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48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48
무진의 말대로 소리를 내며 날아온 것은 바람이 아니라 뱀이었다. 숫자도 많고 워낙 빨라서 바람처럼 느껴졌지만 그게 아니었다. 무진의 몸을 감아서 끌고 가려했지만 튕겨나가 벽에 부딪혀 죽은 것이다. 그건 바닥에 떨어진 뱀들의 시신을 보면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죽은 것만 해도 족히 수천 마리는 될 것 같다.
“후후, 더 큰놈들이군.”
갑자기 바람소리가 커지며 훨씬 더 무게감이 느껴지는 물체들이 벽에 부딪힌다. 처음 날아왔던 뱀들보다 배는 더 크다.
“자연와 인공의 절묘한 결합인가?”
뱀들이 이렇게 많은 건 결코 누가 키워서가 아니다. 동굴 전체가 뱀의 모양을 했다는 건 뱀들이 성장하기에 적합한 공간이란 뜻이고, 입구는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그래서 동굴이 자연과 인공의 결합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 거다. 이렇게 이십여 장을 더 들어가자 점차 뱀의 숫자가 줄어든다. 근데 뱀의 크기는 오히려 더 커진다.
“완전히 인해전술이군.”
이젠 뱀의 굵기가 거의 성인의 허벅지만 하다. 그런 것들이 한꺼번에 수십 마리씩 날아와 부딪히니 아무리 고금제일의 고수라 해도 충격 받지 않을 수가 없다.
펑펑펑펑...!
그렇게 십여 장을 더 들어가자 상황이 바뀐다.
“후후, 끝장을 보자는 거군. 그럼 상대해줘야지.”
갑자기 뱀의 크기가 확 줄어든다. 마치 실뱀과 같은 크기이다. 굵기는 애기 새끼손가락만 하고, 길이도 한 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숫자가 많은 것도 아니다. 전체라고 해봐야 불과 백여 마리밖에 안 된다. 근데 위력 면에서 보면 일당 천, 일당 만 이상으로 무시무시하다.
치지지지직!
백여 마리의 실뱀들이 무진의 보호막을 뚫고 들어오기 시작한다.
“귀엽게 생겼군. 뿔도 예쁘고, 투명한 몸체에 내장까지 보이고. 그럼 어떻게 하는지 한 번 구경해볼까?”
파파파파파팟...!
갑자기 무진이 기운을 거두자 백여 마리의 뱀들이 모두 무진의 몸속으로 파고든다. 그는 막기는커녕 오히려 순순히 받아들인다. 그리고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걸어간다. 몸속으로 들어가서 잠시 고물거리던 뱀들이 금방 조용해진다. 그걸로 끝이다.
보통 뱀들이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가면 두 가지 일을 한다. 한 가지는 가지고 있던 독을 퍼뜨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중요 장기를 파괴하는 것이다. 근데 실뱀들은 두 개 중 하나도 못하고, 반대로 무진이 본능적으로 자연무예를 펼치자 그대로 녹아버린다. 그 기운은 무진의 운기조식 경로를 따라서 몇 바퀴 돌더니 그대로 사라져버린다.
“벌써 끝나다니 실망이군. 아닌가?”
이때 무진의 말을 들었는지 한 마리의 뱀이 나타나서 무진의 몸을 감고 한 곳으로 끌고 간다. 끌고 간다기보다 미끄러져간다. 문제는 오십여 장을 움직여도 끝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우웃!”
갑자기 뱀의 몸이 뒤로 접히듯이 다시 펴지며 무진을 한 곳으로 던져버린다. 쌩! 하고 바람의 가르는 소리와 함께 한참을 날아간다.
“으음! 이건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무한대의 힘이란 게 존재한다면 이런 것이리라.”
단순히 던진 힘에 의해서 끌려가는 게 아니다. 앞에 있었던 뱀들이 만들어낸 바람과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흡입력에 의해서 무진의 몸이 끌려간다.
“후후! 드디어 흑마정인가?”
풍덩하는 소리와 함께 무진은 커다란 우물에 빠진다. 문제는 일단 물속으로 들어가자 위로 올라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 자체의 압력도 강하지만 밑에서 끌어당기는 힘이 인간으로선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원한다면 들어줘야지.”
그는 물이 끌어당기는 대로 몸을 맡긴다. 그러자 엄청난 속도로 물 밑으로 내려간다. 그렇게 한 동안 밑으로 내려간다. 회전을 하거나 옆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끝없이 내려가고 있다.
“지금까지 상황으로 봐선 예사로운 곳이 아니다. 여기만 해도 그렇다. 물은 고요한데 끌어당기는 힘이 앞서 뱀들보다 더 강하다. 다만 물에 독성이 전혀 없는 건 좀 이상하다. 어라! 이건 또 뭐지?”
갑자기 물이 회색으로 변하더니 몸이 위로 솟구쳐 오른다. 내려올 때보다 배는 더 빠르다.
“우욱!”
무진도 급작스런 변화에 당황해서 거꾸로 올라간다. 그래도 그 상태로 둔다. 그렇게 반 정도를 올라갔을 때다. 그의 눈에 이상한 게 들어온다.
“으잉? 아깐 보지 못했는데... 반대 방향이라 못 본 건가?”
수로의 벽면에 계란 만 한 물체가 박혀 있다. 그는 즉시 그 자리에 멈춘다. 물의 기운이 강하지만 그를 막진 못한다. 그는 천천히 그 물체를 향해 이동한다. 헤엄치지 않는데도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으음! 방어막을 만들다니 생명체인가?”
무진이 접근하자 물체가 강하게 반발한다. 무진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거나, 빛을 내지도, 크지도 않은 물체에 관심을 가진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모양이 사람의 형체와 유사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물의 변화가 거기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물 색깔은 회색이다. 근데 물체는 검은색이다. 이것만 봐도 물보다 저놈이 먼저 변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웬만한 강물과 맞먹을 정도의 엄청난 양의 물의 기운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키고, 그에 맞먹는 거대한 동굴 속의 물체까지 빨아들일 수 있는 힘을 가진 물체가 인간 세상에 존재한다? 게다가 저놈은 생명체가 분명하다. 그런 건 들어본 적이 없다. 아니, 상상도 못 해봤다.”
무진은 물체를 향해 접근하면서 물체의 정체를 알아내려 하지만 쉽지가 않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없다.
“이럴 땐 직접 확인해 보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지.”
그는 손을 내밀어 물체를 만진다.
퍼퍼퍼퍼펑..!
손이 물체에 닿는 순간 물속에서 폭발이 일어난다. 무진의 몸이 튕겨나갈 정도의 가공할 위력이다.
“후후! 하긴 너무 싱겁게 끝나면 재미가 없지.”
그는 다시 자세를 잡고 물체를 향해 다가간다.
우우우우우웅웅!
물체에서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한 기운이 밀려온다.
“오냐. 한 번 해보자.”
무진도 몸을 최대한 긴장해서 상대할 준비를 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양측의 기운이 폭발 직전의 상황이다.
우르르르릉!
순간 물속에서 커다란 소용돌이가 일어나며 양측 사이에 큰 공간이 만들어진다. 물체의 기운이 극도로 커지며 공격을 시도하고, 동시에 무진도 맞대응을 한다.
“후후후! 멋진 상대를 만났군. 가자!”
근데 마지막 순간에 무진이 기운을 거두고 물체에서 나오는 기운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되자 상황이 뒤바뀐다. 무진은 물체의 기운을 계속해서 받아들여 전신 혈도로 회전을 시키고, 물체는 더 이상 기운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건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다. 밀려오는 힘이 워낙 강하기도 하지만, 작전에서 무진이 한 수 위다. 게다가 단 한 번의 승부에서 반 이상의 기운을 빼앗겼기 때문에 물체가 이길 수가 없다.
“속전속결로 끝내야 한다. 안 그러면 서로 어려워진다.”
무진은 물체가 버티기 작전으로 나오자 물이 가지고 있는 기운까지도 받아들인다. 그러자 힘의 균형이 급격히 그에게로 기울어진다. 그렇다고 무진이 물체의 모든 기운을 받아들이는 건 아니다. 구 할만 받고 일 할은 남겨둔다.
“으음!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 그 동안 이 아이에게 희생당한 사람만 해도 오만 명에 이른다. 만약 몇 백 명만 더 채웠어도 이 아이가 세상을 지배했을 지도 모른다.”
사람 모양의 물체는 동굴 모양의 어마어마한 크기의 물고기 내단이다. 얼마나 오래 전에 생존했던 물고기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바다에서 살았던 물고기가 육지에 올라와 있는 것만 봐도 그 연대가 얼마나 오래됐을지 추측할 수 있다.
워낙 오래된 내단이라 영혼을 가지고 되었고, 그것이 동굴 속의 물속에 살면서 많은 사람들의 기운을 받아 연명해온 것이다. 그렇게 살다 보니 영(靈)이 강해지고 발달해서 사람을 지배할 수 있을 정도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만약 지금 무진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 영단이 인간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사람을 해친다면 인간의 힘으론 막기 힘들 것이다. 뱀들도 영단이 지닌 음기를 이용해서 번식을 해온 것이다.
우르르르릉...!
무진이 몸속으로 들어온 영단의 기운을 전신으로 회전시키자 격렬하게 반항한다. 이유는 한 가지다. 무진이 영단의 기운을 전신 혈도를 통해서 회전시키면서 음습하고 사악한 성질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영단은 오랜 세월 사악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에 그걸 본성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빼앗기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무진의 기운을 제어하는 능력이 워낙 뛰어나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그렇게 회전을 통해서 조금씩 사악한 기운이 제거되면서 영단의 성격이 변하기 시작한다. 무진은 벌써 일주일을 물속에서 선 채로 기운을 회전하고 있다. 이젠 영단의 기운에서 사악한 기운은 거의 다 사라졌고, 그 과정에서 무진의 몸은 전신이 공(空)의 상태가 된다.
이젠 아무리 강한 기운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을 만든 셈이다. 아니, 그의 몸과 자연이 하나가 되어 무한대의 기운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경지가 되었다.
끄르르르릉....!
구 할의 기운을 모두 소화시킨 무진은 오른손으로 영단을 잡는다. 그러자 다시 반항한다. 이 부분이 조금 이상하다. 그는 분명히 오른 팔이 잘려나갔다. 그런데도 영단의 기운을 회전하면서 오른 팔에 있던 혈도를 따라서 계속 회전시켰다.
육체는 없지만 혈도는 그대로 살아 있으며 그게 계속 반복되자 이젠 진짜 팔이 있는 것처럼 기운이 움직인다. 무진은 이번에는 영단의 몸속에 남아 있던 일 할의 기운을 받아들여 정화작업을 한다.
“싫어! 난 절대 항복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영단은 무진이 자신의 기운을 정화시키는 걸 죽이려는 것으로 생각하고 반항한다.
“그래. 절대로 항복하지 마. 대신 내가 이기면 넌 영원히 사라져야 해!”
“안 돼!”
“웃기는 놈이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면 어쩌자는 거야?”
“그냥 이대로 있고 싶어.”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을 해치려고?”
“내가 먼저 안 그랬어. 놈들이 내 집을 침입해서 물건들을 훔치려 했단 말이야.”
“그래서 나도 널 죽이려는 거야. 넌 내 친구들을 너무 많이 해쳤거든.”
“안 돼! 제..제발!”
영단은 그나마 남아 있던 사악한 기운마저 사라지자 태도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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