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루라왕(迦樓羅王)-1
빡!
진태백의 주먹이 덤벼드는 장한의 얼굴에 박힘과 동시에 둔탁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당세평과 함께 약재를 보러나온 와중에 일단의 무리가 진태백과 당세평을 습격했다. 당세평을 찔러오는 검을 주먹으로 후려쳐 박살낸 직후 주먹을 내질러 검을 찔러온 자의 얼굴을 뭉개버린 다음 진태백은 중얼거렸다.
“기습을 하려면 살기를 죽이던지 포위해서 한 번에 찌르던지 할 것이지 이게 뭔지 모르겠군.”
당세평을 향한 공격이 진태백에 의해 막히자 이미 기습의 효용은 기대할 수가 없었다. 호위역으로 따라온 당문의 고수들은 전열을 갖춘 다음 녹피장갑을 끼고 암기와 독을 꺼내들고 있었고 진태백은 그들보다 세 걸음 정도 앞서나와 습격자들을 마주보고 있었다.
‘당문이 지척인 곳에서 습격이라······. 뭔가 야료가 있군.’
이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번뜩이는 무기를 보고 도망친 지 오래. 아무리 오래 걸려도 일각이면 당문에서 사람들이 달려올 것이 분명했다.
“이놈들! 뭐하는 놈들인지는 모르나 감히 당문의 지척에서 노부를 습격하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더냐!”
변변한 무공은 없지만 당세평에게서는 일평생 하나에 평생을 바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위엄이 있었다. 하지만 습격자들은 흔들림 없이 무기를 겨눈 채 그들과 대치하고 있었고 오히려 살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기습을 위함이 아니라 누군가를 묶어두고자 하는 것인가?’
진태백은 습격자들의 의도를 짐작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당세평이 비록 사천당문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는 하지만 그의 강점은 약과 독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지 하독하는 솜씨나 무공은 특출한 곳이 없었다. 또한 호위로 따라온 이들도 당문의 젊은 층에서 인정받는 솜씨라고는 해도 강호상에서는 일류수준으로 그것도 따라온 이들은 여섯에 불과했다. 습격자들은 어느 정도 차이는 있지만 전부 일류수준의 무공을 가진 이들이었고 그 수는 무려 서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서있는 위치는 일정한 방위가 있어 어떤 합격진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분명하다. 이들은 나를 묶기 위해 온 것이다.’
어느 정도 결론이 나자 진태백은 당세평을 불렀다.
“당 어르신.”
“왜 그러는가?”
“어서 당문에 알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시랑보에서 곧 공격이 있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당세평의 말에 진태백은 공력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이들은 저를 묶어두기 위해 보낸 자들입니다. 이미 당문에 공격을 시작했을지도 모릅니다. 서두르십시오!”
그 말과 함께 진태백은 습격자들을 향해 달려들었고 그들도 진태백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시작했느냐?”
희끗희끗한 백발과 흑발이 뒤섞인 청수한 인상의 중년사내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고 그 앞에 부복해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동행하던 당문의 사람들은 당문으로 돌아가게 한 다음 그들과 싸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흐음, 바보는 아닌가 보군.”
“하지만 어째서 이런 방법을······.”
“단순한 힘 빼기일 뿐이다. 이미 약관의 나이에 백열지경에 이르렀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구주구왕과 동급의 고수로 보아야한다. 모용공자? 흥! 그 녀석은 제 할애비의 명성에 의지한 애송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은 아닌지······?”
중년인의 눈이 부복한 사내를 향했다.
“질투하는 게냐?”
마치 폐부를 찌르듯 날카로운 중년인의 말에 사내는 당황한 듯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아니다. 무인이라면 당연히 가질법한 생각이지. 더군다나 같은 연배이기까지 하니 말이다. 허나 너의 무위 또한 이립(而立) 때의 사부를 넘어서느니. 조급해할 것은 없느니라. 목숨을 건 격전을 치러보지 않은 자는 반쪽에 불과할 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가보자꾸나. 진태백이라는 녀석의 얼굴을 보고 싶어 조급증이 나는구나.”
중년인이 일어서자 부복해있던 사내는 일어서며 그에게 가면하나를 내밀었다. 봉황이 새겨진 화려한 가면이었고 이것을 쓰는 순간 중년인은 더 이상 외부에 알려진 모습이 아니라 호결원의 가루라왕(迦樓羅王)이 되는 것이다.
다급하게 달려온 당세평은 곧바로 당호를 만났고 당호는 즉시 경계령을 내리고 진태백의 구원을 위해 사람을 보냈다. 황보세가 사람들과 천수당의 고수 열 명이 진태백의 구원을 위해 당문을 나섰고 그들은 정문을 나서자마자 질풍처럼 달려갔다.
콰직!
검을 들고 달려드는 자의 빗장뼈를 수도로 내리쳐 부수며 그의 가슴을 발로 밀쳐낸 진태백은 숨을 고르며 양손을 편채 습격자들을 겨눴다. 법왕사제와 싸울 당시 호상직을 수라연으로 한번에 격살하지 못한 것에 대해 참오했던 그 이유를 진태백은 살전활(殺轉活)에 이른 자신의 활기(活氣) 때문인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살기건 활기건 결국 마음에 달린 문제였고 이것은 어중간한 경지 때문에 자신 스스로에게 망설임 또는 미련이 생긴 것이었다. 또한 살통천이나 활살분의 경지에서 일격에 목숨을 빼앗을 수 있었던 것은 막대한 살기에 공격을 받은 이들의 정신이 꺾여버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한 일격이라도 한번에 목숨을 빼앗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에 동반된 강한 살기가 살고자 하는 의지마저 꺾어버리기 때문에 일격에 목숨을 잃는 것이다.
살전활이라는 경지는 활살자재(活殺自在)로 가는 길목임과 동시에 가장 불균형하고 불안정한 상태였다. 살기와 활기를 마음대로 가누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부작용인 것이다. 때문에 진태백은 현공대사를 만난 이후부터 어검류(御劍流)의 수법들을 맨손으로 발휘하기 위한 수련을 해왔다. 처음에는 그 수준이 남앞에서 보이기도 부끄러운 수준이었으나 이제는 제법 성과가 있어 그것을 실전에서 쓸 수 있는 정도까지 성과를 얻었다. 때문에 예전이라면 큰 모험이었을 활법을 서른 명이나 되는 적을 상대로 쓸 수 있는 것이다. 살통천(殺通天)의 경지에서는 살기에 대한 장악력이 없다. 때문에 살기를 일으키면 무조건 상대방이나 자신이 죽어야 하는데 활살분(活殺分)에 이르면 어느 정도 살기에 대한 장악력을 얻으며 살전활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살기를 활기로 바꿀 수가 있다. 마지막으로 활살자재에 이르면 살기와 활기의 완벽한 제어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무살(無殺)은 이를테면 불가에서 말하는 해탈(解脫)과도 같은 것으로 죽이지 않고 죽지 않는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무살의 경지는 금강벽에서도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경지. 때문에 진태백은 하루빨리 활살자재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연습을 한 것이다.
‘어느 정도는 성과가 있는 것인가.’
진태백은 자신의 손에 쓰러진 자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실제로 지금 진태백은 살기를 일으키지 않고도 서른 명이나 되는 일류고수들을 상대로 상처를 입지 않고 있었고 중상을 입어 무력화되기는 했지만 죽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앞으로 열다섯이라.’
일각도 채 되지 않아 진태백의 손에 쓰러진 이들은 절반인 열다섯이었다. 하지만 쓰러진 이들의 실력은 버티고 서있는 자들 중 하위에 속해있었는지 수가 줄어듦에 따라 오히려 그들을 상대하기가 까다로워지고 있었다.
후웅.
진태백의 수도가 허공을 갈랐다. 느린 듯 했지만 그 공격을 마주한 자는 뒤로 물러나는 것 외에는 진태백의 공격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움직여야 했다.
‘만검(晩劍)!’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쾌검의 극에 이르러서야 닿을 수 있다는 검도의 최상경지 중 하나인 만검이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의 마음 속에서는 중년이 넘어서도 닿을 수 없던 검도의 출현에 불같은 질투심과 함께 약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궁극의 경지에 닿은 진태백에 대한 경외감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순간 진태백의 몸이 옆으로 움직이며 비명이 들려왔다.
“커윽!”
진태백이 내지른 발이 대퇴부를 밟음과 동시에 신체에서 가장 단단한 대퇴골이 박살났고 동시에 허공에 떠오른 진태백의 칼끝같은 발끝이 목을 찔렀다. 공격을 당한 이는 신음도 못낸채 바닥에 쓰러졌다. 진태백의 공격은 포위 공격을 당하고 있는 이답지 않게 차분했고 습격자들 열여섯을 쓰러뜨렸음에도 호흡은 평온했고 땀한방울 흘리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큰 변화였다. 예전 진태백의 공격이 마치 불과 같이 상대를 침범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종이에 물이 번지듯 무리함이 없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때문에 진태백의 몸놀림은 단순했고, 단순한 만큼 쓸모없는 동작이 없었다. 이것 또한 단(丹)을 형성하게 되면서 얻은 성과였다.
“허, 내가 약관의 젊은이가 움직이는 모습을 아름답다고 느끼다니. 세상 별일이구나.”
가루라왕은 멀찍이 떨어진 지붕위에서 진태백이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호결원 소속의 자신의 부하들보다는 수준이 떨어진다고는 하지만 그가 진태백과 싸우라고 보낸 이들은 하나같이 일류고수에 그 수만 서른이었다. 한데 진태백이 느릿하게 움직일 때마다 분명히 한 명씩 무력화되고 있었다. 그 또한 절정의 고수이니 진태백이 움직이는 모습이 만검이라는 것을 눈치챘고 가면 밑으로 늘어진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죽이기엔 아까울 정도로다. 저만한 자질에 저만한 성취라면 이십년 후의 천하제일인은 분명 저 녀석이 될 것이다.”
가루라왕의 옆에 서있던 사내의 눈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 또한 검을 익힌 검객이었기 때문에 진태백이 어떤 수법을 쓰고 있는지 눈치 챈 것이다. 그의 눈에 피어오른 불꽃은 아직 자신이 닿지 못한 경지에 이른 자에 대한 질시와 증오였다.
“사부님, 제자 청이 하나 있습니다.”
“저자와 싸우게 해달라는 청이면 할 필요 없다. 지금의 네 수준으로는 저자에게 생채기라도 낼 수 있다면 다행이다. 본좌 또한 저 정도의 만검을 쓰는 이를 본 적이 드물다. 심지어 지금은 검도 없이 만검을 펼치고 있으니 저자의 손에 검이 들리면 어떤 일이 생길 것 같으냐?”
“!”
사내는 큰 충격을 받았다. 상대가 펼치고 있는 것이 만검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태백이 손에 무기를 쥐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지는 못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사내는 충격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상대가 어떤 무기로, 어떤 공격을 하는지 파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상대가 맨손이라는 것을 깨닫지도 못했다는 것은 진태백과 그의 사이에 놓인 간극이 그만큼 크다는 말이었다. 제자의 충격을 알아챈 듯 가루라왕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너와 저자가 익힌 검공(劍功)은 비슷한 것이다. 네가 강호를 행도하게 되면 아마도 저 분광발도라는 자가 가장 큰 벽이 될 것이다. 네 자질은 저자와 비교해도 하등 뒤지는 것이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마도 살아온 방식일테지.”
가루라왕의 말에 사내는 정신을 차렸다. 그도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태백은 기억이 나지 않을 당시부터 무담선생에게 무공을 배워왔고 단 하루도 빠짐없이 수련을 해왔다. 그것이 중원에 와서 격전을 겪으며 결실을 맺어 만검에 이르게 한 것이다. 하지만 사내는 정해진 일과에 따라 수련을 해왔고 자신을 위협할 정도의 실력자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여본 적도 없었다. 그의 자질이 나쁘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맡은 일에 있어서는 사부의 신임을 얻었고 뛰어난 무공도 익혔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수련으로 보낸 진태백과는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 이제 가보자꾸나. 이 정도면 저 녀석의 무공에 대해서는 파악이 끝났다.”
가루라왕의 발끝이 가볍게 지붕을 박찼고 그와 동시에 그의 신형은 진태백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 작가의말
드디어 베일에 싸여있던 인물중 하나인 가루라왕이 등장! 재밌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ps.추천과 댓글은 필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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