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 90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 90
“다른 게 아니라 소문에 따르면 개방이 태양장을 협박했다고 하던데 사실이오?”
“개방이 태양장을 협박했다? 하하하! 장주께서 우리 개방을 너무 높게 평가하시는군요. 감사한 말씀이나 우린 태양장에 찍히고 싶진 않소. 근데 그런 은밀한 내용은 어디서 듣는 거요? 우리 개방도 알지 못하는 걸 천하제일장이 안다니 재밌구려.”
“그래서 개방이 태양장의 약점을 쥐고 있단 말이 나오고 있소.”
“그거 참 흥미진진한 얘깁니다. 사실 우리야 정보로 먹고 사는 곳이라 이러 저러한 얘기들은 많이 알고 있지요. 그래서 천하제일장도 약점이 잡힐까봐 이렇게 찾아온 거요?”
“그렇소. 난 천하제일장의 장주로서 공식적으로 개방에 요구하는 바이오. 지난 백 년간 우리 천하제일장과 관련된 정보를 내놓으시오.”
“대단하군요. 대단해. 그러니까 장주께선 개방이 태양장의 약점을 잡고 협박했단 소릴 듣고, 천하제일장과 관련된 자료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는 거군요.”
“부정하진 않겠소.”
“그 말씀은 천하제일장과 태양장의 관계를 인정한다는 뜻이군요. 달리 말하면 태양장의 위세를 믿고 우리를 협박하러 온 거고.”
“정확하게 보셨소.”
장주는 대놓고 협박을 한다.
“후후후, 역시 장사꾼이라 대담하시구려. 근데 우리가 당신들의 약점을 잡고 협박을 하면 어쩌려고 이러는 거요? 예를 들면 올해 실적이 좋은 게 단순히 소금장사가 잘 돼서라기보다 황실 몰래 소금을 빼돌려 세외에 팔았고, 그 과정에서 이문을 많이 남겼기 때문이라면? 또한 황실에 납품하는 병기들 중 반 이상이 세외에서 몰래 들여와 살짝 가공한 거라면?”
“뭐..뭐라고? 그..그걸 어떻게?”
장주는 화들짝 놀란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반역죄로 몰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주는 금방 감정을 다스리곤 여유를 부린다.
“후후후, 그러니까 개방이 그 동안 천하제일장을 감시해왔다는 걸 인정하는 거군.”
“그럼 천하제일장은 사업을 위해 황실이나 세외의 정보를 수집하지 않소?”
“그거야.. 그렇지만..”
“천하제일장은 평소 수집한 자료를 관련 조직에 제공하는 모양이죠?”
“으음!”
방주의 몇 마디에 상황은 다시 역전된다.
“백보 양보해서 만약 개방이 천하제일장에 그 정보를 준다고 칩시다. 그럼 그 내용까지 없어지는 거요? 설사 원본까지 파기한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요. 나를 비롯해서 개방에서 정보를 담당하는 제자들은 대부분 알고 있어서 그걸 이용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소. 근데 그걸 천하제일장이 모른단 말이오?”
“으음!”
장주와 총관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진다.
“그 참, 정말 모르나?”
“사부! 얘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습니다.”
“내 얘기가 잘못됐다고?”
“그게 아니라 천하제일장은 자신들과 태양장의 관계가 밝혀지면 입지가 강화될 거라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여부를 떠나 자신들의 위상을 과시하러 왔다. 그 말이냐?”
“그것 말고 뭐가 있겠습니까?”
“그게 사실이오?”
“.....”
장주는 물론이고, 총관도 아무 말을 못 한다. 그들의 의도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후후후, 제자야.”
“예, 사부!”
“사람은 말이다. 가끔 잘난 체를 하느라고 자신의 주제를 너무 과대평가하기도 하고, 때론 과소평가하기도 한단다. 이런 경우는 어느 쪽일까?”
“당연히 과대평가한 거겠죠.”
“땡이다 이놈아!”
“왜요?”
“물론 과대평가했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 천하제일장이 아무리 중원제일을 다투는 부자래도 백 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상단이다. 그런데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개방을 상대하기 위해서 나섰으니 건방지다고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자신을 과대평가했다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하지만?”
“만약 이번 사건으로 인해서 중원 상권이 천하제일장으로 기울게 되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경쟁관계에 있는 상단들이 물어뜯겠죠. 뿐입니까? 황실과 권문세가로부터 견제도 받을 테고. 그런데 말입니다.”
“왜? 제자야.”
“궁금한 게 있어서 그래요.”
“나한테?”
“아뇨. 저기 황금으로 온몸을 휘두르고, 얼굴에 개기름이 좌르르 흐르는 인간한테요.”
“그럼 직접 물어봐라.”
“그래야겠죠? 이것 보시오. 개기름 양반.”
장주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 대신 분노의 눈빛을 보낸다.
“아이고, 저런 눈빛에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당했을까? 오금이 다 저리네. 그건 그렇고.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말이오.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상단이 있었지만, 그들 중 백 년 이상 유지한 곳이 몇이나 되는지 아시오?”
“.....?”
“당연히 모르겠지. 그걸 안다면 이런 행동은 하지 않았을 테니. 내가 아는 한 다섯에 불과하오. 그 중 제일 오래 버틴 상단이 바로 황금상단이오. 이유가 뭘까?”
“.....”
“쯧쯧쯧, 그런 것도 모르면서 대장 노릇을 하니 천하제일장도 오래가긴 글렀군.”
“뭐..뭐라고?”
“왜, 욕하니까 듣긴 싫어? 그럼 당신 욕심 때문에 천하제일장이 무너지면서 길거리로 나앉을 수천, 수만 식솔들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생각해봤어? 멍청한 인간. 아직도 내 말을 못 알아들었나?”
“이 새끼가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죽고 싶어?”
“후후후, 큰 소리 치는 걸 보니 졸개들을 제법 많이 데리고 온 모양이네.”
“흐흐흐, 개방 따위는 한 시진 안에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을 거야.”
총관이 음흉하게 웃으며 자신감을 드러낸다.
“그래? 누가 죽을 지는 지켜보면 알겠지. 근데 그거 알아?”
“뭘?”
“니들이 이곳에 나타나는 순간 천하제일장은 수많은 보이지 않는 적에 포위됐어.”
“후후, 그런 것들은 조금만 눌러주면 금방 사라지지.”
“근데 어쩌니? 과거 사라진 수많은 천하제일의 상단들도 니들처럼 행동했거든. 지가 제일인 줄 알고, 다른 문파는 장기판의 졸로 생각하다가 정작 지들이 졸이 됐지. 사부도 이 얘길 하려는 거죠?”
“후후, 우리 제자 이제 다 컸네. 바로 그거다. 사람은 자신의 그릇 크기를 알아야 한다. 천하제일장처럼 천하제일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면 그에 걸맞은 행동도 해야지. 시정잡배들이나 하는 짓거리를 하면서 천하제일이란 이름을 사용하면 안 되지.”
“그래서 자신을 과소평가한다는 거군요. 그런데 여전히 못 알아듣는 것 같은 데요?”
“원래 돈으로 세상을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종자들은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법이란다. 봐라.”
방주가 벽의 모서리를 만지자 벽면 전체가 열리며 유리 거울을 통해 바깥의 상황이 보인다. 수백 명의 무사들이 무장한 채 개방 본부 주위에 숨어 있다. 순간 천하제일장의 장주와 총관의 표정이 엇갈린다. 장주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반면, 총관은 자신감에 넘친다.
“오해하지 마시오. 저들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왔을 뿐이니까. 그럼 우린 돌아가리다. 생각이 바뀌면 연락을 주시오.”
두 사람은 황급히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뜬다.
“단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모조리 치워!”
개방의 입구를 나서자 장주는 얼굴을 붉히며 소리친다. 자신이 방주와 소방주에게 모욕당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예!”
총관은 손을 들어 숲속에 숨어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그 사이 개방 제자들이 모두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그걸 방안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미친놈, 우리가 있어서 지들이 빛나는 줄도 모르고. 그래. 한 번 해보자. 꽃과 잡초 중에서 누가 더 오래 사는지를 보여주마.”
“계획대로 할까요?”
“그래. 개방의 힘을 보여줘라.”
“예, 방주!”
방주의 한 마디에 소방주가 뒤쪽 벽면을 누른다. 그러자 건물 전체가 울릴 정도의 우렁찬 종소리가 들려온다.
땅! 땅! 땅! 땅! ......
순식간에 건물의 모든 통로는 차단된다. 개방 본단의 시설은 대부분 지하와 절벽에 동굴 형태로 있어서 스스로 폐쇄하면 공격할 곳이 없다.
“장주님!”
거의 한 시진 가까이 공격을 주관하던 총관이 달려온다.
“어찌 됐느냐?”
“화공 위주의 공격을 했습니다.”
“그런데?”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건물 전체가 흙과 돌로 돼 있어서 화공이 먹히지 않습니다. 들어갈 수도 없고요.”
“그럼 한 시진이나 공격하고도 단 한 놈도 해치우지 못했단 말이냐?”
“죄송합니다. 놈들을 너무 쉽게 본 것 같습니다.”
“후후후, 명색이 개방인데 너무 쉬워도 문제지. 천천히 숨통을 조여주마. 돌아간다!”
장주는 화를 누르고 몸을 돌린다.
“예.”
잠시 후, 네 마리의 백마가 끄는 화려한 마차가 개봉 본부를 떠난다. 아무런 성과도 없이.
“대형! 저걸 어떻게 봐야 하는 겁니까?”
멀리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태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전 이해가 안 되네요. 천하제일장은 황금상단, 대양상단과 함께 중원제일의 상단입니다. 근데 너무도 어이없는 일을 벌였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두 가지만 댄다면 이렇습니다. 우선 천하제일장의 장주와 총관이란 인물이 개방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는 겁니다. 지금은 많이 쇄락했지만 태양장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개방은 중원제일의 문파였습니다. 개개인의 무공실력은 중하위권에 속하지만 그들의 결속력에서 나오는 하나 된 힘은 소림조차도 한 수 양보할 정도였습니다. 두 사람이 그걸 모른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좋아. 다른 하나는?”
“저들은 개방을 무너뜨릴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오백 명이 넘는 자들이 화공(火攻)까지 펼치면서 공격을 했는데?”
“그건 형식적이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입니다. 무림인 치고 고작 오백 명으로 개방을 무너뜨리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들은 모두 삼류에 불과했습니다. 오히려 목숨을 부지한 것만 해도 다행일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천하제일장이 어떤 의도가 있단 말이냐?”
“그건 대형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호오! 민이의 안목이 꽤 높아졌구나. 잘 봤다. 네가 방금 말했듯이 이건 일종의 머리싸움이다. 저길 봐라.”
무진이 개방 본부의 뒤쪽 산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나무들이 빽빽해서 안쪽이 잘 보이지도 않는다.
“저게 모두 천하제일장의 무사들일까요?”
“당연히 아니겠지?”
“그럼 태양장?”
“모두 그들이 꾸민 일이라고 봐야겠지.”
“개방의 고수들은 아까 다 빠지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냥 둬도 될까요?”
“아까도 말했지만 개방은 호락호락한 문파가 아니란다.”
“.....?”
태민 사형제는 무진의 말을 이해를 못했는지 멀뚱거리며 쳐다보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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