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14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14
“헐헐헐! 나더러 진정하라더니 네가 더 흥분하는구나.”
“죄..죄송하옵니다.”
“그래. 네 마음을 어찌 모르겠느냐? 하지만 그러기에는 상황이 너무 암울하구나. 흐음! 미홍아, 그보다 더 무서운 게 뭔지 아느냐?”
“지금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단 말입니까?”
“놈들은 무슨 이윤지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기다리지만 않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전면에 나선다면 황실은 물론이고, 중원 전역에 피바람이 불게다. 난 그게 두렵단다.”
“폐하, 전혀 방법이 없나이까?”
“황제인 내 힘으로도 그들을 막을 수가 없다. 관료들은 물론이고, 군부도 놈들의 손에 넘어간 지가 오래 되었다.”
“폐하께 충성하는 분들이나 무림의 도움을 받으면 안 될까요?”
“나를 위해 나섰던 심복들은 모두 하루아침에 시신으로 발견되고, 무림은 이미 오래 전에 놈들의 수중에 떨어진 상태다.”
“그럼 어떡해요?”
“그래서 난 네게 마지막 희망을 걸어볼 생각이다.”
“제게요? 제 목숨은 언제든지 폐하를 위해 바칠 수 있사오나 그게 무슨 힘이 되겠습니까?”
“내게 세 가지의 힘이 있다.”
“세 가지요?”
“그래. 내가 만든 게 아니라 전전대부터 시작해서 내 대에 와서 완성한 것이다.”
“그렇게 오래 동안 준비했으면 기대해볼만 하겠군요.”
“그걸 네게 주마.”
“제게 요?”
“그래. 너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전 그게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네가 놈들과 싸우는 걸 원하진 않는다.”
“그럼 제 역할은 무엇인가요?”
“그걸 한 사람에게 전해주면 된다.”
“누구에게요?”
“그건 나도 모른다.”
“예에?”
“하지만 부황이 말씀하셨으니 결코 거짓은 아닐 것이다.”
“폐하!”
미홍은 후궁전으로 걸어가면서도 어젯밤 꿈을 생각한다. 40년 전 전전대 황제와의 대화 내용인데, 황제가 승하한 이후 지금까지 일주일이면 거의 3,4일을 같은 꿈을 꾼다. 현실에서의 대화내용이 꿈에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게 수십 년 동안 변하지 않고 계속된다는 건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요즘은 갈수록 꿈의 내용이 선명해지고 있다. 오히려 40년 전 폐하와 대화를 나눴을 때보다 더 또렷하다. 혹시 폐하가 말씀하신 그 분이 나타나시려고 그런 걸까? 후후, 그러고 보면 나도 참 이상한 사람이야. 아직도 그런 황당한 얘기를 믿고 있다니 말이야. 근데 오늘 따라 안개가 짙네. 비가 오려나? 아닌가?’
미홍은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눈을 비벼보기도 한다.
“고작 40년을 기다리고 지친 것이냐?”
갑자기 엉뚱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호호! 이젠 헛소리까지 들리네. 그 동안 너무 집착한 거야. 그게 문제였어.”
“집착은 안 되지. 그럼 얼른 기억을 지워라.”
“지워? 이게 무슨 소리지? 아무도 없는데?”
미홍은 주위를 여러 번 둘러보지만 사람은 고사하고 그림자도 안 보인다.
“누가 장난치나? 그럴 리는 없는데, 내 눈을 속일 자는 이 세상에 거의 없다.”
미홍은 고개를 흔들며 다시 걸음을 옮긴다. 근데 그는 채 다섯 걸음도 옮기지 못한다.
“그걸 어떻게 장담하시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무진이다. 그는 유체이탈법을 이용해서 황실을 조사하는 중이다.
“헉!”
“그런 실력을 가졌으면서 뭐가 두려워서 숨어 지낼까?”
우우우웅!
무진의 말이 끝나자 미홍의 태도가 달라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순한 양 같던 그의 기운이 갑자기 들개처럼 거칠게 변한다.
“호오! 그 동안 실력을 잘도 감춰왔군. 그래서 이젠 제대로 한 번 해보시겠다고?”
“마지막 경고다. 모습을 드러내라.”
미홍이 기운을 더 끌어올리자 주위의 나무들이 폭풍을 만난 듯 크게 흔들린다.
“후후후, 하긴 40년을 숨겨온 실체가 들통 났으니 끝장을 봐야겠지. 그럼 주작단의 단주 실력을 한 번 볼까?”
“뭐..뭐라고?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아느냐?”
“글쎄? 어떻게 알게 됐을까? 영화루의 명희가 말해줬나? 아니지. 아니야. 수류장의 혜월이한테 들었을 거야. 황실에 미홍이란 늙은 계집이 있는데, 고년이 얼마나 음흉한지 주작단이란 걸 만들어서 40년 동안 황실을 뒤엎을 음모를 꾸며왔다는 거야. 그것도 아닌데... 주민이가 그랬던가? 지난번에 울고불고 하면서 뭐라고 한참을 떠들었는데.... 자꾸 헷갈리네.”
“누..누구냐? 누군데 폐하를 알고 있단 말이냐?”
“아는 건 아니고, 얘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런 코흘리개를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감히. 누구더러 코흘리개라고 하는 거냐? 당장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까?”
“후후후, 우리 주작단주께선 뭘 잘 모르시구먼. 내가 모습을 드러낼 것 같으면 처음부터 그랬지. 그런데 말이야. 듣자 듣자하니 상당히 버릇이 없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도 모자랄 판에 큰소리에 협박까지 해?”
“내가 왜 너 같은 놈에게 무릎을 꿇어?”
“크크크, 할 수 없군. 내 평소 신념대로 하는 수밖에.”
빠악!
“크아악!”
미홍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구른다.
‘이..이럴 수가? 분명히 허상은 아니다. 그럼 투명인간이란 말인가? 아니야. 아니야. 투명인간이라면 기운이라도 느껴져야 하지 않는가?’
“까악!”
다시 바닥을 구른다. 그렇게 무려 스무 번을 쓰러진 다음에야 구타가 멈춘다. 이때 지나가던 나인이 달려와 그녀를 부축한다.
“미홍! 어디 편찮으신가요?”
“아니다. 조금 어지러울 뿐이다.”
“어..어머! 큰일이네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어의를 부르겠습니다.”
나인은 미홍의 상태를 확인하곤 화들짝 놀란다.
“아..아니다. 괜히 소란 피우지 마라. 어젯밤에 잠을 설쳐서 그런 거니까.”
“정말 괜찮으세요? 한, 두 번 넘어지신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래. 고맙구나. 저녁에 내 숙소로 오너라. 네게 잘 어울릴만한 비단을 준비해뒀다. 구정 때 옷을 해 입으면 잘 어울릴 게다.”
“정말이세요? 전 아직 비단옷을 입어보지 못했는데.”
“넌 피부가 고와서 비단옷을 입으면 후궁만큼이나 예쁠 거야. 기회가 되면 황상의 은혜를 입을 수도 있고.”
“저..정말이죠? 정말 제게 비단을 주시는 거죠?”
“물론이지. 내가 주는 게 아니라 하늘이 너처럼 착한 애들에게 주는 선물이란다.”
“흐흑! 고마워요.”
나인은 눈물을 흘리며 미홍의 품에 안긴다.
“자, 그럼 가서 일 봐야지.”
“예.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그럼 나중에 뵐게요.”
“그래. 저녁에 보자꾸나.”
그렇게 나인은 빠른 걸음으로 사라진다. 아마 동무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다.
“주민이란 놈이 그래도 예의범절은 잘 가르쳤구나. 하긴 그러니까 믿고 맡겼겠지.”
“...... 호..혹시 그 분이 말씀하신 분이신가요?”
“너 바보지?”
“예에? 무슨 말씀이신지?”
“그 놈이 무슨 말을 했는지 내가 어떻게 아냐고?”
“폐하께선 제게 주작단과 두 개의 창고 열쇠를 주시면서 주인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 주인이란 말이냐?”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그 놈은 확인할 방법도 안 가르쳐 주더냐?”
“그게...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한데....”
“그런데?”
“방법이 좀...”
미홍은 말을 제대로 못한다.
“쯧쯧, 알만 하군. 민이 그놈이 내 얼굴이 못생겼을 거라고 했지. 그치?”
“아..아니옵니다.”
“그럼 뭐가 문제냐?”
“실은 상당히 나이가 많은 분일 거라고 하셨습니다. 근데 목소리만으로 확인할 길이 없어서....”
“그러니까 나이가 많다고 했는데, 목소리는 어려 보여서 아닌 것 같다는 거구나?”
“예, 그렇사옵니다.”
“근데 넌 왜 갑자기 극존칭을 사용하니?”
“목소리는 그렇지만 다른 건 모두 폐하께서 말씀하신 것과 일치해서....”
“그럼 외모만 늙어 보이면 되는 거냐? 이렇게 말이야.”
“허..허억! 어머머!”
미홍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뒷걸음질을 치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유체이탈법은 원래 영혼만 허공에 떠돌아다니는 것이다. 근데 지금의 모습은 사람의 형체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만큼 무진의 경지가 높아졌다는 걸 의미한다.
“이만하면 됐니?”
목소리는 변하지 않았지만 외모는 백 년 뒤 무진의 모습이다.
“이런 미안, 미안! 목소리도 변해야겠지? 음! 음! 이 정도면 얼굴과 비슷한가?”
“워...원래의 모습도 보여주실 수 있사옵니까?”
“그 참! 까다롭게 구네. 이게 현재의 내 모습이다. 봐줄만 하니?”
다시 모습이 바뀌더니 본래 무진의 얼굴이 나타난다.
“주..주인!”
그제야 미홍은 무릎을 꿇는다.
“야! 너 조금 전에 나이가 많아야 된다고 하지 않았어?”
근데 왜 젊은 얼굴을 보고도 인정하느냐 하는 말이다.
“실은 제가 주인을 속였습니다.”
“속여?”
“예, 폐하께선 나이는 많지만 외모는 젊은 사람일 거라고 하셨습니다.”
“후후후, 그러니까 날 시험했단 말이지?”
“죽을죄를 졌습니다. 죽여주십시오.”
“하긴 네 입장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그건 됐고. 폐하라고 하는 친구가 네게 내린 명령이 있을 텐데. 준비가 됐느냐?”
“그게....”
“야!”
“예! 주..주인.”
“넌 어째 말버릇이 그러냐? 앞으로 한 번만 더 ‘그게’란 말을 쓰면 혼날 줄 알아라. 알았어?”
“예, 주인.”
“그럼 이제 말해봐.”
“그게... 아..아닙니다. 진짭니다. 배후의 인물을 알아내기 위해 지난 40년 동안 모두 열 번을 시도했습니다. 근데...?”
“근데?”
“세 번은 근처까지 접근했는데 실패했고, 일곱 번은 제대로 시도도 못했사옵니다.”
“그러니까 40년 동안 헛수고만 했다는 거군.”
“죄송합니다.”
“야! ‘죄송합니다.’도 그만 해!”
“죄송하... 죄송합니다.”
“쯧쯧, 큰일이다. 큰일. 주민이 그 놈은 대체 뭘 보고 이런 멍청한 놈에게 임무를 맡겼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성과가 없진 않았사옵니다.”
“어떤 성과?”
“두 곳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환관과 동창을 말하는 거냐?”
“아닙니다.”
“아니라고?”
“예.”
“그럼 어디란 말이냐?”
“한 군데는 마방이고, 다른 곳은 제례청이옵니다.”
“야, 다 좋은데 제발 말투 좀 바꿔라. 입만 열면 이옵니다. 사옵니다. 이게 뭐냐? 앞으로 나와 대화할 때 또 그런 말을 쓰면 ... 각오해라.”
“명심할 게..게요.”
미홍은 말투를 고치려고 노력한다.
“근데 제례청은 제사를 지내는 곳이지?”
“그렇습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지요.”
“제사장도 있고, 권세도 대단하겠군.”
Commen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