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의 잘못은 부모에게 물어라-4
팽철신은 구주구왕 중 도왕이라는 명호를 가질 정도로 도(刀)라는 무기를 다루는데는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팽가에 전해오는 도법은 여러 가지였으나 결국 추구하는 것은 중도(重刀)를 통한 패도(覇刀)의 완성이었고 그것을 완성한 뒤 그가 눈을 돌린 것은 쾌도였다. 그리하여 그는 수년 간의 참오(參悟)를 통해 일섬(一閃)이라는 단 일초로 되어있는 쾌도식을 완성해냈고 그제야 그는 비로소 자신에게 주어진 도왕이라는 명호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내가 수련한 쾌도는 일섬이라고 불리는 이 일초뿐이네. 자네의 쾌도는 무엇인가?”
팽철신의 물음에 진태백은 허리 뒤에 차고 있던 무인금강을 허리 앞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백제 어검류(百濟 御劍流) 발도식(拔刀式) 음월(音越)이라고 합니다.”
진태백의 말에 팽철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줄기의 빛이 된 칼이 빠를지 소리를 넘는 칼이 빠를지는 겨루어보면 알 일이었다.
“좋은 이름이군.”
팽철신은 진태백이 자세를 잡아가는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진태백은 왼발을 뒤에 둔채 오른발은 살짝 구부려 상체를 살짝 수그리며 몸을 뒤튼 채 오른손으로 무인금강의 손잡이를 잡았다. 팽철신은 생전 처음 보는 발도의 자세에 의문을 품었지만 그것은 나중에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팽철신은 천천히 팽가의 가주에게 전해지는 팽가의 가보인 패왕신도(覇王神刀)를 꺼내들었고 왼발을 슬쩍 뒤로 뺀 다음 오른손에 쥔 패왕신도를 왼발 쪽으로 끌어당겼다.
“준비되었나?”
팽철신의 말에 진태백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팽철신은 자신의 부인인 장미려에게 말했다.
“부인, 동전을 하나 던져주시오. 저 동전이 땅에 닿는 순간 겨루도록 하지.”
장미려는 소매에서 동전하나를 꺼내 손에 쥐고 팽철신과 진태백을 한 번씩 쳐다본 다음 공중으로 던졌다. 그녀의 손에서 동전이 떠남과 동시에 팽철신의 몸에서는 예리하고 무거운 기운이 폭출되었다. 그야말로 도왕이라는 명호에 어울리는 어마어마한 기운이었고 멀찍이서 보고 있던 사람들은 그 기세에 눌려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러나 진태백은 꿈쩍도 하지 않고 칼 손잡이를 쥔 손을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어검류의 진수(眞髓)는 칼로 활법을 행하는 것!’
진태백이 공력을 끌어올리자 맨손으로 싸울 때와는 달리 부드러운 기운이 몸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강맹하지도 위압적이지도 않았으나 팽철신이 뿜어낸 위압적인 기운을 흘려내며 뻗어나갔고 팽철신이 뿜어낸 기운은 진태백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팅!
동전이 땅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나기 무섭게 두 사람의 칼이 서로를 향해 뻗었고 그와 동시에 진태백의 왼쪽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크윽!”
예리한 통증이 느껴짐과 동시에 진태백은 몸을 틀었지만 이미 팽철신의 칼은 자신의 어깨를 베고 지나갔다. 두 사람은 어느새 칼을 뽑기 전의 자세로 돌아가 있었고 팽철신은 무거운 얼굴로 잠시 침음성을 흘리더니 말했다.
“으음……, 내가 졌군.”
팽철신은 칼집에 패왕신도를 집어넣은 다음 돌아섰다. 진태백은 베인 어깨의 혈도를 눌러 더 이상 출혈이 나지 않도록 했고 내려놓은 봇짐을 들었다. 그때 팽철신의 부인인 장미려가 진태백을 향해 말했다.
“모처럼 들러주신 손님이신데 상처도 치료할 겸 며칠 묵었다 가시지요.”
“아, 지금까지도 충분히 폐가 되었는데 더 이상 폐를 끼칠 수는…….”
“묵어 주시겠지요?”
장미려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묘한 기백이 있었고 그 기백에 눌린 진태백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 네. 그럼 폐를 끼치겠습니다.”
“소협을 객청으로 모시고 의원을 부르도록 해라. 그럼 저는 이만.”
장미려는 진태백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다음 방으로 돌아간 팽철신을 따라 가버렸고 진태백은 자신의 짐을 받아드는 하인에게 봇짐을 넘겨주고 하인을 따라 객청으로 향했다.
후륵.
팽철신은 돌아오자마자 패왕신도를 벽에 걸어두고 차를 따라서 마시고 있었다. 곧이어 장미려가 방안으로 들어오자 그는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오시오 부인.”
“그 청년이 꽤나 마음에 드셨던 모양입니다. 상공.”
“마음에 들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소. 무위도 그만하면 차고 넘치는데다 학식도 범상치 않았소. 인의예지신을 내세워 말을 할 땐 나도 모르게 말문이 막히더구려.”
“후후, 모름지기 무인이란 무위만 내세울 것이 아니라 학식 또한 쌓아야한다고 하신 분이 상공 아니십니까.”
“맞는 말이오.”
“그런데 어째서 상공께서 졌다고 하신 것입니까?”
장미려의 말에 팽철신은 마시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자신의 어깨를 만졌다. 그러자 그가 만진 부분의 옷이 부스러져버렸고 그것을 본 장미려는 깜짝놀라 물었다.
“이것이 어찌된 것 입니까?”
“내가 뽑은 칼이 그의 몸에 닿기도 전에 그의 칼이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갔소. 그가 뽑은 칼이 칼집에 들어갈 무렵 내 칼이 그의 어깨를 베었고 그 후에 나는 어마어마한 굉음을 들었소. 그의 칼에 날이 있었다면 피를 뿌리는 것은 나였을 거요.”
장미려의 안색이 변했다. 그것은 분명 소리보다 빠르게 칼이 뻗었다는 것이었고 그보다 놀라운 것은 그런 속도로 칼을 휘둘렀으면서도 팽철신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 옷만 부스러뜨렸다는 것이었다.
“정말 멋지지 않소? 도왕이라고 불리는 내 쾌도를 넘는 쾌도라니.”
“그렇군요.”
“아이들은 어떻소?”
그래도 아비인지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무섭게 화를 냈지만 화가 가라앉고 보니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호진이의 다리는 석 달 정도면 나을 거라고 합니다. 설이는 놀란 것 빼면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진소협이 혼내준 것이 약이 될 테지요.”
팽철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내일은 그와 대화를 나누어보아야겠소.”
“상공께도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호철이는 어떻소?”
팽철신은 장미려에게 자신의 맏아들이자 소가주인 팽호철(彭昊哲)의 안부를 물었다. 팽호철은 가문의 절기가 어느 정도 기본이 잡히자 팽철신의 친우(親友)인 안창(安敞)에게 무예를 배우기 위해 가문을 떠나있었고 석 달에 한번 정도 서신을 통해 자신의 안부를 알리고 있었다.
“잘 있다고 합니다.”
그 말이면 충분했다. 팽호철은 하북팽가의 장자답게 사려 깊고 무던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성격이 너무도 유순하여 팽철신의 걱정을 샀고 결국 팽철신은 특단의 대책으로 강호에서도 괴팍하기로 소문난 괴걸(怪傑)인 광랑부(狂浪斧) 안창의 기질을 닮으라고 보낸 것이었다. 그에게 보낸 지가 5년째이니 그 유순하던 아이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할만도 했다.
“진소협과 친분을 쌓으면 그 아이에게도 도움이 될 것 입니다.”
“그의 살기는 후원에 있던 나조차도 놀랄 정도였소. 고작 약관이 넘어 보이던데 어떻게 그런 살기를 품었는지 궁금하군.”
“그렇지 않아도 며칠간 묵어달라고 부탁을 해두었습니다. 상공께서 초대하셔서 대화를 나누시면 되겠지요.”
“역시 부인은 내 장자방(張子房)이오. 허허허.”
사흑련(邪黑聯). 정파 무림맹과 더불어 당금 무림을 양분하는 거대세력이다. 사파의 특성상 단합이 쉽지는 않았으나 광마혈세(狂魔血世)를 겪으며 사파의 대부분이 사극목에게 유린당했고 그 때문에 대부분의 사파고수들이 자신들의 구심점이 되어줄 독자적인 세력을 원하여 세워진 곳이었다.
련주(聯主)후보로는 당대 최고의 고수인 동왕(東王)과 남천(南天)이 거론되었으나 동왕은 무예에 미친 자들의 모임이라는 광무전(狂武殿) 출신인데다 무리를 짓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여 사흑련 련주의 취임을 요청하러간 사자를 흠씬 두들겨 패서 되돌려 보냈다. 남천도 이미 사파의 거대세력인 파황보(破皇堡)의 보주(堡主)였기에 거절했다. 그러나 독불장군(獨不將軍)인 동왕보다 거대세력을 문제없이 운영해온 남천이 사흑련의 련주가 되는데 적합하다고 판단한 사람들은 간곡한 요청 끝에 그를 사흑련의 련주로 취임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때를 같이하여 그의 친우인 서백 혁진풍이 무림맹주의 직에 취임하여 현재 사파와 정파는 ‘공격하지도 공격받지도 않는다’라는 원칙을 세워두고 서로간의 간섭과 세력다툼을 최대한 피하고 있었다.
“듣자하니 하북팽가가 뒤집어졌다던데?”
사흑련의 련주 남천 소진명(蘇秦溟)은 최근 들어온 하북팽가의 난리에 대해 옆에 서있던 사흑련의 문상(文相)인 장달(章達)에게 물었고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네, 팽가전관자(彭家錢串子)라고 불리는 팽가주의 자녀가 안진표국이라는 조그만 표국에서 행패를 부렸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표국에서 일하던 쟁자수 하나가 엄청난 고수였던 거지요.”
“쟁자수?”
“네, 듣자하니 조선에서 온 사람이라고 합니다.”
“탕마도 팽철균이 당했다는데 혹시 운이 아닐까?”
“련주께서도 아시겠지만 운이나 꼼수로는 안 되는 상대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탕마도가 그런 고수입니다. 비록 팽가주보다는 그 무위가 약하다고는 하지만 운만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사람이지요. 거기다 팽가주와 쾌도로 겨루었는데 팽가주가 패배를 인정하고 세가의 손님으로 맞이했다고 합니다.”
소진명의 눈이 반짝거렸다. 팽가주 팽철신은 자신의 명성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전대의 고수가 대부분인 구주구왕에 현역으로 이름을 올린 입지전(立志傳)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이가 스스로 패배를 인정할 정도라면 쾌도라는 일부분의 승리이긴 하나 그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뜻이었다.
“그래, 그 자의 나이는?”
“이제……, 약관이 갓 넘었다고 합니다.”
“약관?”
약관(弱冠)이라면 스무 살을 말한다. 약관을 갓 넘겼다함은 이십대 초반이라는 뜻인데 이십대 초반에 그만한 무위를 가진 사람은 온 중원을 뒤져봐도 모용신호의 손자인 모용천이 유일했다.
“재밌는 녀석이군. 그 나이에 그만한 무위라면 도대체 어떤 수련을 해온 것인가.”
“거기다 더 웃기는 것은…….”
“또 있나?”
“그의 특기라고 전해진 것이 궁술, 기마술, 의학인데, 거기다 지닌 학문도 과거(科擧)를 준비하는 선비에 뒤지지 않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소진명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 정도라면 가히 천재라고해도 모자라지 않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한우물만 파도 대성하는 이가 극히 적은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지닌 무위가 구주구왕과 비등한 정도이며 학식마저도 평생 책만 파는 선비에 뒤지지 않는다면 배운 진태백 뿐만 아니라 가르친 스승도 범상치 않은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괴물인가? 그 녀석은.”
“그 청년이 괴물이라기보다는 그렇게 가르친 스승이 괴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가르침을 따라간 그도 괴물이지.”
소진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고 장달 또한 그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진명은 호승심이 크게 동한 모습이었으나 사흑련의, 보통 고수도 아니고 련주이며 천하오절 중의 한명인 그가 움직이면 일거수일투족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니 무작정 팽가로 갈 수도 없었다.
“가능하다면 우리 사흑련으로 끌어들이면 좋겠군.”
“힘들 것입니다. 그가 나선 이유가 팽가의 망나니들이 어쭙잖게 설쳐서라고 합니다. 또한 평상시엔 예의가 바르고 겸손해서 직접 나서기 전엔 그저 몸놀림이 빠르고 힘이 센 청년인줄로만 알았다고 합니다.”
“사흑련에 오면 난리 나겠군.”
“사흑련은 아무래도 나이보단 실력우선이니 그렇겠지요.”
소진명은 쓴웃음을 지으며 옆에 놓인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 그를 보며 장달은 말했다.
“행여나 몰래 빠져나갈 생각은 마십시오. 련주님을 찾느라 소모된 금액만 해도 중소문파의 일 년 예산입니다.”
“큭, 알았네.”
내심 몰래 빠져나가 진태백을 찾아갈 생각을 하던 소진명은 장달의 빠른 눈치를 탓하며 투덜거렸지만 어찌하겠는가. 그는 명색이 사흑련의 련주이며 천하오절의 남천이니 참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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