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수련(空洞修練)-3
“처음 뵙겠습니다. 진태백 입니다.”
“반갑네, 광천일세.”
진태백과 광천진인간의 만남은 차분하게 이뤄졌다. 차분해 보이는 첫인상과는 달리 광천진인은 상당히 괴팍한 성품을 지닌 듯 진태백을 떨떠름한 눈으로 쳐다봤고 그는 광천진인의 눈이 부담스러웠다. 어색한 분위기에 박대용이 헛기침을 몇 번 했지만 잠시 진태백을 바라보던 광천진인이 말했다.
“홍살기(紅煞氣)가 미간을 침범했군.”
광천진인이 불쑥 말했고 그 말에 박대용이 물었다.
“홍살기가 미간을 침범하다니요?”
“최근 스스로 감정이 다스려지지 않을 것이고 머리에 기운이 뻗쳐 잠을 잘 못자렷다?”
박대용의 물음에는 관심이 없는 듯 광천진인이 중얼거렸고 진태백은 깜짝 놀라 말했다.
“그것을 어떻게······.”
“명신 사형에게 들으니 주화입마에 빠져 죽을고비도 넘겼고 최근에는 농서 옥령관의 옥대랑을 죽였지. 들리는 소문만 듣자면 피에 미친 살귀(殺鬼)도 아닌데, 끽해야 그저 명옥궁과 불편한 사이였고. 이제야 그 행동이 이해가 되는구먼.”
진태백은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광천진인의 말대로 최근 기운이 제멋대로 폭주하는 조짐을 느끼고 있었고 밤마다 머리로 치솟는 기운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아무 이유 없이 자꾸 살기가 드러나 공동파로 오는 도중에도 곤욕을 치렀다.
“이유를 아십니까?”
진태백이 공손히 묻자 명신진인은 탁자에 놓인 찻잔을 들어 차를 모조리 마신다음 내려놓은 뒤 말했다. 찻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본시 그릇이라 함은 무엇인가를 담기위해 만들어지는 것. 비어있되 형태를 단단히 갖춰야 다른 것을 담을 수가 있지. 속이 차있다면 아무것도 담을 수가 없으니 이것이야 말로 공(空). 한데 그릇에 금이 간데다 가득차서 넘치고 있으니 당연한 일.”
그릇이라 함은 자신의 몸을 말함이다. 그릇에 금이 갔다는 것은 몸이 망가지고 있다는 말일 것이고 넘치고 있다는 것은 몸이 견딜 수 있는 내기(內氣)의 허용량을 넘었다는 말일 것이다. 대천진인은 이대로 가다가는 진태백이 자멸할 것임을 도가의 공의 이치를 들어 설명하고 있었다.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진태백이 묻자 대천진인은 잠시 눈을 감고 묵상에 잠겼다. 일다경쯤 지났을까, 그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공저물사(空低物事)!”
그것으로 끝이었다. 광천진인은 다시 묵상에 들었고 박대용과 진태백은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거참, 사부영감이 좀 이상한 사람이긴 해도 허튼소리를 할 양반은 아닌데. 무슨 말인지 알겠냐?”
박대용의 물음에 진태백은 고개를 저었다. 홍살기가 미간을 침범했다는 말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저 한번 봤을 뿐인데 자신의 상태를 알아챈 것도 보통은 아니었다.
“공저물사가 무슨 뜻인지 아느냐?”
“나도 어렴풋이 알뿐이지. 그저 한없이 자신을 비우라는 뜻이다.”
박대용의 말에 진태백은 광천진인이 던진 화두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스스로의 공부가 미천한 탓인지 아니면 자신이 아둔한 탓인지 도무지 광천진인이 던져준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늘을 보니 맑은 밤하늘에 떠있는 달은 휘영청 밝기만 했다.
다음 날, 박대용은 아침 일찍부터 스승인 광천진인을 귀찮게 하고 있었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 어제 태백이한테 하신 말씀이 뭔지 좀 알려주세요!”
“이놈아! 그놈이 네놈 마누라도 아닌데 왜 그 난리냐? 보아하니 아주 우둔한 놈도 아닌 것 같던데.”
“그럼 그 홍살기인지 뭔지가 미간을 침범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라도 알려주세요!”
한참을 그렇게 티격태격하니 결국 광천진인은 항복하고 말았다. 이런 기세라면 오늘 해야 할 연단이고 수련이고 모두 내팽개치고 매달릴 놈이라는 것을 알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찝찝함을 감출 수는 없었는지 광천진인은 투덜대며 말했다.
“홍살기는 스스로의 살기에 잡아먹히는 놈들한테서 보이는 기운이다. 흔히 살귀니 뭐니 하는 살인광들한테서 보이는 기운이지.”
“그럼 그거 큰일 아닙니까!”
박대용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광천진인은 그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어딜 가려는 게냐?”
“알려줘야지요!”
“뭘 알려준단 말이냐? 알려준다고 알아챌 것이라면 이 사부는 안 알려줬을 것 같으냐?”
“필요 없습니다. 그놈 죽으면 나도 칵 칼 물고 죽을 랍니다.”
“이놈이! 사부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구나!”
광천진인이 목소리에 노기를 띠고 말했지만 박대용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더군다나 십년가까이 그의 옆에 있으면서 무공과 연단술 뿐만 아니라 광천진인의 외골수적인 성격을 이용하는 방법까지 터득했으니 광천진인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천적이 눈앞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화두만 던져주면 뭘 합니까. 제자의 벗이면 제자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제자가 죽는 꼴 보고 계실 겁니까?”
박대용의 협박 섞인 말에 결국 광천진인은 두 손 들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뿐인 벗을 위해 이렇게 나서는 꼴을 보니 그래도 인성이 제대로 박힌 놈이라는 것에 나름 뿌듯함을 느꼈다.
“알겠다 이놈아. 저 뒤에 동굴 치워두고 네 벗이나 불러오도록 해라.”
광천진인의 말에 박대용은 환호성을 지르며 밖으로 달려 나갔고 두식경이 지나자 박대용이 진태백을 이끌고 그에게로 돌아왔다.
“내가 던져준 화두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았는가?”
광천진인의 말에 진태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밤새 생각해 보았으나 제가 아둔한 탓인지 진인의 말씀을 십분지 일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솔직한 말이었다. 다른 놈들 같으면 되도 않는 문자를 써가며 아는 체를 하려하겠지만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진태백과 박대용은 서로 닮은꼴이었다.
“비우시게.”
광천진인의 말에 진태백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엇인가 알 것도 같은데 단 한걸음이 부족했다.
“이 늙은이가 좌도수련을 시작한 것은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기 위한 일환이었네. 한데 평생 우도수련만 하다가 좌도수련을 하려니 될 리가 있나. 오히려 쌓은 수련도 홀랑 까먹고 말았다네. 그렇게 몇 년을 허송세월을 했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게야.”
광천진인은 눈을 감고 그 때를 회상했다. 얼마나 괴로웠던가,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길고긴 깜깜한 동굴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잠시 회상에 잠겨있던 그는 다시 눈을 뜨고는 말했다.
“지나고 보니 그것은 나 자신을 비우는 과정이었지. 내가 가진 선입견, 아집, 집착 같은 것을 버리고 나니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더군. 그것은 망아(忘我)나 물아일체(物我一體) 같은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라 내 자신의 재정립(再定立)이었네.”
광천진인의 말에 진태백은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을 큰 그릇으로 만들어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는 대기(大器)를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광천진인은 그것을 ‘비운다’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달랐다. 스스로의 관념과 논리를 공격하고 철저히 해체해서 다시 쌓아올리는 과정, 진태백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도사님. 제가 지금 해야 할 일을 깨달았습니다.”
진태백은 자리에서 일어나 넙죽 엎드려 광천진인에게 큰절을 올렸다. 만약 그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진태백은 분명 큰 화를 입었을 것이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광천진인은 말했다.
“스스로 할 일을 깨달았다니 다행이군. 수련 장소를 마련해 두었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소성(小成)은 이루도록 하게. 너는 진소협을 그곳으로 데려가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박대용은 진태백을 이끌고 광성원 뒤편의 작은 동굴로 그를 데려갔다. 이미 박대용이 깨끗이 치워놓은 탓에 동굴특유의 퀴퀴한 냄새는 거의 풍기지 않았고 안쪽에는 작은 향로와 거적이 놓여 있었다.
“여기에서 수련하면 될 것이다. 필요한게 있으면 말하고.”
박대용의 말에 진태백은 하루에 한번 맑게 끓인 죽 한 그릇과 물만 갖다 놓아달라고 부탁했고 그것만 먹고도 괜찮겠느냐는 박대용의 걱정에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죽을 정도로 할 수련은 아니니 걱정마라. 필요한 만큼 수련을 하고 나면 나갈 것이다.”
박대용의 걱정에도 그저 괜찮다는 말만 하는 진태백이 걱정스러웠지만 대신 수련을 해줄수 있는 것도 아닌지라 박대용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끄으윽!”
검은 휘장으로 가려 빛이 들지 못하게 해둔 어두운 방안에서 얼굴에 붕대를 감은 중년인이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사부님!”
“약, 약을 가져와라!”
제자로 보이는 사내는 사부의 말에 조그만 환약과 물을 가지고 왔고 중년인은 거칠게 그의 손에서 약을 빼앗아 발작적으로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러고 나서도 일다경이 지나서야 통증이 가라앉은 듯 조금이나마 평정을 되찾았고 사내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방을 나왔다.
“여전히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가?”
방 밖으로 나온 사내를 향해 맑은 여성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보니 그곳에는 두꺼운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시종 둘을 거느리고 서있었고 사내는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건달파왕(乾達婆王)을 뵙습니다.”
“가루라왕의 상태는 어떠한가.”
여인의 물음에 사내는 고개를 숙인채 말했다.
“건달파왕께서 조제해주신 약을 드시면 고통이 조금 가라앉는 듯하지만 그나마도 한시진 밖에 효과가 없습니다. 도대체 원인이 무엇입니까? 외상이 크기는 하지만 낫지 않을 상처도 아니고 저렇게 심한 고통이 동반되는 상처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사내의 말에 건달파왕이라 불린 여인은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살기(殺氣).”
“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살기 때문이니라.”
“살기 때문이라니요? 그게 무슨······.”
“그가 저리 심한 고통을 겪는 것은 상처를 통해 스며든 살기에 몸이 저항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생물은 아무리 심한 부상을 입더라도 급소나 사혈을 얻어맞거나 하지 않는 이상 그리 쉽게 죽지 않는다. 더군다나 가루라왕이 입은 부상의 위치는 급소도, 사혈도 아니지. 한데, 그 상처에는 무시무시한 살기가 도사리고 있다. 그 때문에 상처가 낫지 않고 그에 몸이 저항하기 때문에 저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건달파왕은 가루라왕의 상처를 치료했을 때를 상기했다. 독에 당한 것도 아닌데 상처 부위가 괴사하여 마취약을 사용해서 괴사한 부위를 도려내야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상처에 맺힌 살기는 마치 거머리처럼 가루라왕의 상처를 좀먹었고 지금에 와서는 독한 마약(痲藥)을 사용해 고통을 줄여주는 정도밖에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방법이 없습니까? 부디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사내는 목숨을 내놓을 기세로 건달파왕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사부가 저리도 괴로워하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분노가 들끓었으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저 살기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은······, 나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가지 해볼 수 있는 것은 있지.”
“그것이 무엇입니까?”
“저 상처를 입힌 자를 죽이는 것이다.”
건달파왕의 말에 사내의 몸이 흠칫했다.
“분광발도를······, 죽이란 말씀이십니까?”
사내의 말에 건달파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휴우, 어차피 그와 본원은 세불양립(勢不兩立)의 관계. 어차피 죽여야 할 자이니 그것은 문제가 되질 않는다. 다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를 죽인다 해서 가루라왕이 회복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해볼 가치는 있는 것이로군요?”
그의 말에 건달파왕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돌아가 버렸다. 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내 힘으로는 그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 작가의말
이제야 진태백의 행동에 변화가 생긴 이유를 알게 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진태백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과도한 살기가 그를 움직였던 거죠.
덕분에 죽을고비도 넘기고...... 주인공은 굴려야 제맛 아니겠습니까.
연재가 늦었던 이유는 글의 방향을 정비할 필요가 있어서 였습니다.
조금 난잡해진 느낌이 들더군요.
어쨌든 재밌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ps. 추천과 댓글은 필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ps2. 옥황승상님 광성자와 자부진인은 전혀 다른 인물입니다. 한국측에서 보자면 자부진인은 한국의 선(仙)의 시조이며 황제헌원이 최초로 가르침을 얻은 인물입니다. 그가 동쪽에서 자부진인을 만났다는 기록도 있고 말이죠. 만약 광성자가 자부진인과 동일인이라면 동쪽에서 만났다는 이야기는 없었을 겁니다. 만약 그랬다면 헌원은 티벳이나 청해성 쪽의 장족사람이 될테니까요. 또한 이미 헌원의 시대에는 구이(九夷)라고 해서 우리민족이 중국대륙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있을 때 입니다. 어쩌다 한민족이 이리 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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