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희(1)
불사의 회람의 모든 길드원이 나를 좋게 보는 것은 아니다. 어디를 가든 반대 세력이 있기 마련이고 그들은 항시 나를 음해하는 말과 소문을 조장한다.
그 대표적 인물이 정성철 회장의 막내딸 정도희와 그의 사위 박철현이다. 이 두 사람이 길드원을 선동하고 반대파벌을 규합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바쁜 나날 속에 그들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나에게는 가시 같은 존재였지만 뽑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처음에는 회장의 자질을 논하며 핏발을 곤두세우더니 S 레벨 헌터 사건 이후로는 쑥 들어가 버렸다. 그들은 여전히 정성철 회장 유서의 진위를 놓고 재조사를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힘을 잃어 가고 있다.
사람들은 내가 불사의 회람 회장역을 이어 가는데 길드원 90% 이상이 찬성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최우신이 마인이 되고 나서 첫 번째로 한 일이 이 가시를 뽑아내는 일이었다. 물론 내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적은 없다.
부사장의 권한으로 그가 직접 일을 계획하고 움직였다.
"호오? 정도희가 반군하고 접촉했다는 말입니까?"
"뭐, 접촉이라고 하기도 그렇습니다. 제 쪽에서 반군에게 정도희를 소개했으니까요."
"그렇군요. 일은 어느 정도 진척이 되었습니까?"
"반군이 노리는 것은 GHB 하나니까 그걸 정도희를 통해 빼내려 하는 겁니다."
"정도희가 노리는 것은?"
"정도희의 뒤를 반군이 봐 주겠다는 겁니다. 미리 말씀드리려 했는데 두 연놈의 궁합이 너무 좋아 일이 급속도로 추진 되는 바람에 보고가 좀 늦었습니다."
"반군은 결국 정도희와 손을 잡았군요."
"정도희 남편 박철현이 셈텍스 몇 개 반군에게 넘겼습니다."
"셈텍스는 마인 사건 이후로 임페리얼 테크노트리아에서 전적으로 관리 한다고 들었습니다만."
"이상희입니다. 정성철 회장이 불사의 회람에 숨겨 놓은 카피너입니다."
"저도 불사의 회람에 카피너가 한 명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였군요."
"박철현이 카피너 이상희와 안면이 있는 모양입니다. 카피너를 통해 셈텍스를 복사했습니다."
"길드 측면에서 보면 큰 반역 행위가 아닙니까?"
"반군과 박철현의 거래 내용부터 거래하는 장면까지 모두 녹음해 놨습니다. 증거는 충분합니다."
"요즘 회의도 참석지 않고 바쁘게 돌아다니더니 그 일을 하고 있었군요."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종기는 더 곪기 전에 짜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박철현에 관한 증거는 마련되었고 정도희를 궁지에 몰면 되겠군요."
"정도희가 반군과 주고받은 내용도 제 손에 있습니다. 회장님이 말씀만 하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체포 할 수 있습니다."
"아니요. 좀 더 일을 크게 벌이죠. 이번 기회에 반군에게도 우리의 무서움을 좀 알려야 할 필요성이 보이는군요. 정도희와 접촉한 반군은 몇 명입니까?"
"두 명입니다."
"그들은 정확히 GHB를 노리는 것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임페리얼 테크노트리아의 임원과 접촉했다가 실패를 했습니다. 그들이 저를 통해 다시 접촉 해 왔을 때 저는 정도희를 추천했습니다."
"그럼 정도희는 그들이 마인이라는 걸 알고 접촉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정도희는 마인을 등에 업고 자신의 세력을 넓히려 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세력이 정크 보이용 GHB를 어떻게 하든 빼돌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상당한 양의 GHB를 어떻게? 아, 카피너를 이용할 생각이군요."
"그렇습니다. 박철현은 이상희를 이용할 생각입니다."
"좋습니다. 그럼 그들이 어디까지 일을 꾸밀지 한번 지켜봅시다."
정성철 회장 암살 사건 이후로 몇 달이 지났지만 마인들은 매우 조용하다. 이현희의 종적도 오리무중이었고 물론 이곳에 없다는 것은 그녀가 네크로폴리탄에 있다는 이야기겠지.
그녀와 함께 있던 테라노바 자치령의 마인도 그 이후 단 한 번도 이곳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이현희와 계약 하면서 상당량의 셈텍스를 복사해 줬다. 자치령은 누구 보다 많은 셈텍스를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정성철 회장이 알음알음 그들에게 보냈던 무각성자의 보급이 완전히 끊어져 버린 이상 그들은 새로운 판로를 뚫어야 했고 그 밑 작업을 시작해도 벌써 시작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몇 달 동안 너무나 조용하다. 덕분에 내가 불사의 회람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벌수 있었다.
이번 일만 다 처리되면 정식으로 회장에 오를 것이다. 나에게 걸리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다.
개인 연구실에는 새로운 강화 머신인 익스펜드 템퍼드 머신의 완성품이 자리하고 있다.
익스펜드 템퍼드 머신 통칭 ETM은 내가 회장에 취임할 때 정식으로 발표할 물건이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배양액 속에 담겨 있는 여러 개의 무스토가 진열되어 있다.
이것은 무스토에 언노운이 증식용 나노봇을 넣어 세포 분열을 통해 무스토의 증식을 가속시켰다. 하나의 무스토로 총 열 개의 무스토를 번식 시켰다.
증식 속도도 봤을 때 한 달 정도면 완성될 것이다.
김동희 박사가 몇 달째 머리를 싸매고 고생해도 답을 내지 못했던 것을 언노운은 몇 초 만에 간단히 답을 만들어 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상희 신변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다. 카피너는 대단히 위험한 존재다. 이모탈 시티의 경제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지만 적에게도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다.
'이상희라. 이상희. 박철현이 이상희를 이용하는 이상 지금 손을 대면 다 된 밥에 코를 빠트릴 수가 있어. 좀 더 지켜봐야겠다.'
"3023, 이상희의 위치를 파악해줘."
【알겠습니다. 본사 사옥 내 모든 층을 검색합니다】
최우신이 일을 추진하고 있으나 하루하루가 지겨운 참에 이번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생각이다.
【이상희 인물 스캔 완료. 데이터 일치 99%. 30층 208호입니다】
"30층은 무슨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지?"
【정성철이 30층은 특별 보안 층으로 등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30층은 아무나 들락날락하는 그곳이 아니다 그 말이네. 그것참 대 놓고 수상한 곳이라고 광고하는 게 아닌가?"
지금 이상희를 건드리면 최우신이 벌려놓은 일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이상희를 확인했으니 서서히 올가미를 쳐야 한다.
아직 달려들지 않은 미끼에 손을 댈 필요는 없다. 기다리기만 하면 알아서 미끼를 물 테니까.
정성철 회장이 암살당하고 흔들렸던 불사의 회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활기를 찾았다. 늘 있던 자리에서 사람들은 어제와 똑같은 모습을 보였고 저마다 주어진 업무를 하던 대로 오늘도 이어가고 있다.
나는 탁자 위에 쌓인 자료철을 보면서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정성철 회장이 가지고 있던 그러니까 서버에 등록한 자료가 아닌 손수 자필을 하거나 타자를 한 자료였다.
이 자료들은 폐기 처분하기 전에 한번 봐두라고 김상열 부회장이 건네준 것이다.
이 자료에서 의외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성철 회장은 핏줄은 두 명이었다. 정현규와 정도희. 알고 보니 차남 정현재는 정성철 회장의 친혈육이 아닌 신의 아이들 출신으로 출신 성분이 모호한 입양아였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친아버지를 죽인 패륜아는 아니게 되었다. 정성철 회장은 첫째를 보좌할 생각으로 둘째를 들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기록은 연합의 마인과 어떻게 접촉했고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가 적힌 서류였다. 그가 이것을 데이터화 시키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보안을 의식해서 이렇게 자필 기록으로만 남겨 놓은 것일 것이다.
마루한 연합에 대해 내가 모르는 부분도 상당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 통의 서류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상호 침략 불가침 조약 선언서.
마루한 연합과 테라노바 자치령이 서명한 이모탈 시티 침략 불가침 선언서였다.
정성철 회장은 나름대로 이모탈 시티의 안전을 위해 노력한 모양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내용이 있었다. 그것은 반년을 주기로 수백 명의 무각성자를 네크로폴리탄으로 보내는 거였다. 정성철 회장은 불가침 조약에 사인 하는 대신 무각성자를 대량 납품하는 조건에 합의한 것이다.
그가 어떤 식으로 무각성자를 선별하고 납품했는지 상세한 기록이 실려 있었고 그 업무를 처리하던 특별 관리팀 또한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언노운이 이 특별 관리팀의 정보를 이용하여 관리팀 전원을 찾아냈다. 우습게도 그 팀이 정도희가 관리하는 팀으로 묶여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결국 화의 온상들이 한 곳에 다 뭉쳐 있구나. 잡아 달라고 보채는 모양인데. 그렇게 해 줘야지.'
며칠이 지나 최우신에게 연락이 왔는데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마루한 연합의 마인 두 명이 이모탈 시티로 넘어왔고 그들의 게이트가 창원의 한 건물 안에 있다는 것까지 파악했다고 보고 해 왔다.
마루한 연합의 이번 방문은 셈텍스의 확보와 무각성자의 유입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고, 원래 대로라면 그들은 나에게 접근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정도희쪽으로 우회했다.
정도희는 마루한 연합과 KH 반군 사이에서 저울질할 생각이다. 그들이 마인의 요구를 들어줄 만큼의 능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불사의 회람에서 자신의 입지를 넓혀야 한다. 그러기 위한 최대의 걸림돌은 백 퍼센트 나다.
그래서 나를 음해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벌이려 하는 거겠지.
"회장님 부르셨습니까?"
밝은 정장에 잘 정돈된 머릿결, 몸에 밴 깍듯함. 각진 턱에서 강인한 성격이 보인다. 상당한 미남형 얼굴에 신중함이 돋보이는 인물이다. 그는 유철환으로 김상열 부회장이 나를 위해 붙여준 사람으로 최고의 비서라고 엄지를 치켜세웠던 인물이다.
나는 극구 사양했으나 감상열 부회장의 추천을 물릴 수 없었다. 그래서 한 달 전부터 곁에 두게 된 사람이다. 나이는 28살, A 레벨 정신각성자다.
그는 기대 이상의 업무 처리 능력을 보여주었다. 심복으로 삼아도 좋을 만큼. 그는 분위기를 읽는 능력과 사람을 판단하는 능력이 아주 탁월했다.
"저기 분류된 서류 중 왼쪽 서류를 모두 파기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리고 불사의 회람 일 년 회계 장부 작성이 끝났다는 보고가 와 있습니다. 서류를 올릴까요?"
"그렇게 해 주십시오. 아 그리고 불사의 회람 간부 조직도와 부가적인 인물 설명을 곁들인 서류를 준비해 주세요. 그리고 소문을 조금만 흘려 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소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회장이 길드 간부 조직도를 원하고 있다. 그는 회장에 취임하는 순간 불사의 회람 간부를 전면 개편하려 준비하려 한다. 이 정도만 해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유철환은 서류 더미를 품에 안고 밖으로 나갔다.
최우신에게 연락했다.
"혼자 움직입니까?"
"아닙니다. 제가 팀을 만들다 말았는데 먼저 가입한 세 명이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제가 먼저 한 말을 기억해서 팀을 만드세요. 전 평범한 팀을 원하지 않습니다. 마인과 제대로 싸울 줄 아는 팀을 만들고 싶습니다."
"첫 번째 조건이 가족이 없는 사람일 것. 두 번째 힘에 목말라 하는 사람일 것. 세 번째 마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일 것. 알겠습니까? 마인을 상대하려면 본인 스스로가 마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말입니다."
"명심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 일이 재미있습니다. 제 천직 같은 느낌이 듭니다."
"좋아요. 최우신 부사장은 잘 해내고 있습니다. 마루한 연합의 동태를 잘 감시하세요. 특히 연합과 정도희의 만남을 정확히 포착해서 녹화를 확실히 해 두는 것도 잊지 마시고."
"물론입니다. 회장님에게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불사의 회람이 정리되는 대로 마인들과 흥정을 시작할 참이다. 이모탈 시티의 모든 헌터가 마인에 대해 눈을 떠야 할 시점이다.
속이고 감춘다고 끝날 상황이 아니다. 지금 그들은 살벌한 날위에 서 있는 짐승이다. 언제 어느때 돌변하여 이빨을 드러낼지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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