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15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15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궁 생활을 저보다 더 오랫동안 한 사람들이 수두룩하대요.”
“그 말투 좋다. 그렇게 말하니까 얼마나 간결하고 좋아? 근데 말이야. 늙은이가 많다고 의심을 받아야 할 이유가 뭐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두 곳은 공식적인 접촉 외엔 일체 접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뭔가 숨기고 있단 뜻이라 생각합니다.”
“흠! 그건 좀 설득력이 있군. 하여튼 성급하게 접근하지 마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황실의 움직임만 면밀하게 조사해라.”
“알겠사...습니다.”
“그럼 난 이만 돌아간다.”
“주..주인님, 이렇게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럼 나랑 침대에서 뒹굴기라도 하잔 말이냐?”
“그..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됐다. 격식 차리는 건 다음에 하자. 그리고 기다려 줘서 고맙다. 마음 같아선 은퇴라도 시켜주고 싶지만, 상황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질 않다. 이해해주기 바란다.”
“은퇴라뇨? 전 이곳이 좋습니다.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일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쯧쯧, 그러게. 어릴 적부터 일만 하지 말고 노는 법도 좀 배우지. 나 진짜 간다. 다음엔 온전한 모습을 보여주마.”
“기대하겠습니다. 그럼 조심해서 가십시오.”
“너도 조심해라. 그리고 다음에 만날 땐 주인이란 말도 쓰지 마라. 차라리 오라버니라고 불러.”
“오라버니? 호호호! 고마워요. 그건 지킬 자신이 있어요.”
이렇게 두 사람은 불과 반 시진 만에 마치 오누이처럼 가까운 사이가 된다.
일주일 후.
미홍은 황급히 마방으로 향하는 중이다. 그 외에도 수백 명이 앞서 달리고 있다.
“미홍 언니! 어떻게 된 거예요?”
중년의 시녀가 미홍에게 붙어서 달린다.
“나도 몰라. 연락만 받고 가는 중이다.”
“황세손께서 다치신 건 분명하죠?”
“그렇게 들었다.”
“저도 그렇게 들었지만 황세손께서 마방엔 왜 가셨을까요?”
“그걸 내가 어찌 알겠니? 다만 내가 알기로 황세손이 마방에 갈 일은 하나뿐이야.”
“그게 뭐예요?”
“말 타기!”
“왜요?”
“제왕이 되려면 말 타기와 무공은 기본으로 배워야 하거든. 황제 수업의 일종이지.”
“그래도 이제 겨우 열 살이신데 벌써 승마(乘馬)를 배우면...”
“그만! 넌 더 이상 말하지 마. 잘못하면 불경죄로 곤장 맞을 수도 있으니까.”
“아..알았어요.”
“그래도 황세손을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황실에서 우리 교희가 최고지. 너 혹시 황세손의 숙소로 옮기지 않을래?”
“제가요?”
“그래. 너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까 편하게 지내려면 갈 필요가 없고.”
“아..아니에요. 전 언니 말씀대로 황세손님이 너무 좋아요.”
“너 지금 황세손을 니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예에? 그거야 말로 불경이에요.”
“호호호! 설마 우리 교희가 이 언니를 고변할까?”
“그야 그렇지만...”
“근데 정말 내 말이 틀렸니?”
“예에? 휴우! 사실 언니니까 말씀드리는 거지만, 전 시집은커녕 다른 남정네랑 손도 한 번 못 잡아봤어요. 그건 언니도 잘 아시잖아요?”
“그게 바로 궁녀들의 비애(悲哀)지.”
“근데 황세손을 볼 때마다 자꾸 내 아들이란 생각이 드는 거예요.”
“으음!”
“제가 잘못된 건가요?”
미홍의 표정이 굳어지자 교희는 덩달아 긴장한다.
“아니다. 내가 생각한 그대로다. 너야말로 황세손을 모시기에 가장 적임자다.”
“어..언니!”
교희는 미홍의 품에 안긴다. 어느새 눈가에는 이슬이 맺힌다.
“걱정마라. 다음 달부터 황세손을 모실 수 있도록 해줄 테니까.”
“저..정말이에요?”
“물론이지. 이 언니가 언제 거짓부렁 하는 것 봤니?”
“그건 아니지만 쉬운 일이 아니라서.”
“내가 제일 아끼고 좋아하는 교희의 일인데 뭔들 못하겠니?”
“고마워요. 언니! 이 빚은 반드시 갚을 게요.”
“당연하지. 황실에서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살아남으려면 뭉쳐야 한다. 안 그러면 당장 쫓겨나도 막을 방법이 없다. 명심해야 한다.”
“예, 언니. 전 언제나처럼 언니의 뜻을 따를 거예요.”
“그래. 어서 가자꾸나.”
두 사람은 황실에서의 생존법칙을 확인하곤 발걸음을 재촉한다. 마방은 황실의 남쪽 구석에 위치해 있다. 말들의 냄새 때문에 가장 외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가끔 궁녀들이나 내시들은 마방에서 자유롭게 뛰어놀기도 한다. 근데 두 사람은 마방을 향하는 길목에서 걸음을 멈춘다.
“무슨 일이지?”
“황세손 사건 때문이겠지. 가보자.”
“예.”
마방의 입구에는 수백 명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대부분 시녀들이다.
“마마님! 금의위가 길을 막고 있어요. 어떡해요?”
“미홍! 황세손께서 손가락 하나만 다쳐도 전 죽은 목숨이에요. 근데 확인은 고사하고 들어갈 수도 없어요. 제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세요.”
“너흰 날 믿느냐?”
“물론이에요. 마마님은 저희 나인들의 기둥이십니다.”
“그럼 물러나 기다려라. 난 너희의 믿음에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예.”
미홍의 말에 나인들은 모두 뒤로 물러난다. 그걸 보는 순간 금의위의 위사들이 긴장한다. 그들도 미홍을 알기에 본능적으로 상대하기 까다롭다는 걸 느낀 것이다. 그녀가 나타나자마자 누군가가 달려나온다. 그는 40대 중반의 화려한 복장을 입은 자이다.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황실의 터주대감이신 미홍 마마님이 아니십니까?”
“누구시더라?”
미홍은 애써 상대를 무시한다.
“누님, 이거 왜 이러십니까? 저, 금의위의 2인자인 부통령 맹준입니다. 맹준!”
“그런 놈이 내 아이들을 이렇게 추위에 떨게 해? 하긴 요즘 입으론 누님, 누님 하면서 늙은 할망구라고 욕하는 놈이 있단 소문이 있더라.”
“예에? 어느 미친놈이 그런 짓거리를 한단 말씀이오? 황실, 아니 중원에서 미홍 누님을 무시하고 살아남을 놈이 어딨습니까?”
“그런데도 아이들을 계속해서 이렇게 세워놓을 거냐?”
“누님, 이번만은 절 좀 봐주십시오. 이번 일은 통령이라 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흥!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모두 능지처참(陵遲處斬) 당하는 걸 보고 싶단 거냐?”
“그게 무슨 말이오? 저 아이들이 왜 능지처참을 당한단 말씀이오?”
“이놈아! 황세손의 존체에 문제가 생기면 나인들이 제일 먼저 죽어나간다는 걸 모른단 말이냐? 정녕!”
미홍은 뒤쪽에 있는 금의위의 위사들이 들을 수 있게 큰소리로 말한다. 순간 그들의 몸이 흔들리는 게 보인다. 이유는 간단하다. 모두가 쉬쉬하고 있지만 금의위 무사들과 나인들이 그렇고 그런 사이란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 다만 눈감아 줄 뿐이다.
평생 황제의 은총을 받을 기회가 없는 나인과 혈기왕성한 금의위 무사들이 가까워지는 건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다. 근데 나인들의 목숨이 위태롭단 말에 위사들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아이고, 누님! 왜 이러십니까?”
“그럼 네놈은 백 명이 넘는 니 새끼들이 모조리 끌려가 뒈져도 가만있을래?”
“그건 아니지만....”
“대체 어떤 놈이 일을 꾸미고 있는 거냐? 안되겠다. 통령이라도 만나봐야겠다.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미홍은 통령이 마방에 있단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도발을 하는 거다.
“그러고 보니 통령이 지난번에 내게 부탁한 게 있었지. 그 문제를 해결해주면 아마 이번 일도 도와줄 거야.”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금시초문인데....”
부통령은 찔리는 게 있는지 말꼬리를 흐린다.
“그게 말이다. 지난 달 중순쯤 됐을 거야. 통령이 지방 순시를 하고 막 돌아왔는데, 평소 그 인간이 즐겨 찾던 아이가 마중을 안 나온 거야. 알고 봤더니 몰래 궁 밖으로 나가서 며칠 째 돌아오지 않았대. 한 마디로 바람을 피운 거지.”
“그..그래서요? 그 인간도 창피했던지 나한테 은밀하게 부탁하더라고. 어떤 놈하고 붙어먹었는지 찾아달라고. 혹시 자넨 알고 있나?”
“그..그럴 리가 있습니까? 전 누님께 처음 듣는 얘깁니다.”
부통령은 미홍을 쳐다보지도 못한다.
“그래? 난 짐작 가는 놈이 있긴 한데, 어쩌지?”
“누..누님!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는 황급히 미홍의 입을 막는다.
“왜, 좋은 방법이라도 있니?”
“사실 출입금지령이 내려져 이 많은 아이들이 다 들어가면 금의위 전체가 문책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후궁 중에 한 분이라도 모시고 오시면 제가 명분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후후후, 니가 그래도 인복은 있구나.”
부통령이 말하는 사이 멀리서 일단의 사람들이 몰려오는 게 보인다.
“마마님, 황후폐하의 행차이십니다.”
“휴우!”
행렬이 확인되자 부통령의 입에서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당연히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다.
“난 누님만 믿소.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시죠?”
“그래. 이놈아. 모든 게 너 하기 나름이란 걸 잊지 마라.”
“나야 항상 누님의 딸랑이가 아닙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내 입은 황실무고보다 더 열기 어려우니 걱정 말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부통령은 미홍 일행이 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한참을 멍하니 쳐다본다. 자신의 목이 붙어 있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면서.
“뭐라고? 황실금옥에서 죄수가 탈출을 해?”
마방에 들어온 미홍은 나인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황후 일행을 따르고 있다.
“예, 그 자가 황세손을 공격한 모양이에요?”
“말이 돼? 황실금옥이 어떤 곳인지 알고도 그런 말을 하느냔 말이다!”
황실금옥(皇室禁獄)은 황실의 외곽인 마방 근처에 있다.
“저희들도 들었을 뿐입니다. 지하 10층의 깊이에 무려 50가지의 기관진식과 함정이 있어서 한 번 갇히면 외부에서 열어 주지 않는 한 나올 수 없는 무시무시한 곳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도 탈출했다는 건 누군가가 문을 열어줬다는 거잖아?”
“그것까진 저희도 몰라요.”
“황실금옥은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곳이다. 당연히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곳일 테고.”
“갇힌 사람도 보통인물은 아니겠군요.”
“보통 인물이 아닐 뿐 아니라 무림사에 남을 정도로 위험한 인물들만 가두지.”
“아! 그래서 지난 50년 동안 갇힌 사람은 한 명도 없었군요.”
“그 말은 그 전에는 있었다는 거냐?”
“그러니까 탈출을 했겠죠. 아마 다섯 명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탈출한 모양이에요. 근데 정말 무서운 게 뭔지 아세요?”
“너 지금 날 겁주려는 거지?”
“아..아니에요. 감히 마마님께 누가 겁을 줘요? 다만... 그들은 50년 이상을 아무런 음식도 공급받지 않았는데도 살아남았데요. 무섭지 않아요?”
나인은 겁먹은 표정으로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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