돈은 얼마 없지만 화려한 옷을 입은 그녀의 행색을 살펴본 점소이는 그녀가 주문한 음식을 주방에 알렸고 잠시 후 점소이가 음식을 가져오자 그녀는 천천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장성인근은 워낙에 추운 탓에 급하게 음식을 먹으면 탈이 나고 만다. 때문에 인생의 대부분을 대동에서 보낸 맹소연은 음식을 매우 천천히 먹었고 그 모습을 본 장한 중 텁석부리 수염을 기른 장한 하나가 그녀에게 다가와 수작을 걸었다.
“서안에 유람 나오신게요?”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올라 있어 이미 술에 취했다는 것이 눈에 보였지만 맹소연은 흑포를 걸친 두 남녀가 신경 쓰여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음식에 집중했다. 그러자 장한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본인들이 술이나 한잔 대접하리다. 합석하지 않겠소?”
다짜고짜 처녀에게 이런 소리를 한다는 것은 그녀를 기생으로 본다는 의미와 크게 다를 바 없었고 성질이 난 맹소연은 차갑게 말했다.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느닷없는 맹소연의 말에 장한도 성질이 난 듯 콧김을 내뿜으며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이미 맹소연의 손은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 장한의 따귀를 때렸다.
철썩!
자기도 모르게 공력을 실은 듯 따귀를 맞은 장한은 빙그르르 돌며 나가떨어졌고 공교롭게도 흑포를 걸친 남녀가 앉아있는 탁자에 넘어지고 말았다. 꽈당 하는 소리와 함께 탁자가 넘어지려는 순간 흑포를 걸친 남자가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쳤고 넘어가기 직전이던 탁자는 얌전히 처음 그대로 위치했다. 그러나 장한이 넘어지며 팔을 휘두르는 바람에 탁자에 놓여있던 음식 몇 가지가 엎어져 버렸고 음식들이 튀어 탁자 위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이런, 큰일이구나. 저들의 음식 값을 물어줄 수 있을까?’
맹소연은 내심 큰일이다 싶어 자신의 손목을 잡았던 장한 일행에게 책임을 떠넘기기로 마음먹었다. 애당초 시비를 걸어온 것은 그들이 아닌가? 그러나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흑포 사내가 입을 열었다.
“싸움을 하려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말아야지.”
그 말을 들은 맹소연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사실 조금만 주의를 했다면 장한만 쓰러뜨리고 조용히 해결되었을 터인데 그녀의 성질이 워낙에 급한 탓에 가능하면 관계하고 싶지 않은 이들과 관계되어 버린 것이다.
“죄송하게 되었어요. 음식 값은 물어드리죠.”
맹소연은 품속을 뒤져 자신이 가진 은자 두 냥을 모두 탁자위에 올려놓았고 점소이에게 눈짓을 한 다음 객잔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흑포 사내도 더 이상은 그녀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는지 말없이 찻잔을 기울였고 그들을 힐끗 바라본 맹소연은 힘이 빠진 걸음으로 객잔을 나섰다. 이제는 완전히 무일푼이 되고 만지라 그녀의 발걸음은 유독 무거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며칠 전 못했던 자은사 구경을 마저 하리라 마음먹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진태백은 자은사 경내를 천천히 둘러보고 있었다. 며칠 전에 왔을 때는 살인 사건 현장을 발견하는 바람에 제대로 구경조차 못했지만 지금은 현장조사가 거의 끝나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그의 걸음을 방해하는 자들이 없었다. 스님들의 시신이 발견된 대웅전은 굳게 닫혀있었으나 당초 보려고 했던 것은 대안탑과 소안탑이었기에 그의 감상이 방해받지는 않았다. 조금 전까지는.
“도대체 왜 다시 온거죠?”
옆에 붙어서 재잘거리는 소녀만 아니었다면 진태백은 평온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겠지만 무슨 악연인지 그는 며칠 전 자신에게 칼을 휘둘렀던 소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진태백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저항은 무시뿐이었다.
“이봐요! 사람이 말을 하면 대답을 해야 할 것 아녜요!”
“하아, 나는 그저 대안탑과 소안탑을 보러 왔을 뿐이오. 그리고, 그렇게 떠들면 목 안 아프오? 이곳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는 나도 소저 이상으로 알지 못하오. 그러니 이만 가보시오.”
“흥! 그래놓고 당신이 증거를 숨기려 하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요?”
“사람 잡을 아가씨로군. 어쨌든 나는 이곳에서 일어난 사건과는 무관하니 더 이상 귀찮게 마시오. 무고(誣告)도 죄요.”
진태백의 엄한 질책에 맹소연은 잠시 주눅이 들었지만 말 그대로 잠시에 불과했다. 자은사의 경내를 둘러보는 진태백에게 달라붙어 계속 재잘대는 통에 진태백은 짜증이 치밀었지만 그냥 내버려 두기로 마음먹고 자은사를 나섰다.
“실례지만 혹시 분광발도 진태백, 진소협이 아닙니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진태백이 돌아보자 그곳에는 영웅건을 두르고 푸른 비단옷을 입은 헌앙한 청년이 서있었다.
“아, 이런 내소개가 빠졌군. 본인은 서안 강씨세가의 소가주, 강연후(康然后)라 합니다.”
서글서글한 웃음을 짓는 그의 모습은 당당한 위풍이 있어 강씨세가의 소가주라는 신분에 손색이 없었고 일단 먼저 소개를 해오는 그를 무시할 수 없어 진태백도 마주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반갑소. 진태백이라고 하오.”
“음? 맹소저가 아니시오? 여기엔 웬일로?”
강연후의 말에 진태백의 등 뒤에 숨었던 맹소연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지난번에 자은사를 제대로 구경하지를 못해서 다시 왔는데 진소협을 다시 만나게 되었어요.”
언제 봤다고 진소협이라고 칭하는지 진태백은 조금 황당한 심정이었지만 그녀와는 다시 얽히고 싶지 않아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두 분이서 아시는 사이인 것 같으니 본인은 이만 가보리다. 그럼.”
“진소협,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본가에 방문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진소협께서 강호를 종횡무진 하는 소문에 이 강모의 호연지기가 들끓어서 그러니 며칠 본가에 머물면서 이야기를 좀 나누었으면 합니다만.”
강연후의 정중한 초청이었다. 보통이라면 거부하겠지만 자신의 뒤를 쫓을 준비를 하고 있는 맹소연을 보니 차라리 강연후에게 저 말괄량이를 맡겨버리는 것이 낫겠다 싶어 결국 진태백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작가의말
시국도 어수선하고 필자의 마음도 싱숭생숭합니다.
재밌게 읽어주세요.
ps. 추천과 댓글은 필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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