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권파옥(一拳破玉)-3
“다시 한 번 묻지. 명옥궁과는 무슨 관계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옥여월을 향해 다시 진태백의 물음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너무도 뜻밖의 질문을 받은 탓인지 옥여월은 아무런 말도 못한 채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에 옥여월은 간신히 평정을 되찾고는 말했다.
“어떻게 알았느냐?”
“걸음걸이와 기파(氣波). 두 개가 거의 똑같더군.”
진태백의 말에 옥여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공을 익힘으로 인해 몸에서 발산하는 기파는 고수 소리를 들을만한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다. 또한 익히는 무공에 따라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달라지는데 특히 명옥궁에서 기초로 가르치는 보법인 옥답(玉踏)은 족궁(足弓)을 이용해 걷는 매우 특이한 걸음걸이였으니 진태백이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인지도 몰랐다.
“과연, 본궁에서 눈독들일만 하구나.”
“명옥궁의 분파(分派)인가?”
“본궁에 들어갈 아이들을 선별하는 수련장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옥여월은 진태백의 물음에 순순히 답했다. 이미 진태백이 자신들의 정체를 눈치 챈데다 어차피 기초 수련장에 불과한 곳이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명옥궁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심지어 명옥궁에 대해서 모르는 제자들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곳이 몇 개나 있지?”
“본녀가 명옥궁에서 낮지 않은 직책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외인에게 그것을 알려줄 수는 없는 법이지.”
“낮지는 않다라. 좋군.”
“뭐가 말이냐?”
진태백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감돌자 옥여월이 물었고 그는 찻잔에 남은 마지막 찻물을 들이키며 말했다.
“당신의 목숨이면 명옥궁에 보내는 선전포고로 걸맞겠지.”
진득한 살기가 묻어나는 진태백의 말에 옥여월도 더 이상 참기가 힘든 듯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본녀를 너무 우습게 생각하는구나. 쉽게 나를 죽일 성 싶더냐?”
“가끔 집지키는 개들이 자신을 맹수로 착각하고 덤벼들기도 하지. 당신도 결국 그 범주에서 벗어나질 못하는군.”
“감히!”
와장창!
옥여월이 노기를 참지 못하고 일어서는 순간 진태백의 오른발이 탁자를 부수며 그녀의 턱으로 짓쳐들었다. 탁자 위에 놓여있던 값비싼 다기들이 탁자와 함께 박살났지만 그것을 아까워할 겨를이 없었고 옥여월은 정신없이 날아드는 진태백의 주먹과 발을 막으며 문을 뚫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명옥육가인이니 뭐니 하는 여자들보다는 고수로군.”
옥령관의 넓은 연무장으로 나온 진태백은 옥여월을 보고 말했다. 그러자 옥여월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
“왜, 그 아이들보다 못할 줄 알았더냐?”
“아니, 고작 그 뿐이라는 거다.”
“뭣?”
옥여월의 아미가 치솟았지만 진태백은 개의치 않고 그녀를 공격했다. 일격 일격에 실린 힘과 속도는 충분히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것이었고 더군다나 진태백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살기는 수십 년을 강호의 칼바람 속에서 살았던 그녀도 처음 경험하는 막대한 것이었다.
휘리릭!
결국 옥여월은 밑천을 풀어야 했다. 그녀의 허리춤에서 얇디얇은 연검(軟劍) 한 자루가 풀려나와 용틀임을 했고 그 서슬에 진태백은 뒤로 물러나야했다.
“선택하는 게 좋겠군. 다 죽일 것인가 아니면 혼자 죽을 것인가.”
“무슨 소리냐?”
“이 광경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어느새 진태백과 옥여월 주변에는 옥령관 제자들이 각기 병장기를 들고 몰려나와 있었다. 그것을 본 옥여월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진태백은 혼자서 자신을 상대할 것인지 아니면 제자들을 동원해 그를 협공할 것인지를 묻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리도 치졸해 보이더냐?”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이 인간 행세를 하고 있군. 너희들은 소 잡을 때 쓰는 몽치도 안 될 것들이다.”
“이놈!”
옥여월은 크게 노해 연검을 휘두르며 진태백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검 끝이 진태백의 상체의 요혈을 향해 찔러들었고 진태백은 큰바람[大風]의 수법으로 손을 휘저었다. 마치 아이가 앙탈을 부리는 듯한 몸놀림이었지만 그의 손이 휘둘러지자마자 일진광풍(一陣狂風)이 일어나며 옥여월이 휘두른 검초가 무산되고 말았다.
“이제야 본색이 나오는군.”
“도대체 본궁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 것이냐! 본궁은 충분히 너의 바람막이가 되어줄 수 있는 곳이거늘!”
“내가 그것을 바랐던가?”
진태백의 말에 옥여월은 말문이 막혔다. 그의 말대로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보호해주기를 원한 적이 없었고 누군가에게 요청한 적도 없었다. 그저 자기들 멋대로 그에게 바람막이가 필요할 것이라 판단했고 그에게 자신들의 도구가 될 것을 종용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도와달라고 말했다면 내가 당신들의 적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은 나를 멋대로 재단하고 판단했으며 그저 말 잘 듣는 개가 되기를 원했을 뿐이다. 아닌가?”
“그, 그것은······.”
“나는 당신들에게 여러번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당신들은 자기들만의 생각에 빠져 그저 당신들의 입장을 강요했을 뿐, 나에게 단 한 번도 도와달란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이용하는 자들에게 줄 것은,”
진태백의 신형이 한순간 흐릿해지더니 옥여월의 앞에 나타났고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그녀의 명치에 진태백의 주먹이 작렬했다.
콰직!
“이 주먹뿐이다.”
옥여월은 비틀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나더니 땅에 엎드려 울컥 피를 토해냈다. 진태백의 주먹에 실린 경력이 그녀의 가슴뼈를 모조리 부수고 심맥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앞으로 명옥궁과는 일체의 대화가 없을 것이다. 내가 죽는 것이 먼저일지 명옥궁이 무너지는 것이 먼저일지 내기를 하는 것도 좋겠지.”
말을 마친 진태백은 몸을 돌려 옥령관을 나갔다. 제자들은 그런 진태백을 붙잡을 생각도 못하고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고 몇몇 제자들만 쓰러진 옥여월을 붙잡고 통곡하고 있었다.
옥여월이 죽었다는 소문은 하룻밤 사이에 농서 전체에 퍼졌다. 그에 따라 온갖 소문이 농서를 맴돌았지만 그 진상을 알고 있는 옥령관 제자들이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있어 사람들을 궁금증에 빠뜨렸다.
“도대체 그 사람이 왜 고모님을 죽였을까.”
눈부실 정도로 하얀 백색 나삼을 걸친 여인이 입을 열자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말했다.
“전해들은 그대로겠죠. 우리는 가만히 있던 대호(大虎)에게 멋모르고 활을 당긴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건 과했어요! 감히, 감히!”
벽록색 옷을 걸친 여인이 말을 채 잇지못하고 눈물을 글썽이자 백색 옷의 여인이 말했다.
“주매의 말이 맞을 것이다. 소매 또한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고 하지 않느냐. 고대부(古大夫)께서 계셔서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이미 그는 우리에게 선전포고를 한 상황이다. 고모께서는 그것을 모른 채 그를 이곳으로 부른 것일 테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명옥육가인 중 성휘연과 주교교, 장세지였다. 진태백이 농서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세 사람이었지만 그녀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옥여월은 목숨을 잃었고 그녀의 딸인 여휘가 옥여월의 장례를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옥여월은 명옥궁에 입궁하는 여제자들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던 만큼 고모라고 부를 정도로 친밀한 사이이기도 했다.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없겠구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그를 쫓아가서 핏값을 받아내야 해요!”
장세지의 말에 성휘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서로 간에 감정이 격앙되어 있을 때 만나는 것은 상책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번 일은 우리가 잘못한 일에 고모님께서 휘말리신 것이다. 그가 넷째를 대한 것을 우리가 너무 가볍게 생각했구나. 궁주님께 어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궁주라는 말이 나오자 금방이라도 진태백을 쫓을 것 같던 장세지도 자리에 주저앉았다. 처음부터 진태백과의 관계가 꼬인 것은 그녀의 잘못도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다짜고짜 그를 공격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진태백은 명옥궁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고 또 그들이 진태백을 이용하려 한 것을 그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일단은 그를 만나봐야 하지 않겠어요, 언니?”
“그를 만나서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그는 우리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을 텐데.”
주교교의 말에 장세지가 쏘듯이 말했다. 그 바람에 주교교도 화가 난 듯 아미가 상큼하게 올라갔지만 성휘연 앞에서 화를 낼 수는 없었는지 그저 사나운 눈으로 그녀를 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와 친분이 있는 사람을 통해서 화해를 주선해달라고 하면 어떨까?”
생각에 잠겨있던 성휘연이 입을 열었고 주교교와 장세지가 동시에 외쳤다.
“안 돼!”
“안돼요!”
“어째서?”
그녀들의 반응에 성휘연이 반문했고 잠시 우물쭈물하던 장세지가 말했다.
“고모님을 죽인 원한을 잊자는 거예요?”
“그렇게 몰아간 것은 우리고.”
주교교가 사족을 달았지만 장세지는 신경도 쓰지 않고 성휘연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자가 얼마나 잘난 사람이기에 본궁이 그에게 숙이고 들어가야 하죠?”
당연한 말이었다. 물론 진태백이 지닌 무위가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구파일방, 팔대세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옥궁이 그에게 숙이고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가 상대한 자들의 면면을 생각해 보아라.”
성휘연의 말에 장세지는 입을 다물었다. 진태백이 강호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래 그가 상대한 이들 중 쉬운 상대는 없었다. 구주구왕에 속하는 팽철신을 비롯해 가루라왕과 최근 모습을 드러낸 인노라는 자까지 생각하면 그의 진정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될 정도였다.
“그와 정면으로 싸우게 되면 어부지리를 얻는 것은 호결원이나 서장무림이 될 것이다. 휴우······.”
성휘연은 한숨만 나왔다. 말하고 보니 진태백을 상대하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서 였고 또 그는 소림의 장로인 현공대사를 비롯해 팔대세가의 소가주나 이름이 알려진 후기지수들과도 교분이 있었다. 이쯤 되면 그를 공적으로 몰기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일단은 총관님께 이 일을 알리도록 하자. 총관님이라면 좋은 방법을 알려주시겠지.”
아무리 강호에 이름이 알려졌다고는 하지만 그녀들도 아직 후기지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이나 명옥궁의 총관직을 맡아 명옥궁을 반석에 올려놓은 총관이라면 분명히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은 채 성휘연은 한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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