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옥의 도시
연옥의 도시
'다른 차원에서 같은 환경 대조 비교 분석해봐.'
【같은 환경이라고 해도 행동 하나에 따라 각기 다른 변수가 발생합니다. 늘 말했다시피 그 변수를 모두 포함한 계산은 무의미합니다】
악마도 없고 그 외 다른 존재도 포착되지 않는다.
이곳은 갈 길 잃은 영혼들의 집합소 같았다.
길 가는 사람들에게서 단 한 올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 도시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 걸까?
한 사내 뒤를 따라갔다. 정처 없이 움직이는 사람들, 그들은 아무런 목적의식이 없는 듯 보였다.
즉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목적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걷는다. 이 도시를 빙글빙글 돌고 있다.
건물 내부에도 사람들은 있다. 소파에 앉아 나오지 않는 TV를 바라보는 사람, 업무에 치중인 사람, 복도를 물걸레로 밀고 있는 사람, 전화 통화하는 사람, 운전하는 사람, 햄버거를 먹는 사람, 커피를 마시는 사람.
셀 수 없는 사람이 저마다의 행동을 하고 있지만 그 행동을 영원히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사람들 눈에 활력이 없다. 두 눈은 초점이 없고 텅 빈 무의미한 공간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몇 번 더 조사해 보니 이 영혼들은 자아가 없는 것 같다.
마치 프로그래밍한 대로 움직이는 기계인형 같다.
한 사람을 들어 다른 위치로 옮겨 놓기도 하고 건물 내부에 있는 사람을 밖으로 꺼내 보기도 하고 여러 가지 테스트해 봤다.
희한한 것이 그들은 어떻게 하던 자기 자리를 찾아 되돌아간다.
'왜 가이아와의 연결이 끊어진 거지. 영혼 대부분은 재탄생을 위해 가이아로 접속하지 않나?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인간이잖아? 수없는 테스트의 결과물이기도 하고.'
【모든 실험에는 변수가 발생합니다. 첫 번째 실험에서 나온 변수가 바로 연옥입니다】
'그래서 메타킷이···, 그럼 연옥은 메타킷 때문에 만들어진 거냐?'
【그렇습니다. 무의미한 존재. 사후세계관이 없다고 믿는 무신론자들. 죄를 짓지 않았지만, 존재 자체의 의미를 잃어버린 자들. 아스트랄계와 접속이 끊어진 자들은 가이아에게 탑승하지 못하고 자기 생각의 무게에 밀려 의미 없는 연옥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사막의 유사에 빠지는 것처럼 스스로 만든 늪에 빠진 영혼들입니다】
'레이 너는 연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길 잃은 영혼들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스스로 자각하여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면 가이아에 편승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종말이라고 믿는 자들이며 생명의 순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악마야 그렇다 치고 천사들은 왜 연옥을 그냥 방치하는 것이지? 천사라면 얼마든지 대안을 만들 수 있을 텐데?'
'협정 때문입니다. 서로 건드리지 않겠다고 협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어기면 연옥은 대파란의 한 가운데에 있게 됩니다. 악마도 그것을 알기에 이곳을 건드리지 않는 겁니다. 연옥이 무너지면 그 손해는 막강하니까요.'
'그럼 연옥은 그냥 이대로 누구의 간섭없이?'
'아뇨. 연옥은 단 한 존재에만 허락 돼 있습니다. 그건 생텀 의회와 게헤나 간에 상호조약으로 협의가 끝난 내용입니다.'
'연옥을 관리하는 자가 있다는 거야?'
'네, 만인의 어머니. 최초의 여인 릴리스입니다. 오직 그녀와 그녀의 딸만이 연옥을 드나들 수 있으며 이곳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만은 생각보다 다르네. 릴리스라면 악마의 어머니이기도 하지 않나?'
'생텀 의회에서 볼 때 그녀는 묘한 위치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녀는 완벽한 악마라고 정의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어째서? 그녀는 아담을 만들고 난 다음 흙으로 빚어진 인간이 아니었던가?'
'인간의 성서에서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상상에서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당시 첫 성공 사례인 아담에게 많은 감정이 부과되었습니다. 아스트랄계에는 다양한 감정이 있습니다. 수많은 감정에 대응하기 위해 인간인 아담의 감정도 풍부해져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절대적인 감정이 생겼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감정이라면 쾌락이지. 수면욕, 식욕, 성욕이 이잖아.'
'그렇습니다. 인간인 아담이 반드시 해야 할 것들 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것에는 절대적인 감정을 주입했습니다. 인간은 먹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합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 강제성을 더한 거네. 성욕은 번식을 위해서 필요했고?'
'그렇습니다. 다른 부분은 홀로 가능했으나 성욕만큼은 유지하기 힘들었죠. 당시 첫 번째로 성공한 사례인 관계로 데이터 정립 시간도 필요했고 당장 배우자를 만들기는 힘든 상황이었죠.'
'그래서 대타를 구한 것이 릴리스였군. 그럼 그녀는 유전자 개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야?'
'네, 당시 에덴 근처에 있는 토착 지성체를 붙잡아 와서 급히 개조하여 만들어진 것이 릴리스입니다.'
'토착 지성체면 토착신인데?'
'당시는 아직 자가 인식도 못 한 흔한 떠돌이 지성체였죠. 우연히 천사의 눈에 띈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브가 제조되기 전 아담의 성적 욕구 풀이 대상으로 투입된 거네.'
'그렇다고 봐야겠죠. 그리고 에덴에서는 릴리스를 통해 종족 번식의 실험도 실행되었는데 릴리스가 모두의 어머니라도 불렸던 이유는 그녀에게 아주 특별한 자궁이 제공됐기 때문이죠. 그녀는 그 자궁을 제어할 수 있으며 원하는 만큼의 생명체를 낳을 수 있었죠.'
'지성체가 자신을 자각했다? 한 남자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에덴에서 도망을 쳤군. 그리고 악마와 관계하여 수많은 자식을 낳을 수 있었던 것도 에덴에서 제조한 특별한 자궁 때문이고?'
'네, 천사는 그분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릴리스를 해칠 수 없었죠. 그녀는 수많은 악마를 낳았고 그중에 한 명이 결국 아담과 이브를 타락시키게 된 계기가 된 거죠.'
'그런 릴리스가 어떻게 연옥의 책임자가 될 수 있었던 거지?'
'그녀의 생산능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악마 쪽도 천사 쪽도 그녀를 원하게 되었는데 릴리스 스스로 중재하여 말하기를 나를 내 자식들이 영원히 떠도는 연옥으로 보내 달라고 했으며 그때 게헤나와 생텀 의회는 연옥에 관한 협약을 맺었고 릴리스는 다시는 연옥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연옥은 그녀의 감옥과 같은 곳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딸들은 다르던데?'
'네. 맞습니다. 딸들인 릴림은 그녀의 하수인으로 연옥과 게헤나를 왕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너는 어떻게 연옥으로 들어올 수 있는 거지? 협정 위반이 아니야?'
'저는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그림자가 드리운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으며 이는 협정 위반은 아닙니다. 단 제가 그림자를 벗어나 본 모습을 보인다면 협정 위반이 됩니다.'
'그럼 넌 연옥에서 그림자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소리네?'
'그렇습니다.'
'나는 협정 위반이 아닌가?'
'협정은 게헤나와 생텀 의회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인간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네필림도 마찬가지지요. 협정 내용에 네필림도 없습니다.'
'그래서 연옥으로 갈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루시퍼가 말했구나. 결국 가면을 흩어 놓은 것은 이 모든 세계에 다 관여할 수 있는 존재만이 찾을 수 있도록 안배되어 있었던 거네. 인간계와 게헤나, 연옥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존재만이 가면을 다 모을 수 있도록···.'
'루시퍼는 당신이 가면을 모을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봐야겠죠.'
'그 가면 쉽게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을 것 같군. 그 정도 운명을 쥐고 있는 가면이라면 아마도 릴리스가 가지고 있거나 숨겨둔 위치를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아.'
'언노운 다른 차원에서 가면의 위치를 정리해 줄 수 있나?'
【죄송하지만 그 부분까지는 아직 접근할 수 없습니다. 사건의 진행도에 따라 해제되는 시스템이므로 진행 상황에 따라 정보는 차례대로 오픈됩니다】
'알았다고 그럼 정보가 오픈되면 즉시 나에게 알려줘.'
【알겠습니다. 앞으로 18시간 24분 47초 후 메타킷의 데이터 분석이 끝납니다】
'시간이 좀 남네. 도시 구경이나 하며 잠시 시간이나 때울까?'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밤하늘에 별이 보인다.
'별?'
'연옥에도 별이 있네? 저거 설정인 거냐? 이곳 대기 분석 좀 해 줘.'
【대기는 지구의 대기와 거의 같은 구조입니다. 오존층과 겹쳐 약 1km 길이의 수증기층이 존재합니다. 정확한 분석은 직접 가봐야 합니다】
'수증기층이라고? 그곳에 물이 있다면 우주로 튕겨 나가 증발하지 않나?'
【정확한 과학적 분석은 직접 그곳에 가봐야 합니다】
'아, 궁창! 레이가 말한 궁창이라는 것일 수도 있어. 뭐지? 이곳은? 연옥은 신기한 곳이네.'
하늘 위로 계속 날아올랐다. 중력, 대기 모두 지구와 같다는 것은?
'세상에! 정말 우주에 바다가 있네? 와! 미친 이게 뭐야?'
오존층을 넘어서자마자 상상도 할수 없는 두께의 거대한 수증기층이 나타났다. 수증기라고 말하기도 뭣한 것이 손을 대보니 그냥 물이다.
세상에 하늘에 거꾸로 매달린 바다라니.
【과학적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지구의 중력과 자전, 자기장에 정확히 맞춰 중력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주 쪽으로 닿은 부분은 계속 증발하고 있지만 그 부분만큼 지상의 대기에서 흡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딱 균형을 맞추고 있다는 이야기네? 와! 이게 가능해?'
【지구 중력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달의 중력이 가세하여 정확히 유지 되고 있습니다. 계산상 달의 크기가 정확히 궁창을 유지할 수 있는 중력을 내고 있습니다】
'우와 이 모든 것이 설계된 거냐?'
'아마도 초월체라면 충분히 이룰 수 있는 결과물이라고 판단합니다.'
우주에 나와서도 왓처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지구를 내려다보았다. 푸른 별이 아닌 빛이 거의 없는 어둠의 행성이다.
'저거 진짜 지구 맞지?'
【처음 여기에 도착해서 말했다시피 질량과 중력, 대기까지 지구와 완벽히 일치합니다】
'그럼 저 달도 태양도 모두 진짜란 말이야? 네가 가상이라고 조심하라며?'
【이곳은 연옥이며 저희는 태초의 차원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의 모든 것은 저희에게는 가공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어렵네. 혹시 레이가 너의 존재를 눈치챌 확률은 있어?'
【레이는 그림자 속 별개의 차원에 있으므로 저의 존재를 눈치챌 확률은 제로에 준합니다】
'그럼 안심이고, 너하고 레이하고 번갈아 이야기하면 괜히 쫄리더라고.'
나는 좀 더 나아가 다시 지구를 내려다봤다. 반대편 뜨거운 태양의 빛이 닿는 궁창은 찬란한 빛무리를 뿌려 대고 있었다.
태양의 강력한 자외선이 하늘 바다인 궁창에 걸려 아름다운 산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즉 궁창이 태양의 빛 중 생명체에 해로운 것을 모두 걸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내 동체 시력에도 충격이 가해질 만큼 빛의 산란은 어마어마했다. 궁창이 태양의 빛을 반사 시켜 주변을 대낮보다 더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실제로 태양 빛을 반사하는 궁창 주변의 온도도 엄청나게 뜨거워 맞닿은 궁창이 끓어오를 정도였다.
지구의 밤 쪽에 있다가 낮 쪽으로 이동하니 눈이 부셔 더는 날지 못할 정도였다.
하늘 바다로 뛰어들어 궁창 아래로 내려갔다.
아름답다. 너무나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궁창 아래 하늘은 투명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맑고 투명한 하늘이다.
세상에 하늘 전부를 거울로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와. 이 풍경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인상적인 단어가 생각 안 나 난감할 정도였다.
"응?"
냄새다.
분명한 감정의 냄새.
연옥에도 감정의 냄새가 나는 건가?
멈춰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까마득히 아래 지면이지만 내 시력으로 충분히 볼 수 있는 거리다.
도시다. 어제 본 도시와 다른 도시다.
이 도시 전체에서 감정이 흘러나오고 있다.
질량과 중력과 대기는 지구와 완벽히 같지만, 오대양 육대주와 같은 지면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마치 판게아같이 거대한 땅덩어리 하나에 나머지는 바다다
감정이 흘러넘치는 도시 아래로 수직 낙하했다.
'연옥이라는 곳은 생각보다 황당한 곳이네.'
왜 21세기 도시 모양을 하고 있는지도 설명되지 않는다.
가장 높은 빌딩 옥상에 올랐고 도시 모델을 과거 내가 살던 지구 그러니까 퍼스트 임펙트가 일어나기 전 지구 각 도시의 형태와 비교 분석했다.
단 하나도 일치하는 곳이 없었다. 어딘가 미국의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 같은 느낌도 들고 일본 도쿄의 이미지도 있는 것 같고 다양한 느낌의 이리저리 섞인 것 같은데 우리 지구의 각 도시를 대표하는 렌드마크는 없는 것 같다.
파리의 에펠탑이나 개선문, 런던의 버킹엄 궁전, 시계탑과 빅 벤, LA의 할리우드, 월트 디즈니,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센트럴 파크,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베를린 대성당 등 인류가 만든 다양한 랜드마크와는 단 한 개도 일치하지 않았다.
확실히 이곳은 우리가 알던 익숙한 도시는 아닌 모양이다. 도시를 덮고 있는 감정은 단 하나다. 여러 감정이 섞인 것이 아닌 오로지 하나.
그 감정은 지독한 게으름이다. 이 큰 도시에 감정이 딱 하나뿐인 것도 말이 안 되는데 도시가 굴러가고 있다는 것조차 소름이 돋을 상황이다.
이거 나도 취할 만큼 정말 지독한 게으름이다. 수억 년 동안 그 집념이 압축되고 압축되어 굳어진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말도 안 되게 진한 감정이라서 우주 밖에서조차 감지 되었던 거다.
얼마나 지독한지 갑자기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귀찮게 느껴질 정도였다.
게으름을 먹이로 삼는 악마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여기 게으름을 다 섭취하면 당장 1품 악마 등급에 올라설 정도는 충분히 될 것 같다.
농축도 이런 농축된 감정이 있을까 싶어질 정도다.
【중독 현상을 보일 수 있으니 보호막 활용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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