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 89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 89
“좋다! 이제 내일 아침 동이 틀 때까지 우리 개방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볼 것이다. 이제 지난 백여 년 동안 억눌려왔던 개방의 정신인 자유와 정의의 깃발을 들어 올리자! 더 이상 강자에게 짓밟히고, 굴종하는 역사는 사라져야 한다. 지금부터 개방은 다시 태어난다. 물론 그 길은 멀고 험난할 것이다. 개방의 제자들이여. 나와 함께 고난의 길을 가겠는가?”
“예에!!!”
“가겠는가?”
“예에!!!!”
“소장주! 명심하기 바라오. 내일 아침까지요.”
이 말을 남기고 방주는 제자이자 소방주인 소개의 손을 잡고 사라진다. 태양장의 소장주와 제갈홍, 그리고 제갈령은 멍하니 그들이 사라지는 것만 바라볼 뿐이다.
“정말 무섭네. 이래서 개방, 개방 하는구나.”
상황을 지켜본 일초가 고개를 끄덕인다.
“저렇게 모든 문도들이 하나가 되어 덤비면 태양장이 아니라 백만 황군이라 해도 이기긴 힘들 거예요.”
호란도 개방의 단결력에 놀란 모양이다. 사실 무림의 수많은 문파들 중에 개방보다 무공이 뛰어난 문파는 많다. 하지만 개방을 이길 수 있는 문파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제자 한 명 한 명의 실력은 다른 문파보다 나은 건 없지만, 뭉치면 그 어떤 문파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그걸 오늘 여실히 보여줬다.
“대형께선 일부러 우릴 여기에 데려 오신 건가요?”
“그래. 맞다. 난 너희들에게 형제들의 하나 된 힘이 얼마나 대단한 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무진은 태민의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사소한 차이에 연연하지 말고 형제로서 서로 보듬고 이해하며 하나가 된다면, 그 어떤 세력도 우릴 넘보진 못할 것이다.”
“반드시 그리 될 것입니다.”
“쯧쯧쯧, 걱정도 팔자요. 세상에 우리 형제만큼 강한 우의와 결속력을 가진 자들이 어딨다고 걱정이슈?”
“네 놈 때문이다. 네 놈! 입만 열면 형을 헐뜯고, 창피주고, 시비 거는 놈의 입에서 형제의 결속력을 얘기하니 낯이 다 뜨겁다.”
“그거야 장거리 여행의 지루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잠깐씩 여흥을 즐기는 거지, 형님이 미워서 그렇겠소?”
“내가 너랑 얘기해서 뭐하겠냐? 갑시다.”
무진은 일초의 말을 무시하고 호란의 손을 잡고 지붕에서 뛰어내린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계획대로 한다.”
“알겠습니다.”
“민아, 계획이라니 그런 게 있었냐?”
“그럼요. 형님은 모르셨어요?”
“누가 말해줘야 알지.”
“쯧쯧, 다 같이 있을 때 한 얘기를 혼자만 모르니.... 저런 걸 형이라고 따르는 니들이 불쌍하다.”
“어라! 이거 좀 이상한데? 운아! 말해봐라. 정말 같이 있을 때 말한 거냐?”
“그럼요. 생각 안 나세요? 다음엔 물 구경 할 수 있겠다며 형님이 좋아하셨잖아요?”
“으잉? 물 구경이란 말은 생각이 나는데.... 팔룡한테 가는 거냐?”
“예.”
“호호호! 오라버닌 큰일이에요. 그러다가 나중엔 애인도 생각이 안 나면 어떡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설마 형이 그것까지 말했소?”
호란의 말에 일초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거라니요? 그게 뭐예요?”
호란이 되묻는다.
“.... 말 안 했소?”
“쯧쯧쯧, 내가 네놈처럼 아무에게나 고자질하는 사람인줄 아니?”
“그..그게 아니라... 정말 안 했소?”
“몰라! 이 문제는 니가 저질렀으니까 스스로 해결해라. 난 모른다.”
“그런 게 어딨소? 지금까지 모든 문제를 같이 해결해 놓고 지금 와서 혼자 빠지면 어떡하오?”
“같이 해결 해? 뭘 같이 해결했는데? 다 네 놈이 저지르고 내가 해결했지.”
“뭐, 좀 그런 면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갑자기 나 몰라라 하면 난 어떡해?”
“그런 놈이 형을 맨날 갈구냐?”
“무슨 말이요? 내가 언제 형님을 갈궜다고 그러시오? 운아! 니가 말해봐라. 내가 평소에 형님을 갈구냐?”
“많이 갈구죠. 그것도 아주 많이.”
“아이구, 안 되겠다. 우린 사이가 너무 안 좋아서 당분간은 좀 떨어져 있어야겠다.”
일초는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피한다. 근데 몇 걸음 옮기지도 않고 걸음을 멈춘다.
“자..잠깐! 이젠 그런 꼼수 안 통합니다. 지금 나 다른 곳에 보내려고 애들이랑 입 맞춘 거죠? 아가씨! 말씀 좀 해 봐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넌 중원수로맹에 먼저 가서 사전 조사 좀 해 놔라. 난 애들이랑 여기서 좀 더 놀다가 갈란다.”
“안 돼! 난 그렇게 못해. 지난번에 내가 분명히 말했지. 난 절대로 형이랑 안 떨어진다고.”
“이 자식아, 니가 나이가 몇 갠데 떼를 쓰냐?”
“안 되는 건 안 됩니다.”
“알았다. 그럼 나도 할 수 없다. 애들아, 니 형이 말이다. 아까 말한 거 있지?”
“애인 얘기 말입니까?”
“아..알았소. 가면 될 거 아니오? 내 더러워서라도 간다. 가!”
일초는 애인이란 말에 끽소리도 못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곤이도 따라가거라. 좋은 경험 될 거다.”
“예, 대형!”
지금껏 말없이 따라다니기만 하던 곤일이 힘차게 인사하고는 일초를 따라 나선다.
“가더라도 제발 사고 좀 치지 마라. 일이 잘 챙기고.”
“흥! 가는 곳마다 흙탕물을 만들어버릴 거야.”
그렇게 말하곤 일초는 횅하니 사라져버린다.
“대형! 대체 일초 형님 애인 얘기는 무슨 말입니까? 우리랑 같이 지내는 동안 여자라곤 단 한 명도 만나는 걸 못 봤습니다. 근데 어떻게 여자를 사귑니까?”
“여자를 안 만나고도 연애하는 방법이 있나요?”
일초의 모습이 사라지자 태민 사형제가 질문을 한다.
“하하하! 그런 게 있다. 이제 당분간은 저놈의 등살을 피할 수 있겠다.”
무진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멀리 걸어가는 동생을 걱정 어린 눈빛으로 쳐다본다.
다음 날 아침.
개방의 제일장로를 비롯한 네 장로의 시신이 개방의 본부 앞에 버려지고, 태양장은 장주의 이름으로 소방주가 요구한 사항을 공표한다.
무림에 고한다!
태양장은 최근 개방에서 벌어진 반역 사건과 관련해서 책임을 느끼며, 향후 개방의 일에 일절 개입하지 않을 것을 선언한다.
태양장주 유진
이 선언문 때문에 한 동안 무림은 술렁거렸다. 지난 150여 년 동안 무림에서 절대권력으로 군림하던 태양장이 최초로 체면을 구긴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개방에 의해서.
며칠 후.
개방의 본부에 일단의 사람들이 방문한다.
“어디서 오셨소?”
개방 본부 주위에는 거지들이 우글거린다. 생각만큼 크게 더럽진 않지만 손님들은 입구를 들어서기도 전에 인상을 찌푸린다. 그들은 전신을 비단으로 감싸고, 금과 보석으로 치장했다.
특히 가운데 책임자로 보이는 자는 덩치도 큰데다 온갖 보석을 휘감고 있어서 걷기도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우린 천하제일장에서 왔네.”
“천하제일장? 거기가 뭐하는 곳이오?”
“이름은 그럴싸한데 넌 아니?
“글쎄 천하란 말이 들어가는 걸로 봐선 상당한 세력가인 것 같은데... 상단인가?”
거지들은 정말 모르는 눈치다. 그러자 손님들의 인상이 더 일그러진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천하제일문파에 와서 인상을 찌푸리면 안 되지 않나요?”
“나 같으면 인상을 찌푸리면서까지 이런 냄새나는 곳엔 안 오겠다.”
그랬다. 거지들은 천하제일장에서 온 자들이 인상을 찌푸리자 화가 나서 놀린 것이다.
“근데 무슨 일로 오셨소?”
제일 먼저 나섰던 중년의 거지가 다시 나선다. 그의 허리에는 끈이 세 개 달려 있다. 삼 결 제자인 것이다. 개방에는 끈이 없는 무 결에서부터 십 결인 태상방주까지 모두 11개의 등급이 있다. 그 중에서 삼 결은 분타주급이며 본부에선 입구를 지키는 책임자이다. 다른 문파로 치면 경비대장인 셈이다. 삼결 제자 역시 목소리가 곱진 못하다.
“우린 방주를 만나러 왔소.”
“방주를 요? 아실지 모르지만 개방의 방주는 아무나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외다. 혹시 약속을 하셨소?”
“이것 보시오. 이 분은 천하제일장의 장주님이시오.”
“그게 어쨌단 말이오? 설마 개방에 와서 돈 자랑이라도 하겠단 거요?”
경비대장은 불쾌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천하제일장의 사람들도 만만찮다.
“총관.”
“예, 장주님.”
“그만하게. 대신 정식으로 방문첩을 보내게.”
“알겠습니다.”
총관이란 자는 품속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분타주에게 건넨다.
“천하제일장의 장주께서 개방 방주님의 면담을 신청하는 방문첩이오. 정중하게 전달해주시오.”
“그럽시다. 조금만 기다리시오.”
잠시 후, 다시 경비대장이 나와서 일행을 안으로 안내한다.
천하제일장.
황금상단, 대원장과 더불어 중원에서 가장 돈이 많은 곳이다. 다만 황금상단은 모든 것을 다 거래하는 상단인 반면 천하제일장은 단 두 가지만 거래한다. 하나는 병기이고, 다른 하나는 소금이다. 황금상단 또한 두 가지를 다 거래하지만 황실과의 거래는 천하제일장이 독점하고 있다.
그렇다고 천하제일장의 역사가 긴 것은 아니다. 불과 백여 년 전에 세워져서 황실의 도움을 받아서 지금까지 번창하고 있다. 그 때문에 장주가 황실의 후예라는 말도 있다.
“어서 오시오. 장주께서 누추한 곳엔 어쩐 일이시오?”
개방 방주 마영생이 집무실에서 장주를 맞이한다.
“목마른 사람이 먼저 우물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천하제일장이 거지소굴에서 찾을 게 있다니 궁금하군요. 자, 이럴 게 아니라 앉아서 얘기합시다. 참, 이 아인 내 제자입니다.”
“소개라고 합니다.”
“천하제일장의 주황일세. 그리고 여긴 총관 나진이고.”
“나진이라고 합니다.”
서로 인사가 끝나자 자리에 앉아서 본격적인 신경전이 벌어진다.
“요즘 천하제일장이 날로 번창한다더니 정말인가 봅니다.”
“병기 장사는 신통찮았는데, 소금 장사가 꽤 괜찮았습니다.”
“이러다가 황금상단이 천하제일장에 밀리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우리야 좋죠. 근데 황금상단의 단주가 워낙 고단수라 쉽지가 않구려.”
“천하제일장과 관련해서도 좋은 소문만 있는 건 아닙니다.”
“저희도 여러 가질 듣고 있습니다만 신경 쓰진 않습니다.”
“천하제일장이 태양장의 돈주머니라는 소문은 들어보셨습니까?”
“뭐..뭐요?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한단 말이오?”
방주의 한 마디에 장주가 발끈한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지요. 근데 어려운 발걸음을 한 이유가 뭡니까? 보아하니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얘기의 주도권은 처음부터 방주가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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