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옥이란 곳은?
연옥이란 곳은?
나태의 제왕 벨페고르
이 도시를 휩싸고 있는 감정은 게으름.
이 정도의 농축된 감정이라면 악마들이 탐을 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난 뭔가 느낌이 다르다는 것이 느껴진다.
예를 들면
내가 삼겹살을 아주 좋아하는데 무쇠 솥뚜껑 위에서 때깔 좋게 잘 구워진 삼겹살을 보면 입안에 저절로 침이 고이고 먹고 싶은 욕구가 팽만하게 된다.
그런데 삼겹살 비슷한 고기가 구워지고 있는데 역한 비린내가 나며 고기 또한 진짜 돼지고기가 아니고 추측 불가능한 고기라면? 아무리 고기를 좋아해도 먹고 싶은 충동은 전혀 일어나지 않을 거고 오히려 거부감이 커지겠지?
딱 지금 그 느낌이다. 왠지 먹으면 탈이 날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내가 이 정도니 악마에게 이 감정은 썩은 음식물 같은 것일 거다.
왜 그럴까?
나태와 게으름은 비슷한 감정이 아닌가?
언노운이 이렇게 말했다.
결과의 차이가 둘의 개념을 가른다고.
나태는 무관심, 부주의한 태도다. 대상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거나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다. 주어진 일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거나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이 나태의 결과로 이어지며 실수, 의무 불이행 등으로 인한 문제라는 결과가 나온다.
게으름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거나 활동을 꾸준히 하지 않음으로써 특정 작업을 수행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일을 하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비롯되며, 일할 의사가 없거나 그것에 관심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즉 나태는 주로 부주의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가리키며 게으름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거나 열의를 보이지 않아 일을 수행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문제를 발생시키는 결괏값을 확실히 가지는 것이 나태며 게으름은 상태를 말하기에 악마가 보기에 둘의 차이점은 크다. 게으름은 악마조차 혐오하는 감정이라는 것을 오늘 알았다.
나태는 결괏값이 분명하기에 모으기도 쉽고 인간을 나태하게 만들기도 쉽다. 하지만 게으름 좀 피운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는 것은 없다.
즉 선악의 구별 점이 모호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나태는 악한 감정이다. 나태한 인간은 악한 인간이라는 명제를 내세울 수 있지만 게으름 좀 피운다고 그 인간을 악한 인간이라고 판정하기는 어렵다.
착하고 선한 사람도 게으름을 피울 수 있다. 단지 그 게으름이 좀 심한 인간은 문제가 된다.
이렇게 농밀한 감정이 쌓인 것을 보니 얼마나 많은 인간 영혼이 이 도시를 거쳐 갔는지.
아마 연옥이 생기고 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축적된 감정일 거다.
이런 싸이킥류에 속하는 감정의 방어는 인셉션 필드가 제격이다.
필드를 펼치고 도시 아래로 하강했다.
'가면의 단서를 찾는 것이 먼저야. 해 줄 조언은 없어?'
【아직 단서는 잡히지 않습니다. 당신의 행동 여부에 따라 어떤 단서가 나올지는 지금 상황에서는 알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내가 무슨 짓을 하면 그에 따른 단서가 나타날 거라는 이야기지?'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시라고 하지만 이건 뭐 거의 국가 단위를 넘어서는 광활한 지역이다.
왜 이곳이 이렇게 근현대적 도시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곧 풀렸다.
현시점의 지구가 발전하는 역사의 흐름과 같이 연옥의 환경도 같이 구현된다.
즉 연옥은 인간의 역사와 같이 발전한다.
그리고 게헤나와 가장 큰 차이점은 게헤나는 우주를 초월해 오직 하나만 존재하는 차원이지만 연옥은 차원마다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연옥은 현재의 내가 존재하는 태초의 차원에 속한 연옥이라는 것이다.
"지독하군. 진짜 중독될 수 있겠는데."
도시 내부에는 더 지독한 게으름이 깔려 있다. 이 정도 농도라면 그 어떤 인간도 한 모금만 흡입해도 바로 중독될 거다.
거리에 사람이 없다.
대부분 집안에 처박혀 있을뿐. 인종, 나이 구분 없이 마구 뒤섞여 있다.
도시가 운영되는 원리는 간단했다.
먼젓번 도시에서는 감정이 없어서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곳은 뻔하다. 이 도시는 게으름을 원료로 운영이 되며 재생산 과정이 필요 없는 도시기에 겉모습만 도시인 것이지 사실은 이곳도 죽은 도시다.
도시 스타일도 제각각이다. 지구 모든 지역에서 볼 수 있는 그런 특징이 다 들어 있고 그 크기 또한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넓다.
지구와 질량과 중력이 같을 뿐 대륙과 대양이 따로 존재하는 곳은 아니다. 불필요한 것 즉 바다 같은 것은 아예 없다.
오직 거대한 도시만 어떤 경계점을 두고 붙어 있는 것 같다.
가족 구성원도 제각각이었다. 흑인, 동양인, 백인이 모두 섞여 있는데 딱히 가족이라고 표현하기도 어정쩡하다. 단지 한 아파트 안에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으니 그런 것 같다 하고 느낄 뿐.
잠시 조사차 우연히 들어오게 된 이 아파트의 구성원은 외부 사람이 들어오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다.
이들 모두 영혼인 것은 알지만 스스로 그 사실을 인지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게으름이 흐르는 도시인 걸 알지만 이들은 확실히 나태와는 차이가 있다.
게으름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태는 하지 않는다는 전제조건이 붙지만 게으름은 일을 하되 말이 안 되게 느리다는 것이다.
가령 중년 여성은 청소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 속도가 엄청 느리다는 것이고 바닥 한 번 쓸더니 커피 타서 한 잔 마시고 여유를 만끽하고 난 뒤 또 바닥을 한 번 쓰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남자는 거실에 앉아 TV 리모컨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그는 가끔씩 탁자 위를 힐끔거리는 데 그 남자는 부인을 도와줘야 하는데 귀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흑인 여자아이는 집중을 못 하는 것 같다. 책상과 침대를 번갈아 이동하는 것으로 보아 공부에 집중하고 싶은데 귀찮아서 침대에 누워 있다가 다시 일어나 책상에 앉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18살 정도 되어 보이는 마른 체구의 청년은 자기 방에 큰 대자로 누워 있다. 무얼 하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다. 누워 있는 그것조차 귀찮은지 잠시 일어섰다가 다시 눕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다.
우연히 벽시계를 바라봤다. 벽시계의 시간과 이어링의 시간이 똑같았다.
'언노운 여기 시간은 현실과 같지?'
【그렇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게헤나였다면 시간 걱정에 스트레스를 받았을 테니까.
그리고 악마 또한 단 한 마리도 검색되지 않았다.
문제는 이렇게 인간 영혼만 있다는 것은 뭔가 위험이 닥쳤을 때 대비책이 부실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
따지고 보면 나는 엄연히 침략자다. 허락 없이 연옥에 들어온 불청객이다.
연옥은 릴리스와 그녀의 딸인 릴림이 관리하는 곳으로 그 두 존재는 확실히 악마라고 단정 짓기에도 뭣한 묘한 위치에 있는 자들이다.
물론 성향은 악이지만 악마의 본성을 백 퍼센트 가진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예전에 여기서 릴림 중 한 명을 만난적이 있다. 그녀는 나를 아예 친아들로 생각하고 대했고 나도 진짜 어머니인 줄 알았다.
아무리 악마가 출입하지 않는 곳이라고 하지만 이런 허술한 방비는 이해할 수가 없다.
악마가 어디 출입하지 말라고 해서 안 들어가는 놈들이 아닌데 말이다.
릴리스라면 분명 내 존재를 파악했을 텐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관심이 없거나? 그럴 일은 없을 테고···. 사고 치지 않을 거란 걸 알기에 내버려 두는 것이거나.
눈치채지 못했을 리는 없고 일단 놔둬 보려는 것일까?
멍한 눈의 청년은 천정을 응시하다가 다시 어기적어기적 일어선다. 그리고 주위를 몇 번 둘러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약간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드러눕는다.
나를 인식했지만 묻기 귀찮다는 듯이 드러누웠다. 여기 있는 사람은 모두 나를 인지했지만 뭐라고 말을 걸지 않는다. 귀찮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기 권능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음이 있다.
범죄율 제로.
누군가 집에 침입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강도짓이 귀찮기 때문이다.
그저 숨 쉬는 것이 전부인 영혼이다.
이 낯선 방문객을 인지는 하고 있고 궁금증이 일었으나 귀찮아서 묻지 않는 것이다.
살짝 접근해 녀석의 몸을 감싸고 있는 권능을 밀어냈다.
움찔한다.
권능이 밀리긴 한다. 당연히 신성력으로 미는 것이니 안 밀릴 수 없겠지.
좀 더 밀어냈다. 녀석은 이제 온몸을 부르르 떤다.
머리 아래로 밀어내는 순간 녀석이 말했다.
"Could you tell me a bit about who you are?"
라틴어가 아닌 영어다. 내가 물었다.
"Are you an American?"
얼굴을 찡그린다. 뭔가 기억이 잘 안 나는 모양이다.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나라는 많지만, 억양을 보니 미국인일 거야. 추측이지만."
"그래요? 그런데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이름이 어떻게 되니?"
"이름···. 글쎄요. 내가 누굴까요?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요. 난 도대체···. 여기가 어디죠?"
"네 방에 누워 있으니 네 집이 아닐까?"
"그래요? 여기가 제집입니까? 그럼 일단 안심이네요."
"이름 기억나지 않아?"
"네, 정말요. 당신은 저와 관계있는 사람입니까? 제 가족입니까?"
녀석에게서 권능을 완전히 밀어냈다. 물론 본인이 가진 기본적인 권능은 영혼 그 자체라 밀어 낼수 없지만, 도시를 감싼 칙칙한 게으름은 깔끔히 밀어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금세 침범하려 하기에 녀석의 몸에 인셉션 필드를 걸었다.
하긴 이곳은 연옥이니까 이미 죽은 사람이고 전생의 기억은 모두 사라진 상태일 거다.
궁금했다. 그의 성정은 선하다. 악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저번 도시에서도 마찬가지로 대체로 선한 축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 과거를 알아낼 수 있을까?'
【이 영혼의 전생 기억은 이미 지워진 상태입니다. 물론 강제로 기억을 끌어낼 수 있지만 될 수 있으면 이대로 놔두는 것을 권고합니다】
하드로 치면 공장 초깃값으로 포맷된 상태라는 소리다.
그리고 아주 기초적인 능동적 자료만 세팅된 상태인데 그래서 영어로 대화할 수 있었다.
지적 수준은 나이에 맞게 세팅된 것 같다.
'혹시 타임 슬레이어를 사용하면 어떻게 되지?'
7고리 잠자는 거인의 언덕에 있던 고대신의 파편에서 습득한 능력이다.
시간 간섭
접촉한 대상의 시간을 마음대로 제어하는 기술
시간이 언제가 되었던 대상이 죽을 때까지 시간을 흘러 버릴 수 있다.
대상의 세포가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 걸리는 죽음의 시간을 초 단위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반대로 거꾸로 시간을 돌려 대상의 나이를 줄일 수 있고 아예 난자와 만나기 전의 정자의 상태로 또 그 정자가 생성되기 전의 세포까지로 회귀시켜 버릴 수 있다.
【물리적 대상물이 아닌 영혼에도 적용이 될지는 알수 없습니다. 다른 차원에서의 정보가 열람하지 않아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수 없습니다】
'그럼 해 보면 되지.'
타임 슬레이어는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은 기술이다. 타임 슬레이어라는 명칭도 다른 차원에서 사용하던 기술 이름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다차원이라도 기술명은 공통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녀석의 손을 잡았다. 인간의 외형을 구성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영혼이다.
손에 잡히는 감각이 진짜인 것은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며 실제는 감각이 없는 것이 맞다.
심층 다이브와 하는 느낌이 거의 같다.
녀석의 시간을 천천히 되감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읽히지 않는 흰 백색이었다가 갑자기 화면이 한 번 치지직 거리더니 뚝뚝 끊어진 장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오. 된다."
첫 장면이 바로 이 청년이 죽는 장면이다. 시간을 거꾸로 돌렸기에 첫 장면이 죽음의 장면일 수밖에 없다.
지저분한 방안. 청소를 얼마나 하지 않은 것인지 방 안은 엉망이다. 청년은 지금 모니터 앞에 앉아 있다. 게임을 하는 모양이다.
엎어져 자는 자세. 그건 죽음 이후의 자세다.
상체가 일어나고 게임에 열중한다. 멍한 눈빛. 외모는 지금 모습과 같다. 책상 위 커피잔은 비쩍 말라 있다. 언제 먹었던 것인지 모를 구겨진 햄버거 포장지 하나.
녀석은 이 상태로 게임 하다가 엎어졌고 그대로 숨이 멎었다. 사인은 심부전.
시간 속도를 빨리 감자 장면이 빠르게 지나갔고 여기가 미국 캘리포니아라는 것도 알았고 서전 임펙트가 일어나기 10년 전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이 청년의 이름은 제이미 그의 일상이 빠르게 지나갔는데 너무너무 게을렀다. 학교도 빼먹고 가지 않는 날이 많았고 사교성은 제로에 외톨이였다. 형제는 큰형과 여동생이 있다.
가족은 대체로 화목한 가정이고 아버지는 은행원 어머니는 주부이다. 그가 성장하는 과정을 역순으로 되감기 하고 있는데 정말 게으름 하나는 타고난 것 같이 살아왔다.
그리고 아기 때 어미 젖을 빠는 장면이 나오고 첫 세상 밖으로 태어나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이 나왔다. 더 감았다. 잠시 화이트 노이즈가 끼어들더니 다른 환경이 나타났다.
'갑자기 뭐지? 어라? 여기 연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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