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49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49
“난 널 죽일 생각이 없다. 단, 내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
“무슨 조건?”
“내 지시를 따를 것.”
“그것뿐이야?”
“조건은 아니고, 나랑 같이 살아야 해.”
“정말? 그럼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겠네?”
“당연하지.”
“흠! 그럼 할래.”
“후후후, 너무 쉽게 대답하는 거 아니냐?”
“아냐. 난 천지개벽이 수십, 수백 번을 하는 동안 세상으로 나가는 게 소원이었어.”
“세상으로 나가면 유혹도 많고, 화나는 일도 많을 텐데... 참을 수 있겠어?”
“그거야 그때 상황에 따라서 다를 수가 있지.”
“후후후, 건방진 놈.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보이니?”
“뭐...뭔 소리야?”
“난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약속을 안 지키는 놈이다.”
“무슨 약속? 아, 네 말 듣는 거?”
“너라고 했니?”
“널 너라고 부르지 뭐라고 해?”
“후후후, 이래도?”
무진은 다시 영단의 기운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때까지도 오른손은 영단을 쥐고 있다.
“왜..왜 이래? 아아아...악!”
“너처럼 싸가지 없는 놈들은 아예 싹을 잘라야 해. 그래야 뒤끝이 없거든.”
무진이 속도를 높이자 순식간에 남은 기운 중 팔 할을 넘어 구 할 가까이 빠져나간다.
“자..잘못했습니다. 주..주인님! 제발!”
“한 번 배신한 놈은 또 배신하는 법. 너처럼 간사하고 영악한 놈은 뿌리를 뽑아야 해.”
“주..주인님! 다시는 버릇없이 하지 않겠습니다. 정말입니다. 한 번만 더 약속을 어기면 그땐 정말.... 주인님 처분에 따르겠습니다. 정말입니다. 맹세하고, 또 맹세합니다. 그..그만...”
이제 거의 대부분의 기운이 빠져나가고 혼만 남아 있는 상태가 되었다.
“좋다.”
거의 티끌만큼의 기운이 남은 상태에서 무진은 손을 뗀다.
“가..감사합니다. 휴우...!”
“좋아할 것 없다. 조건이 하나 더 붙을 테니까.”
“조건이라면...”
“그것도 별로 어려운 건 아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내겐 동생들이 여럿 있다. 향후 네 운명은 그 아이들과 함께 해야 한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설명이 필요합니다.”
“간단하다. 노쇠해서 죽지 않는 한 내 동생들의 생명은 네가 지켜야 한다. 만약!”
“만약?”
“만약 한 명이라도 죽으면 너도 죽는다.”
“그런 거야 자신 있습니다. 근데 동생들이 다 죽고 나면 어떡합니까?”
“내가 있잖아?”
“주인님도 언젠가는 죽을 게 아닙니까?”
“내가 죽은 후에는 니 마음대로 해도 좋다.”
“저..정말이죠? 분명히 약속한 겁니다. 나중에 딴 소리하면 주인님도 약속을 어기는 겁니다. 아니지. 그땐 주인님도 세상을 떠난 뒤니까 완전히 내 세상이네. 그래도 나중에 족쇄 채우는 건 절대 안 됩니다.”
“내가 너처럼 거짓말쟁인 줄 아니?”
“알겠습니다. 저도 약속을 지킬 테니, 주인님도 약속을 꼭 지키세요.”
“너나 잘 하세요. 자, 이번에는 네 영혼까지 받아들일 테니 마음을 편하게 가져라.”
“괜찮겠죠?”
“싫으면 말고.”
“아..아닙니다.”
“금방 끝날 테니까 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라앉혀라.”
“으음! 뭐하세요? 안 할 거예요? 아얏! 왜 때려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벌써 끝났거든.”
“예에? 벌써요?”
“궁금하면 주위를 살펴봐라.”
“뭐, 그대로구만. 어잉? 저게 뭐지? 많이 보던 건데.... 으음!”
영단은 형체만 유지한 채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다. 그걸 보고서야 영단은 본신을 떠나 무진의 몸속으로 들어온 걸 눈치 챈다.
“너무 자책하지 말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간다고 생각해라. 나와 내형제들과 함께하면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을 거다.”
“근데 주인님을 믿을 순 있는 겁니까?”
“니 생각은 어떠냐?”
“그거야. 전 지금까지 강한 것만을 좋아했어요. 근데 주인님을 만나서 새로운 몸을 얻고 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강해지는 것도 좋지만 행복해지고 싶어요.”
“행복이 뭔지는 알고?”
“전혀 몰라요. 하지만 자꾸 그 단어가 생각나고, 그걸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맞다. 행복은 좋은 것이고, 인간들이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럼 나도 행복해질래요.”
“그래. 다른 건 몰라도 그건 내가 책임진다.”
“그것도 약속입니다.”
“그 자식 그거 따지는 거 억세게 좋아하네.”
“당연하죠. 좋은 건데.”
“알았다. 나도 따지는 거 좋아하고, 잘 하거든.”
“예에? 아..아닙니다. 왠지 많이 따지면 피곤할 것 같아요. 그냥 주인님이 시키는 대로만 할래요.”
“후후후, 잘 생각했다. 자, 그럼 동생들부터 만나보자.”
“흥! 내가 모를 줄 알고?”
“뭘?”
“벌써 불러놓고선.”
“눈치 챘니?”
“기운이 다시 돌아오니까 이전보다 여러 가지로 더 좋아진 것 같아요.”
“그것 봐. 주인을 잘 만나니까 좋은 일이 생기잖아.”
“아니에요. 그 말을 취소할래요. 아얏!”
“너 앞으로 가능하면 말 수를 줄여라. 안 그러면 매일 매타작하는 수가 있다.”
“혹시 촌철살인(寸鐵殺人)이란 말을 들어보셨소?”
“말 한 마디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이잖아?”
“바로 그거요. 말을 줄인다고 해서 주인님에게 좋은 일만은 아니랍니다.”
“이거 어째 내가 또 실수하는 것 같다. 그냥 확 버리는 건데... 이래서 인정에 끌리면 안 되는 거야.”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낙장불입(落張不入)입니다. 전 절대 양보 못합니다. 근데 또 실수한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혹시 저 말고도 말이 많은 형제가 있다는 뜻이오? 아..알았습니다. 말을 줄이겠습니다. 그래도 사람이, 아니 모든 존재는 말 할 자유가 있으며 언로가 막히면 모든 구성원들이 불행해진답니다. 그러니까.... 죄..죄송합니다.”
영단은 위로 올라가면서도 쉬지 않고 떠들어댄다. 그러다가 무진이 화를 내려고 하자 입을 다문다.
“대형!”
“정랑!”
“오라버니!”
“대인!”
동굴에는 형제들이 모두 대기하고 있다. 금곡 분타주도 보이는 걸 보니 무진이 형제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말한 대로 정좌해서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라. 특히 쌍마와 훈이, 그리고 분타주는 처음 겪는 일일 테니 놀라지 말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잠시 후, 일행은 묵사회의 금곡 분타에서 무진의 주도로 운기조식을 한다.
“예, 알겠습니다.”
무진의 걱정과는 달리 오히려 네 사람은 들떠 있다. 특히 분타주 금진은 무진의 철문을 뚫고 들어가는 공간이동술을 본 이후 완전히 그의 신봉자가 되었다.
“그럼 시작한다.”
무진은 왼손은 호란의 오른손을, 오른손은 태민의 손을 잡은 다음 왼쪽부터 영단의 기운을 천천히 불어넣는다.
“내가 말한 방식으로 기운을 움직여야 한다. 알았지?”
“알았소. 근데 꼭 백 번을 다 해야겠소?”
영단의 혼은 처음부터 삐딱선을 탄다.
“싫으면 빠져라. 나 혼자 해도 되니까.”
“아..아닙니다. 뭐합니까? 동생들이 기다리잖습니까?”
“그 전에 한 가지 정할 게 있다.”
“또 뭡니까?”
“니 이름.”
“이름 요?”
“그래. 아무리 우리 둘만의 대화라고 하지만 야, 너, 임마, 자식이, 새끼. 이런 식으로만 부를 순 없잖니?”
“그야 그렇지만... 그럼 주인님이 한 번 지어보슈.”
“음! 이름 이란 건 원래 부르기 쉽고 예뻐야 되는데... 미어가 어떠냐? 아름다울 미에, 고기 어. 미어(美魚)! ”
“미어? 크게 나쁘진 않네요.”
“좋아. 그럼 지금부터 넌 미어다. 미어야.”
“왜요?”
“이 자식이, 지 이름을 지어주신 분에게 말투가 그게 뭐야?”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 데..요?”
“예. 라고 해야지. 공손하게.”
“알았소. 다시 불러보시오.”
“미어야.”
“예, 주인님. 이렇게 요?”
“그렇지. 잘 하네. 그럼 시작한다. 마음 편히 먹어라.”
무진이 자신의 몸속에 들어온 미어의 기운을 천천히 호란의 몸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 뒤이어 주위의 자연 기운을 보탠다. 순간 호란의 몸은 맑고 청아한 기운으로 뒤덮인다.
“으음!”
미어도 약간 논라는 눈치다. 자신의 기운이 그렇게 아름다운지 몰랐던 것이다.
“뭐하냐?”
“아! 아닙니다.”
무진의 목소리에 미어는 정신을 차리고 계획한 대로 기운을 움직인다. 호란에 이어서 자혜와 자미, 그리고 곤일, 쌍마, 적마대군, 분타주, 태민사형제 순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모두 네 번의 위기를 맞이한다. 당연히 쌍마와 적마대군, 그리고 분타주의 순서에서 생긴 일이다.
의외로 적마대군은 살짝 당황하더니 일회전을 하고, 두 번째부터는 비교적 부드럽게 진행된다. 하지만 쌍마와 분타주는 거의 오 회전을 할 때까지도 중간 중간 흐름이 끊겨 미어가 비명을 질러댄다.
“대체 이런 멍충이들을 어디서 데려온 거요?”
“동생들인데?”
“뭐..뭐요? 주인님의 동생들이라고라?”
“결국은 모두 니 주인들이지.”
“예에? 으음! 그렇게 되는 건가?”
“니 주인을 욕하는 건 스스로를 욕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아직 어려서 그렇지 너보다 못한 것도 아니고. 넌 백 살 전에는 뭐했냐? 후후, 아마 내단은 생기지도 않았을 걸?”
“그거야 그렇지만....”
“그럼 입 다물고 하던 일이나 계속해.”
“치! 알았소.”
이렇게 해서 정확하게 백 회를 마치자 호란을 비롯한 동생들은 스스로 신체의 변화를 느낀다. 태민 사형제, 그리고 곤일은 한층 내력이 정교해졌고, 자혜와 자미는 자연무예를 펼칠 수 있을 정도의 내력을 얻게 된다. 호란은 무진을 돕기 위해서 참여했을 뿐이다. 무엇보다 효과를 많이 본 사람은 쌍마와 적마대군, 그리고 분타주다. 그들은 운기조식을 하는 과정에서 단전에 모여 있는 기운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 주화입마에 빠질 뻔했다.
“대..대형! 기운이 이렇게 빠르게 움직여도 문제가 안 생길까요?”
“문제라도 있니?”
“그게 아니라 내공도 몇 배나 강해졌는데 빠르기까지 하니까 걱정이 돼서 말입니다.”
“그만큼 네 기운을 움직이는 통로가 넓어졌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에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만약 통로가 넓어지지 않았는데 한꺼번에 많은 양의 기운이 흐르면 그땐 사람이 견디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 네 기운이 흐르는 통로는 이전보다 적어도 다섯 배는 더 커졌다. 그러니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앞으론 두, 세 배의 더 많은 기운도 너끈히 소화시킬 수 있을 게다.”
“그건 제 내공이 그만큼 더 강해졌다는 거죠? 아얏! 왜 때리... 우웁!”
흑마는 분타주의 머리를 때리곤 황급히 입을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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