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짐
이현희의 등으로 남자의 발길이 거칠게 들어갔다. 등을 떠밀리다시피 한 이현희는 데빌을 향해 곤두박질치듯이 튕겨 나갔다.
"연합 놈의 새끼가!"
데빌을 둘러싸고 있던 마인 중 한 명이 이현희를 걷어찬 남자를 가리키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현희는 데빌을 향해 연속으로 소닉 커터를 퍼부었다. 데빌의 피부에 소닉 커터가 닿았지만 약간의 생채기만 남기고 튕겨 나왔다.
이현희는 입술을 꽉 깨물고 재빨리 신형을 꺾었다. 그 순간 붉은 기운이 이현희의 좌측을 스치고 지나갔다. 데빌의 움직임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현희의 어깨가 붉게 변하며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데빌의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데빌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이현희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마인은 자신의 키만큼 기다란 장도를 휘두르며 데빌을 양단이라도 낼 듯이 내리찍었다.
데빌이 그런 느린 공격에 맞을까 싶었다. 그의 공격이 마인의 측면에서 볼 때는 대단할지라도 데빌의 입장에서는 어린아이가 휘두르는 장난감 검보다 못하게 보일 것이다.
데빌이 종횡으로 마구 움직이는데 그 누구도 데빌의 몸에 공격을 명중하지 못했다. 이현희 만이 소닉 커터로 데빌의 형체를 겨우 따라잡았다.
"윽"
마인 한 명이 데빌의 기다란 손톱에 등가죽이 쩍 입을 벌렸다. 시뻘건 피가 콸콸 솟아 나왔다.
"어서 이탈해. 지원군은 아직인가?"
상처 입은 마인은 신속히 전장을 이탈했다. 죽지만 않으면 상처는 얼마든지 치유할 수 있다. 마인의 전투는 항상 이렇게 진행된다. 상처를 입으면 즉시 이탈하여 치료한다. 이것은 마인들 사이의 불문율이다.
상처를 돌보지 않고 싸우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그것이 마인의 인구수를 유지하는 최고의 방법이기도 했다.
이현희는 표독스럽게 자신을 들고찬 남자를 쏘아보았다.
"개새끼가 용기가 없으니 여자 등이나 걷어차고 있지. 씨발놈아. 직접 싸워 보던가?"
이현희의 욕을 들으며 남자는 씩 미소를 지었다.
"저년은 뭘 해도 뒤지지는 않고 운빨 하나 존나 좋아요. 쌍년이."
나는 보기 흉한 말싸움에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눈앞에 미쳐 날뛰는 데빌을 두고 서로 으르렁거리다니 한심한 노릇이다. 언 듯 보니 이현희를 걷어찬 남자는 연합의 마인인 것 같았다.
이런 촉박한 전투에서 연합과 자치령은 단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데빌은 더욱 광분하여 날뛰었다. 양측의 마인은 방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온몸에 손톱자국만 새겨졌다.
나는 여차하면 전투에 뛰어들 요령으로 이블스 플레어의 버튼에 엄지를 올려놓았다. 연합과 자치령이 하나의 적을 두고 대치하는 것은 처음이었고 이현희와 연합의 남자는 앙숙처럼 보였다.
연합의 남자도 이현희 못지않은 대단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상대가 너무 강해서 티가 나지 않을 뿐이지 문정과 상이고람을 능가하는 전투력이다.
데빌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한 명의 가슴에 보기 흉한 상처를 입고 피를 줄줄 흘리며 비틀거렸다. 연합의 남자는 상처 입은 마인을 어깨로 들어 올리며 전장에서 물러났다.
이현희는 데빌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의 비기인 소닉 커터를 연속해서 계속 날렸다.
하지만 데빌은 이현희의 공격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다시 마인 한 명을 잡아채 집어 던졌다.
"비켜 씨발. 허공에다 개삽질이나 하고 있어."
연합의 남자는 거대한 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러댔다. 데빌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니 접근시키지 않겠다는 행동이었다.
"병신 같은 놈, 검도 잘 휘두르지 못하는 새끼가."
이현희는 옆에 있는 마인의 허리에서 검을 뽑아냈다. 데빌이 날아가는 방향으로 움직이며 검술을 펼쳐 냈다. 그것은 내가 이현희에게 업로드 해 주었던 팔괘장에서 팔괘대도의 검술이었다.
팔괘대도는 두루 사방을 방어하면서 공격하기에 특화된 검술이다. 검의 사각을 완전히 지워버린 매서운 검술이었다. 이현희의 손에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아한 검술이 펼쳐졌다.
연합의 남자는 그런 이현희의 모습에서 기가 죽어 버린 듯 혼자 씩씩거리더니 데빌의 움직임을 봉쇄하고자 막무가내로 다가갔다. 나는 녀석이 만용을 부린다는 생각을 했다.
이현희는 데빌이 공격해 들어오는 틈을 정확히 인지하고 방어했지만, 저놈 연합의 마인은 이현희의 현란한 검술 솜씨에 자극받아 막무가내로 덤벼든 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데빌의 손톱에 등을 할퀴더니 발길질 한 번에 뒤로 튕겨 나왔다. 제대로 맞은 듯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내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땅바닥에 볼품없이 처박히더니 먼지를 잔뜩 일으키며 몇 바퀴를 뒹굴었다.
"제기랄!"
그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데빌은 마인 한둘이 감당할 수준의 몬스터가 아니었다.
제대로 싸우려면 합이 잘 맞는 연계 공격이 이루어져야 한다. 무엇보다 저 두터운 데빌의 가죽을 갈라놓으려면 제대로 된 공격을 성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식하게 빠른 데빌의 발을 묶어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 연합과 자치령의 마인은 서로 눈치를 보느라 데빌을 효율적으로 몰아붙이지 못했다.
데빌은 번개같이 움직이며 다시 마인의 한쪽 발을 낚아채듯이 잡아 올렸다. 마인은 비명을 질렀고 이현희와 연합의 남자는 동시에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앙숙은 앙숙이지만 눈앞에서 마인이 죽어 나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마인은 양손으로 남자의 두 다리를 잡고 찢어 버릴 듯이 잡아당겼다.
"으아악"
비명이 이어지는 찰나 이현희의 검이 데빌의 손목을 그었고 연합 남자의 검 또한 데빌의 왼팔에 박혔다. 데빌은 오른손으로 남자를 번쩍 치켜들더니 그대로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그리곤 다시 연합의 남자를 향해 휘둘러 버렸다. 연합의 남자는 기겁을 하고 피하려고 했으나 데빌의 공속이 한 수 빨랐다. 둘이 엉겨 붙어 나가떨어졌고 그 짧은 순간 이현희는 사무라이의 검술로 데빌의 가슴을 길게 베어 내렸다.
역시 아가문드는 아가문드다. 그 두터운 데빌의 가슴살을 벌리고 피를 뿜게 했다.
-크아아아아아
데빌은 무섭게 포효하며 이현희를 향해 양손을 무지막지하게 휘저었다. 그 가공할 스피드는 레더스컬의 송곳 팔보다 수배는 빨랐다.
"큭"
이현희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뒤로 나뒹굴었다가 다시 일어난 연합의 남자는 검을 움켜쥐고 다시 데빌을 향해 날아갔다. 그 돌격 정신 하나만큼은 칭찬해 줄 만했다.
하지만 그의 검은 애꿎은 허공을 갈랐고 그 대가는 참혹했다.
"우왁!"
데빌의 손톱이 가슴을 파고들고 심장을 향해 조여오기 시작했다.
"이런 개씨발!"
이현희는 차분하게 남자의 심장에 꽂혀 있는 팔을 내리쳤다.
-카악
데빌은 이현희의 공격을 받고 남자의 가슴에 박힌 손톱을 뽑아냈다. 이현희의 검을 피했다. 놈이 그녀의 공격을 피한 것은 몇 번 당해보았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인지한 것이 분명했다.
연합의 남자는 갑자기 이현희를 밀치더니 데빌의 앞으로 뛰어들며 가슴에 검을 쑤셔 박았다. 하지만 겨우 검의 끝날 정도만 박혀 들었을 뿐이다. 그도 심각한 부상에 검에 힘을 집중하지 못한 탓이다.
"병신 새끼가."
이현희가 고함치는 순간 데빌이 이번에는 남자의 모가지를 움켜쥐어 버렸다. 남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이 튀어나올 듯이 불거졌다. 목에 엄청난 압력이 가해진 탓이다.
"희찬이 형!"
연합의 마인 네 명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데빌은 그들의 공격을 무시하며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안돼!"
연합 마인의 공격이 무위로 끝나자 비통한 비명을 내질렀다.
데빌의 손에 잡힌 희찬은 버둥버둥하며 몸부림쳤다.
이현희는 인상을 찡그리며 소닉 커터를 날렸다. 마인은 날아오는 소닉 커터를 왼팔로 간단히 쳐내버렸다.
희찬의 얼굴색이 하얗게 탈색이 되었고 버둥거리는 몸뚱이의 움직임이 점점 줄어들어 갔다.
나는 이블스 플레어의 버튼을 눌렀다. 온몸이 화끈해지며 뜨거운 기운이 단전으로부터 확 솟구쳐 올랐다.
그때였다. 나는 중심을 잃고 심하게 비틀거렸다. 갑자기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 것이다. 죽음의 계속에서 만났던 새하얀 날개옷을 입은 그녀의 존재가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환영?
악마화가 진행되면서 잠시 환영을 이 눈 앞에 떠오른 거였다.
"억?"
나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확 와닿는 기분을 느꼈지만, 그 느낌을 이어가지는 못했다. 희찬이라고 불렸던 남자의 몸이 거의 경직에 가깝게 굳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힘껏 데빌을 향해 날았다.
"어?"
또 한 번 놀랐다. 몸이 내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바라는 대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사실 힘을 제어하지 못했다는 것이 옳다. 내 몸은 무지막지한 속도로 데빌을 향해 폭사 되어 나갔으니까.
【신체 능력 폭주 중, 제어함, 차단함, 실패, 불가능, 시퀸스 재설정. 리부트 요망】
언노운도 갑자기 망가진 인공지능처럼 횡설수설해 댔다. 나는 데빌의 안면이 이렇게 가깝게 보일 줄 몰랐다. 나는 일단 희찬이란 남자를 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고 지독히도 못생긴 얼굴에 주먹을 꽂아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지축을 울리는 묵직한 소리. 그리고 '쿵'이라는 소음. 자욱한 먼지. 너무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정보가 함축적으로 압축이 되어 눈앞을 어지럽혔다.
【신체 능력 측정 불가. 수치 맥스. 재설정 요망. 리부트합니다】
우! 힘이 느껴진다. 흥분이 최고조로 치솟고 있다. 무엇이든 다 박살 내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팔과 어깨, 다리 모든 몸뚱어리에 이상한 기운이 폭발하듯이 휘감아 돌았다.
지금까지 악마화가 되면서 느꼈던 그런 종류의 힘이 아니었다. 바닥에 처박혔던 데빌이 서서히 상체를 일으키며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래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 허공에 떠 있는 상태였다. 굉장히 흥분된 상태였는데 데빌을 보니 아주 재미있을 것 같은 기분이 막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데빌은 나를 확인했는지 번개같이 움직였다.
그러나 희한하게 내 눈에 놈의 움직임이 완전히 보였고 그 동선까지 눈 안으로 완벽히 들어왔다. 내 몸은 데빌이 움직이는 동선을 따라 번개같이 움직였다. 그리고 또 한 번 놈의 몰상식한 얼굴이 눈앞에 확 나타났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그 면상에 일 권을 때려 박았다. 주먹에 묵직하게 느껴지는 감각으로 보아 정확하게 놈의 안면에 일격을 가한 것 같았다.
데빌은 내 주먹을 맞고 땅바닥이 꺼질 듯이 박혀 들었다. 이상하다. 분명히 내 능력으로는 이렇듯 데빌을 몰아 부칠 수 없을 텐데? 언노운에게 묻고 답을 들을 겨를로 없었다. 매우 흥분상태의 감정이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아 올랐기 때문이다.
이번 공격에 데빌은 완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놈의 머리통을 향해 미친 듯이 주먹을 내리꽂았다. '텅, 텅'하는 그 울림이 메아리처럼 허공을 가르며 퍼져나갔다.
이현희는 멍한 표정이 되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연합의 마인은 나가떨어져 있는 희찬을 일으켜 세웠다.
반응이 없자 나는 슬며시 화가 났다. 왜 이리 약한 것인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심하게 가려웠다. 정확히 양쪽 관자놀이가 매우 가려웠는데 무의식적으로 긁었다.
아까 데빌이 희찬의 모가지를 틀어쥔 것처럼 데빌의 모가지를 움켜잡고 들어 올렸다. 굵직한 모가지가 한 손에 잡히지 않아 의식적으로 힘을 주었더니 목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이놈은 왜 갑자기 이렇게 축 늘어진 거야? 나는 놈을 깨우기 위해 마구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현희가 외쳤다.
"뭐해? 빨리 죽여 버려!"
죽이라고 아깝잖아? 좀 더 가지고 놀고 싶은데? 나는 놈을 바닥에 힘껏 패대기쳤다. 흙먼지가 회오리처럼 피어올랐다. 그 충격에 정신이 들었는지 데빌은 괴성을 지르며 나를 향해 정면으로 날아왔다.
반월륜도 아가문드도 꺼내지 않았다. 놈을 상대하는데 맨주먹으로 충분했다. 내 움직임이 데빌을 따라, 아니 압도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다. 대결을 바라보고 있는 마인의 표정에 내가 얼마나 빨리 날아다니고 있는지 나타나 있었다. 나는 가차 없이 데빌을 두드려 팼다.
"이런! 미친! 저 친구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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