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비스 게이트
어비스 게이트
불야성으로 낮과 같은 밤거리 수많은 악마가 제각기 환락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아무리 악마라고 해도 4고리에서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이렇게 악마가 많은 곳에서 무모하게 덤비는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추악한 능력을 지닌 이것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작 부릴 확률이 높다.
크로포드 같은 경우는 특별한 케이스라 할 수 있겠지. 녀석은 자신의 권능에 딱 어울리는 행동 양식을 보여주는 경우다.
스쳐 가는 놈들이 힐긋힐긋한다. 소문을 듣지 못했던 악마라도 완벽한 인간의 모습으로 다니는 악마는 흔하지 않으니까 힐긋거리는 거다.
4고리는 저급 악마도 눈에 띄지만, 기본적으로 본능에 굴하지 않은 인지 능력을 다 갖춘 악마다.
단지 뭐라도 콩고물이나 떨어질까 기웃대는 것들이 많고 고위 악마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이런 거리를 구경이나 하듯이 활보하지는 않는다.
할 일 없고 건수 구하는 놈들이 90% 이상이라고 보면 된다.
4고리도 엄청나게 넓고 수많은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몇백년을 돌아다녀도 다 구경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끝없는 넓이를 자랑한다.
그렇다 보니 서로 적다고 하는 교단끼리 굳이 같은 구역에 있을 필요가 없다.
"여깁니다. 혹시 칩을 가지고 계십니까?"
4고리에서 통용되는 것은 칩이라는 간단한 계산 도구인데 실제로 금화와 같은 이치다. 몇몇 교단이 처음 실행한 이래 4고리에서만 통용되는 화폐로 굳어졌다.
경제관념이 없으면 공급자도 없을 것이고 그러면 수요자 또한 없을 것이니 환락가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칩이란 공용 화폐가 필수가 된다.
칩을 사들이는 것은 자신의 권능은 태우거나 교단에서 상당한 지위로 인해 공짜로 받아쓰거나 무일푼이라면 도박으로 벌 수도 있다.
나는 다행히 후자에 속해 바알의 성에서 상당한 양의 칩을 받아 나왔다. 이 칩은 하급 놈들에게는 환장하는 아이템이다.
각 칩에는 교단에서 발행하는 직인이 찍혀 있는데 이렇게 쓰인 칩이 일정량 모이면 해당 교단에 반납하며 교단이 정해 놓은 금액대의 아이템이나 영혼을 취득할 수 있다.
그것뿐만 아니라 칩의 활용도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정보와 교환해도 되고 원하는 것과 바꿀 수도 있다.
그러니 교단에서는 타 교단의 칩을 버는 것을 중요하지, 자신의 칩이 4고리에 유통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진 않는다. 그건 다른 교단에서 마찬가지. 그래서 칩의 활용은 크게 제한되어 있고 교단 내 최상위급이 아니라면 함부로 지급하지도 않는다.
내게 주어진 것은 백 칩. 각료 이상에게 지급하는 최상급 혜택이다. 백 칩을 가지고 있다고 소문이 나면 어떻게 하든 훔치려고 야단일 거다. 소매치기는 기본 중의 기본인 세상이니까.
백 칩이 딱 인간 수확장에서 인간 영혼 한 개와 교환 할수 있는 최소 단위다.
물론 고위 악마 각료 정도 되면 레벨이 차원이 달라서 함부로 대하거나 주변으로 알짱거려도 잘못하면 소멸하는 터라 그 권세가 막강하지만 인간 외모의 나는 전혀 다른 묘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언제든 불편 없이 접근할 수 있고 백 칩은 물론 걸린 현상금이 순수한 영혼 천 개이니까.
미치지 않는다면 정상이 아니지. 그냥 길가에 호박만 한 황금 덩어리가 굴러다니는 것과 같은 느낌일 테니까.
이곳 지리는 크로포드가 빠삭하게 꿰고 있었다. 구역 이동은 간단한 전송 장치를 사용하는데 이 전송 장치는 각 교단에서 공동 투자된 권능으로 만든 장치다.
난 따 봐도 이게 공간 전송 장치인 것을 알았다. 던전의 입구로 들어가는 게이트와 구조적으로 완벽히 같았기 때문이다.
교차로 악마의 다크 로드에서 차원 이동 구조를 제거하면 이 공간 이동 장치와 흡사하다.
"여기가 칩 투입구입니다. 한 칩만 해도 1년 정도 이용하시는 데 걱정이 없습니다요."
4고리가 워낙 넓다 보니 이렇게 게이트 이동 장치를 활용하는 것은 악마답지 않은 생각이긴 하다. 4고리가 다른 고리와 다르게 지옥에서는 아주 특별한 장소인 만큼 각 교단에서 투자를 아끼지 않는 결과였다.
빠르게 원하는 곳으로 이동해서 칩을 쓰게 만든다는 간단한 이치.
공통된 규칙이 있고 그 규칙 내에서는 교단을 떠나 어떤 악마도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런 곳에 소비된 칩은 4고리 운영과 발전에 쓰인다. 그러니 이곳에서는 칩의 전쟁이 심각하게 벌어진다.
교단 입장에서는 타 교단의 칩을 끌어와야 좋고 자신의 칩 소비는 최소화되는 것이 경제적 이득과 기득권이 함께 따라오기 때문이다.
내가 공작의 신분이라면 열 칩 정도가 한계일 텐데 백 칩을 내어 준 것은 아무래도 교단에서 무슨 명령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나를 시험하는 것일 수도 있고···. 물론 백 칩을 싹 다 날려 버린다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악마는 없다.
"여기 직인을 찍으셔도 되고 진명을 작성하셔도 됩니다. 넣은 칩에 따라 충전이 됩니다."
크로포드는 내가 여기 문물에 생소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만큼 나에 관한 정보가 세세하게 퍼졌다는 것이다.
당장 수작을 걸지 않는 것은 내가 가진 낙인 때문이다. 특히 루시퍼의 낙인이 가지는 무시무시한 효과는 악마들조차 쉽게 움직일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내가 만약 루시퍼나 바알이나 몰렉의 낙인이 없다면 지금 당장 덤벼들어도 어색하지 않을 풍경이다.
전부 눈치만 보고 있다. 그만큼 이들 낙인의 위력은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만약 덤볐다가 죽도 밥도 안 되면 그 뒷감당은 차마 입에 올리기 힘들 정도니까. 그건 세 교단을 상대로 한 도발일 테니까 말이다.
아무리 순순한 인간 영혼 천 개가 탐이 나지만 쉽게 행동 할수 없는 이유이다.
게이트 앞에 충전기가 있다. 크로포드가 먼저 시범을 보인다. 둥그런 타원형 기둥에 왼손을 넣고 권능을 일으키고 자신의 진명을 말하면 자동으로 등록이 되는 모양이다.
같은 오만의 권능을 가지는 악마라도 차이가 있다. 권능은 악마의 지문과 같다. 자신의 권능을 등록시키고 진명의 소환식을 매칭시키면 등록이 되며 그다음 칩만 있으면 4고리 어디든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다.
크로포드가 가르쳐 준 대로 게이트, 정확한 명칭은 우리말로 황천문으로 어비스 게이트다.
알다시피 게헤나의 만국 공용어는 라틴어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최초의 언어이자 만국의 언어로 라틴어가 공용이며 라틴어만 알고 있으면 악마 간 소통은 문제가 없다.
당연히 라틴어 외에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언어도 즐비하다. 우주 모든 장소에서 모여든 악마들이기에 서로 익힌 언어가 다 다르다. 하지만 라틴어만큼은 공용이다.
라틴어를 공용어로 만든 것이 타락 천사들이라 한다. 우리가 라틴어로 부르지만, 실제는 천사어에서 유래된 언어다. 타락 천사들이 게헤나의 주요 실권을 장악하면서 이 라틴어 즉 악마어가 탄생 되었다.
등록이 끝나자 라틴어로 아라곤이란 단어가 떠 올랐다.
"한 번도 안 가보신 곳이라 제가 모시겠습니다."
한 번도 안 가본 곳에는 갈 수 없다는 것도 황천문의 특별한 관행 중 하나다. 그건 최고위급 악마도 마찬가지다. 보통 최고위급 같으면 길잡이를 데리고 다닌다.
길잡이는 4고리 머물려 곳곳을 다 싸돌아 다니며 온리 포인트만 따 놓는 악마를 말한다.
4고리 게이트 포인트가 약 십만 곳 이상이 되는데 정확히는 얼만지 알수가 없다. 계속 신생 게이트를 만드는 악마가 있으니까.
네임드 길잡이 정도 되면 십만 포인트를 거의 다 찍은 놈을 말한다.
"너 포인트 몇 개 정도 찍었어?"
"5만 개 조금 넘습니다요."
"나쁘진 않네. 받아."
-휙
칩 한 개를 던져 주었다. 받아 든 녀석의 표정이 확 풀어진다.
칩 한 개 모으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것도 파리 교단의 칩이면 말할 필요도 없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리. 헤헤."
녀석은 바로 게이트를 열었다.
"저를 따라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헤헤."
연신 비굴한 웃음을 흘리던 크로포드는 게이트를 통해 사라졌다.
나도 곧 게이트 안으로 뛰어들었다.
만약 크로포드가 사기를 칠 요령이면 엉뚱한 곳으로 나를 데려가겠지. 크로퍼드에게도 순수한 인간 천 개는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자, 여기가 바로 크림슨 베일입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곳은 피의 교단이 지배권을 가진 지역입니다."
녀석은 정확히 핏빛 목가라 불리는 크림슨 베일로 안내했다.
먼젓번 바알의 성이 있는 지역은 게헤나 최대의 환락가 망각의 마천루가 있는 임메모타리오 케리스칼피움이다.
이곳 핏빛 묵가는 케리스칼피움에서 한 참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피의 교단 악마들을 한 안전 거주지역인데 쉽게 말해 일종의 휴양소 개념으로 꾸며진 곳이다.
대부분 피의 교단 출신 악마가 거주 중이긴 한데 출입은 어느 악마나 다 할수 있고 각종 위락 시설도 이용할 수도 있다. 당연히 칩만 있다면 말이다.
참고로 칩은 4고리에서만 통용되며 다른 고리에서는 활용도는 없다. 이처럼 4고리만 특별히 관리하는 것은 악마에게도 휴양이 필요하고 탐욕과 쾌락을 추구할 수도 있는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웬만하면 싸움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다른 고리에서 타 교단 악마끼리 만나면 싸우거나 힘의 우세에 따라 한쪽이 고개를 숙이게 되는데 4고리는 오로지 칩이 우선이다.
계급이 높더라고 칩을 많이 가진 저급 악마가 칩에 따른 혜택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죽자 살자, 칩을 구한다. 보통 4고리에 머무는 악마는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다른 고리로 가지 않는다. 즉 4고리에 눌러앉아 사는 것이다.
원하는 꿈도 꿀 수 있고 악마로서 추구할 수 있는 모든 기쁨과 쾌락이 모두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크림슨 베일로 말씀드리자면···."
그래서 딱히 피의 교단 지역이라고 해도 파리 교단 악마가 못 올 곳은 아니며 칩만 있다면 그에 해당하는 서비스를 충분히 받을 수 있다.
크로포드는 핏빛 목가에 대해 자세한 브리핑을 해 주었다.
물론 이곳에 온 목적은 위스퍼모어란 악마를 만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놈은 피의 교단 소속이다.
크로포드는 한시라도 쉬지 않고 조잘조잘한다. 처음에는 오직 내 사역마가 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지만 칩 한 개를 받자마자 확실히 패턴이 바뀌었다.
손해 보는 일은 몸서리치며 하지 않는 악마들의 세계에서 대가 없는 행동은 없기 때문이다. 이제 귀한 파리 교단 칩을 받았으니, 녀석은 기브 앤 테이크에 준하여 내게 칩 한 개 분량의 서비스를 해 주는 것이다.
이곳에도 위락 시설은 많다. 사창가, 도박은 기본에 호텔, 듣도 보도 못한 편의 시설 등 악마를 위한 최상급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피의 교단은 수장은 칠죄종 중 한 명인 벨페고르인 만큼 이곳은 시설은 특별하다.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다는 4고리에서 몇 안 되는 최고급 휴양지이다.
"저기 뾰족하게 솟은 첨탑이 보이시죠. 이곳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가진 커럽션 오아시스가 있는 곳입니다. 순수 벨페고르님의 권능으로 지어졌다는 곳입죠. 한번 들어가면 빈털터리가 되어 쫓겨 나오기 전까지 나올 수 없는 곳이라는 말이 전해 집니다요."
벨페고르의 권능이 나태다. 타락의 휴양지에 들어서는 순간 벨페고르 나태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러면 끝장이다. 자신이 가진 모든 칩을 소비할 때까지 나태에 빠져 허우적댄다.
커럽션 오아시스에 갖춰진 위락 시설은 악마에게 최상급의 쾌락을 제공한다. 그 쾌락에 빠지면 웬만하면 빠져나올 수 없다.
4고리는 낮이 없다. 오직 밤만이 존재하는 곳. 여기도 마찬가지다. 거리거리마다 호화롭게 걸린 붉은 조명이 그것을 말해 준다.
피의 교단답게 모든 것이 붉은색이다. 화려한 조명조차 핏빛을 뿜어낸다. 그로테스크한 풍경은 진짜 내가 지옥에 있다는 기분을 들게 했다.
"위스퍼모어는 어디에 있지?"
"제가 모시겠습니다. 저만 따라오시면 됩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어디를 가나 똑같아. 뭔가 신기한 것을 바라보는 눈빛. 하지만 다른 점이 있는데 여기는 호기심뿐이라는 사실이다.
"여긴 내 소문이 아직 퍼지지 않은 것 같은데?"
피의 교단 지역이라고 해서 살짝 긴장했지만 케피스칼피움의 악마보다 훨씬 눈빛이 죽어 있다.
그곳에는 내 소문이 퍼져 있어 잡아먹을 듯이 나를 보는 눈빛이 몇몇 있긴 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기서는 그런 눈빛이 아예 없다.
아주 신기한 놈이 왔다는 의미의 눈빛이 전부이다. 피의 교단 악마뿐 아니라 타 교단이나 무소속의 악마들도 많다.
길거리 좌우는 모두 편의 시설이다. 지옥에서도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고 식탐이 강한 악마는 온종일 퍼마시기만 한다. 좌우가 다 그런 악마를 위한 음식점이다.
"여기로."
앞서가는 크로포드는 휘파람까지 불어 댔다.
놈이 정말 나를 위해 움직이는 건지 뭔가 꿍꿍이가 있는지는 알수가 없다.
현재까지는 길잡이 구실을 열과 성을 다해 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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