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13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13
“쯧쯧쯧, 아마 이런 걸 두고 배신감이라고 하겠지?”
“배신감은 좋게 말한 거고, 사기를 당한 거지. 사기.”
“동생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사랑가를 부르는 형이 세상에 또 있을까?”
이때 막 동생들이 강시와의 싸움을 마쳤다. 기운을 모두 빼앗긴 강시들은 옷만 남기고 모두 가루로 변해버렸다.
“부러우면 니들도 장가를 가면 되지?”
왕명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반격을 한다.
“호호호! 충아, 고맙다. 오라버니랑 행복하게 잘 살게.”
미려는 더 하다. 아예 자신과 왕명의 결혼을 기정사실화해버린다.
“근데 태양장 놈들은 어떻게 됐니?”
그 말을 끝으로 왕명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버린다.
“개방과 묵사회에서 처리를 했습니다.”
소개의 말대로 태양장의 무사들은 신원이 공격받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중원대장군부를 떠나 이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나오자마자 개방과 묵사회의 공격을 받아 거의 전멸했다. 그렇다고 죽었다는 건 아니다. 단전이 파괴된 상태로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수고했다. 우린 먼저 들어갈 테니까 나중에 보자.”
그 말만 남기고 왕명은 미려의 손을 잡고 유유히 사라진다.
“야, 정말 어이가 없네. 얘들아, 명이 형이 우리한테 이래도 되는 거니?”
조충이 기가 찬다는 듯이 말한다.
“그러게 말입니다. 명이 형님이 생각보다 음흉하네요.”
“여자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야. 걱정이다.”
“그게 왜 걱정입니까? 아까는 숙맥이라고 걱정하시더니?”
“차라리 처음부터 대놓고 저랬다면 그러거니 하겠는데, 지금까지 점잔 빼고 있다가 갑자기 날티 나게 하니까 그렇지.”
조충은 누이가 걱정되는지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는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뒷조사를 해봐야 하는 거 아니오? 아무래도 선수 같아.”
추개까지 거든다.
“장담하는 데. 저런 사람은 절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너처럼.”
갑자기 화살이 추개에게로 날아간다.
“어떻게 아셨소?”
“개방 주변엔 아무리 찾아봐도 예쁜 여자들이 없더라고. 그래서 네놈 짓인지 알고 있었다. 낄낄낄!”
“하하하!”
“하하하! 그래도 한 시름 놨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휴우! 형님만 그런 줄 아시오? 형님이 두 분을 결혼시키자고 한 뒤로 추개 형님이랑 전 잠을 못 잤소.”
소개는 한숨까지 쉬면서 엄살을 떤다.
“그래서 옛날부터 거시기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다 알아서 한다고 한 거야.”
“우리도 우리지만 대형도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거요.”
“그러게나, 말이다. 이런 걸 하늘이 도왔다고 하는 거겠지?”
이렇게 왕명 형제의 세심각과 태양장에 대한 복수전은 미담(美談)으로 마무리 된다.
동생들이 북경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때 무진도 근처에 있었다. 바쁘기로 한다면 동생들보다 더했다. 그의 활동 범위는 주로 황실이었다. 지난 한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돌아다닌 결과 몇 군데 의심나는 곳을 찾아냈다.
이미 왕명 일행에게 조사를 맡겼다. 그걸 바탕으로 오늘은 마지막 한 군데를 더 살펴보고 있다. 그 동안은 주로 황실의 남자들을 조사했다. 하지만 오늘은 가장 의심이 가는 여인을 찾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지위가 높거나 젊고 아름다운 여인도 아니다.
황실 사람들은 그녀를 미홍(眉紅)이라고 부른다. 눈썹이 유난히 붉고 예쁘기 때문이다. 그녀는 12살에 황실 시녀로 들어와 거의 50년 동안 황족들을 뒷바라지 해왔다. 그녀가 모신 황후만 하더라도 네 명이나 된다. 지금도 황후나 후궁들이 문제가 생기면 대부분 그녀를 통해서 해결한다. 황실 사람들이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그녀가 인기가 좋은 이유는 항상 밝게 웃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늘도 아침부터 맑고 밝은 미소로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그녀의 일과는 지난 50년 동안 단 하루도 변하지 않았다.
자금성의 수많은 건물 중에서 여인이 다닐 수 있는 곳이면 모두 그녀의 근무지이다. 하루에 단 한 곳도 빠짐없이 그 근무지를 모두 살핀다. 그게 바로 그녀의 일과다. 그러니 그녀만큼 황실에 대해서 정통한 사람이 없을 수밖에.
“미홍, 아침부터 어딜 가시옵니까?”
“그래. 점이로구나. 오늘은 후궁마마님들 숙소부터 살펴보련다. 너도 같이 갈 테냐?”
“아니에요. 소녀는 지금 태자전으로 심부름을 가는 중이옵니다.”
“그거 안 됐구나. 지난 번 서역에서 들어온 서양과자를 후궁전 나인들에게 챙겨두라고 했는데.”
“예에? 서양과자라고 했사옵니까? 그럼 태자전에 갔다가 바로 따라가겠사옵니다.”
“예끼, 이놈아!”
“히히히!”
“헐헐헐! 걱정마라. 늙은이가 돌아오는 길에 가져다주마.”
“정말이에요?”
“당연하지. 내가 아니면 누가 우리 점이를 챙기누?”
“감사하옵니다. 언제든지 시키실 일이 있으시면 말씀만 하십시오. 목숨까지는 아니더라도 미홍 어르신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치겠사옵니다. 헤헤헤헤!”
점이라는 나인은 웃으며 미홍에게 애교를 부린다.
“알았다. 조심해서 잘 다녀오너라.”
“예, 마마님도 항상 조심하세요!”
열 살이 조금 넘었을 것 같은 나인이 꾸벅 인사하며 태자전을 향해 달려간다.
“저..저런! 조심해야지. 헐헐헐! 언제 봐도 귀엽단 말씀이야. 내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겠지? 후후, 이제 그 추억들도 가물가물한 것이 나도 갈 때가 다 된 모양이다. 근데 요즘 왜 같은 꿈을 계속 꾸는 걸까?”
그는 걸어가면서 생각에 잠긴다.
“미홍아!”
“예, 폐하!”
“너는 왜 후궁을 마다하느냐?”
“폐하, 전 오랫동안 폐하를 모시고 싶사옵니다.”
“그러니까 후궁으로 나랑 백년해로하면 되지 않느냐?”
“폐하! 지금 황실의 권력 관계로 봐선 제가 후궁이 되는 순간 며칠을 못 넘길 것입니다. 전 폐하의 성은을 입는 건 오늘 하루만으로도 족하옵니다. 대신 오랫동안 폐하를 모실 것이옵니다.”
“허허허허! 이날까지 중원의 내로라하는 여인들을 다 품어봤지만, 너 같은 아이는 처음이구나. 넌 내 명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느냐? 다른 놈보다 내 손에 먼저 죽을 수 있단다.”
“그 또한 성은이온데 마다할 이유가 없사옵니다.”
“에잉? 내 손에 죽는 것도 성은이라고?”
“사실 전 욕심이 많은 계집이옵니다.”
“그래서 따로 원하는 게 있느냐?”
“오직 한 가지뿐이옵니다. 비록 천하절색은 아니오나 제 몸과 마음을 오직 한 사람, 폐하께만 바치고 싶사옵니다.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윤허해 주시옵소서.”
“으하하하하! 큰일이로다. 큰일이야.”
“폐하, 무슨 걱정이라도 있사옵니까?”
“그래. 짐이 너 때문에 고민이 많구나.”
“죄..죄송하옵니다. 폐하, 소녀를 죽여주옵소서. 이 못난 계집이 폐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사옵니다.”
“헐헐헐! 조금 전에 그렇게 격렬하게 하고도 또 성은을 내려 달라고?”
“예에? 제가 언제....”
“네가 그러지 않았느냐? 내 손에 죽는 건 성은을 입는 거라고.”
“아!”
“네 말대로 넌 황후나 후궁들처럼 천하절색은 아니다. 하지만 넌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많이 가진 보물 중의 보물이다. 그래서 내가 곁에 두고 싶은 게다. 그런데 고집을 부리니...”
“폐하! 크흐흐흐흑!”
미홍은 바닥에 엎드려 구슬프게 운다. 황제는 그녀에게 다가가 포근히 안아준다.
“저라고 왜 폐하를 매일 밤마다 모시고 싶지 않겠사옵니까? 하오나....”
“하오나?”
“만약 제가 후궁에 임명되는 순간 황실은 힘의 균형이 깨지면서 끊임없는 권력 투쟁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건 폐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사옵니까?”
“흠! 너도 그걸 알고 있었더냐? 자..잠깐! 그러니깐 넌 나의 고충을 알고서 그리 말한 것이냐? 후궁이 되지 않겠다고.”
“크흐흐흐흑! 폐하! 소녀는 죽고 싶을 따름이옵니다. 폐하!”
미홍은 황제의 품안에서 통곡을 하듯이 운다.
“이..이런! 내가 널 하룻밤 품을 여인으로만 보진 않았지만, 이렇듯 특별한 아이인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몰랐어. 허허허허! 이것도 하늘의 뜻인가?”
황제는 한편으론 허탈하고, 한편으론 너무도 기쁘다. 그는 자기가 평생을 안고 있던 고민을 풀어줄 여인을 만났다고 생각한다.
“폐하, 무슨 말씀이신지?”
“네가 뒷배가 없는 평범한 집안 출신이라고 나도 모르게 무시했구나. 진심으로 사과하마.”
“폐하, 폐하가 미천한 저에게 사과라니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아니다. 난 황제가 아니라 신이라도 잘못한 것이 있으면 누구에게나 말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진정한 군주는 자신의 잘못을 반드시 말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게 내 생각이다.”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부디 만수무강하시어 중원의 진정한 별이 되시옵소서. 그길 만이 수천만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 길이옵니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 하지만 세상이 날 그렇게 내버려두질 않구나.”
“그 자들 때문이옵니까?”
순간 허공을 쳐다보던 황제의 고개가 홱! 돌아가며 미홍을 쳐다본다.
“그 자들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폐하! 저도 눈이 있어 볼 수 있고, 귀가 있어 들을 수 있사옵니다. 그 자들이 황실을 능멸하고, 폐하의 수족을 잘라내고 있단 걸 알고 있사옵니다.”
“허허허! 대체 네 능력이 어디까지란 말이냐? 진즉 알았더라면... 하긴 알았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폐하, 걱정 마시옵소서. 제 목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폐하를 지켜드릴 것이옵니다.”
“허허허! 이렇게 기쁜 일이 있나? 태어나 그 어떤 것이 네가 한 말보다 더 달콤하고, 따뜻하며, 힘이 됐을꼬? 으음! 미홍아!”
“예, 폐하!”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하느니라. 기억하고, 또 기억해서 십 년, 이십 년, 오십 년이 지나도록 생생하게 떠올려야 한다. 알았느냐?”
“예, 폐하! 소녀 미홍은 숨이 넘어가는 그 날까지 기억하고, 또 기억할 것이옵니다.”
“그래. 짐은 오직 너만을 믿는다. 아니, 믿을 것이다.”
“폐하! 서두르지 마시옵소서.”
“그래. 갑자기 너란 희망이 보이니 마음이 급해져서...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느니.” “폐하! 항상 즐겁게 지내셔야 하옵니다. 몸에 잘 맞는 걸 드시고, 좋은 일만 생각하시고, 즐겁게 지내셔야 하옵니다.”
“그래. 네 말을 들으니 진정이 되구나. 미홍아!”
“예, 폐하. 너도 말했듯이 황실은 오래 전부터 알 수 없는 세력에 의해서 장악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누군가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
“폐하께서 계신데 감히 어떤 놈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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