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 58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 58
왕명은 처음부터 심리전을 펼친다. 이 정도가 되면 상대는 걸려들 수밖에 없다. 특히 우호법처럼 성질이 급한 자는 단번에 미끼를 물기 마련이다. 근데 오늘은 그 날이 아닌가 보다.
“미안하지만 내가 요즘 좀 바쁘거든. 그래서 먼저 가봐야겠다. 그렇다고 그냥 가면 니들이 섭섭하게 생각하겠지? 그래서 한 가지 선물을 주고 갈 생각이다.”
우호법은 말을 하면서 품속에서 한 뼘 정도 되는 막대기들을 여러 개 꺼낸다. 순간 왕명이 웃는다.
“후후후, 역시 당신은 내 예상을 벗어나지 못하는군.”
“그럼 내가 화탄을 터뜨릴 걸 예상했단 말이냐?”
우호법이 품속에서 꺼낸 것은 바로 화탄이다.
“예상만 했겠소? 그에 대비해서 손님까지 모셨는데. 어서 오시오. 즙포사신 어른!”
왕명이 소개하자 주루 밖에서 관복을 입은 중년인이 한 명 들어온다. 즙포사신은 개봉의 형사 사건 수사를 총 책임지고 있는 자라 무림인들도 막지 못한 모양이다.
“즙포사신?”
“그렇소. 우호법도 잘 알거요. 제 아무리 태양장이라도 해도 화탄을 함부로 사용하다간 중형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뭐..뭐라고? 네놈이 감히 태양장을 능멸해?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할 만 하면 해야지. 잔말 말고 손에 든 것을 터뜨려 보시오. 무림제일세가라는 태양장의 호법께서 자신이 한 말은 책임져야지. 안 그렇소?”
왕명은 즙포사신에게 화살을 돌린다.
“청운장주님의 말씀대로 전 개봉성의 즙포사신입니다. 무림인들이라면 잘 아시겠지만 태양장은 화약을 만드는 건 황명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물론 목적만 합당하다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목적입니다. 황명에 따르면 외세가 침입했을 때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근데 지금은 그런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해서 만약 노야께서 화탄을 터뜨리면 전 폐하께 보고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점 명심해 주시오.”
“씨발! 좋다. 우린 여길 떠난다. 그렇다고 네놈들의 목은 결코 오래 붙어 있진 못할 거다.”
“우호법, 내 말도 명심하시오. 만약 여기에 또 독을 뿌리면 당신과 부하들은 몇 십 배 더 당하게 될 거란 걸.”
“고작 한 번 승기를 잡았다고 건방떨지 마라.”
“후후후, 이건 당신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이백 년이 넘도록 무림을 평온하게 유지해온 태양장에 대한 예의 표시요. 결정은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당신이 조용하게 물러나면 우리도 더 이상 문제 삼진 않겠소. 하지만 주제 파악을 못하고 함부로 날뛰면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르게 될 거요.”
왕명은 거의 협밖에 가까운 말을 한다.
“흥!”
우호법은 반박도 못하고 그냥 나가버린다.
“그리고 거기 두 분!”
왕명은 갑자기 적마교의 총사 운고와 사천당가의 가주 당청을 불러 세운다.
“말씀하시오.”
“말해라.”
“후후후! 앞으로 신중하게 행동하시오. 특히 가주! 만약 구파일방이 사파와 손을 잡았다는 소문이 나면 그땐 우리의 집중 공격을 받게 될 거요. 단순한 협박이라고 생각한다면 마음대로 행동하시오.”
“으음!”
운고와 당청은 대답 대신 인상을 찌푸리며 발걸음을 옮긴다.
“자, 자! 이제 편안하게 앉아서 제대로 차 맛을 음미해봅시다.”
태양장을 비롯한 세 세력이 완전히 물러가자 양문이 나선다. 구석에 있던 일반 손님들은 그와 황성의 도움으로 해독되자 하나 둘 씩 사라져 찻집이 조용해졌다.
“거기 계신 분들도 합석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양문이 구석에 앉아 있던 중년 남녀와 젊은 사내에게 합석을 권한다. 그들은 흔쾌히 초대에 응한다.
“감사합니다. 장주님이 아니었다면 곤욕을 치를 뻔 했습니다.”
자리로 온 세 사람은 먼저 중년인이 대표로 감사의 인사를 한다.
“하하하! 지금 생각하니 제가 괜히 나섰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주, 그게 무슨 말씀이오?”
황성이 중간에 끼어든다. 그가 보기엔 세 사람은 왕명이 아니었으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절 시험하신 겁니까?”
왕명은 대답 대신 질문을 한다.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됐습니다.”
‘에잉? 그렇다면 이들도 왕명에 못지않은 고수들이란 말인가?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황성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닙니다. 그게 여러분의 역할과 책임이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정확하게 하는 의미에서 몇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근데....”
중년인은 말을 하다가 황성을 쳐다본다. 객이 있는 곳에서 말하기가 곤란하다는 뜻이다. 황성도 그걸 눈치 채곤 자리에서 일어선다.
“미안 하외다. 늙은이가 눈치도 없이....”
하지만 그의 말은 왕명에 의해서 중간에서 잘린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이 분은 제가 평소 존경해오던 선배님이십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현 무림의 십대고수 중 수좌 역할을 해 오신 분입니다. 같이 자리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순간 침묵이 흐른다. 황성뿐만 아니라 모두가 놀랐기 때문이다.
‘형님의 인품을 알곤 있었지만, 이렇게 대범한 분일 줄은 몰랐다. 이것 하나만으로 황성 형님은 우리 사람이 되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대인의 풍모를 지닌 자이다. 이런 자는 한 번 의를 맺으면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내가 말년에 큰 행운과 복을 얻었구나.’
‘보통 소문은 고평가 되기 마련인데, 이 사람은 너무 저평가 돼 있다. 아까 펼친 무공도 결코 최선을 다한 게 아니었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인품은 훨씬 더 뛰어난 인물이다. 이런 사람이 우리 ‘중원의 빛’의 영반이 된다면 모든 조직원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것이다.’
“장주, 먼저 모처럼 날 인정해주는 사람을 만나니 기쁘기 한량이 없소. 하지만 장주의 말씀처럼 내가 이 자리에 있어야 할지에 대해선 잘 모르겠소. 사실 난 이 자리의 의미에 대해서 전혀 모르오. 다만 중원 무림의 패자(霸者)인 태양장과 사파의 중심세력인 적마교의 핵심 인물들과 대적할 수 있는 세력의 모임인 것 같소. 그에 비해 난 허울뿐인 무림십대고수에 불가하오. 이 나이가 되도록 단 한 번도 나를 제외한 타인을 위해 살아보질 못했소. 한 마디로 황성이란 인간은 철저한 이기주의자였소. 그런데도 친구로서 받아주시겠소?”
“물론입니다. 전 이미 선배를 한 형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록 대형과 형제들의 동의를 받아야겠지만, 반대할 사람은 없을 거라 믿습니다.”
“고맙소. 고마워.”
“하하하! 세 분이 형제가 됐으니 우리의 대화에 참여할 자격이 생겼습니다.”
중년인도 흔쾌히 받아들인다.
“자, 그럼 얘기를 시작해볼까요? 그쪽에서 먼저 확인할 게 있을 것 같은데.”
다시 양문이 나선다
“ 그렇습니다. 저기 성루에 ‘천(天)’이라고 적힌 깃발을 꽂은 게 여러분들이 맞습니까?”
“그렇소.”
“좋습니다. 예상을 하셨겠지만, 저희는 ‘중원의 빛’을 대표해서 나왔습니다. 저는 부영반을 맡고 있는 천중문이라 하고, 여긴 제 아내이자 같은 부영반인 화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제 조카이자 정보조직을 총괄하고 있는 천영라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중원제일의 정보조직인 광명(光明)의 수좌라니 대단하구려.”
“광명에 대해서도 알고 계셨습니까?”
“저도 최근에야 알게 됐습니다. 참, 저와 제 동생들을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전 아시는 바와 같이 청운장의 왕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친구들은 제 동생인 양문과 추개라고 합니다.”
“양문이 여러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추개라고 합니다.”
“영광이라뇨? 과분하신 말씀입니다.”
양문과 추개가 정중하게 인사하자 청중문도 일어서서 답례를 한다. 그걸 지켜보는 왕명과 황성의 얼굴에 미소가 머문다.
“참, 절 여기로 보내신 분이 이걸 보여드리라고 하셨습니다만...”
왕명은 품속에서 자그마한 주머니를 꺼내더니 그걸 천중문에게 건넨다.
“이게 뭡니까?”
“설명을 듣지 못해서 저도 모릅니다.”
“옥반진데....”
천중문은 반지를 보고도 모르는 눈치다. 하지만 화수는 반지를 보는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이걸 주신 분은 어디에 계신가요?”
“왜 그러십니까?”
“영반께선 그 분이 누군지 아십니까?”
“그야 당연하지요. 제 대형이신데... 하하하! 그게 대형의 신표인 모양이군요. 아마 부영반께서 생각하는 게 맞을 겁니다.”
“저..정녕 그분이 살아계신단 말씀입니까?”
“사실 같은 형제인 우리도 쉽게 믿기 힘든 일입니다만, 여러 가지 면에서 그분이 아니면 안 될 이유가 있습니다.”
“부영반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렇소. 부인, 자세히 설명을 해보시오.”
천영과 천중문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한다.
“여보, 먼저 옥반지에 새겨진 걸 보세요.”
“난 예술에는 문외한이어서... 어엇! 이건 용인데? 용은 천주의 상징이 아니오?”
화수의 말대로 옥반지는 전체가 한 마리의 용으로 만들어져 있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서..설마 천주가 살아 계신단 말이오? 장주! 말씀해 보시오.”
“이 반지를 가지고 계신 분이 천주라면 분명히 살아계시오.”
“우연히 그분의 유품을 전해 받았을 수도 있잖습니까?”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한 가지만은 본인을 제외하곤 알 수가 없어요.”
화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게 뭐요?”
“영아, 니가 설명해라.”
“예, 부영반님.”
천영은 숙부 부부를 꼬박꼬박 부영반이라고 부른다.
“‘중원의 빛’에는 천주와 관련해서 한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그런 게 있었어? 왜 난 몰랐지?”
천중문도 처음 듣는 모양이다.
“그건 부영반님의 업무와 관련이 있습니다.”
“내가 대외업무를 맡기 때문에 보안을 위해서 알리지 않았구나.”
“그렇습니다.”
아마 천중문이 사고로 보안 사항을 유출할 것에 대비해서 알리지 않은 모양이다.
“근데 규칙이란 게 뭐냐?”
“천주는 후대에 암호만 남겼을 뿐, 반지는 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건 천주의 자리는 오직 한 사람에게만 허용하겠다는 장로들의 의지입니다.”
이 말은 만약 왕명이 반지와 암호 중 하나만 알고 있다면 천하제일인 본인이 아니라 후인이라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반지와 암호를 동시에 알고 있는 사람은 무진이 유일하며, 그래서 무진이 ‘중원의 빛’의 천주이자 고금제일인이라는 말이다. 암호는 성벽에 깃발을 꽂는 걸 말한다.
“천주의 뜻이 아니었단 거냐?”
“그렇습니다. 장로들이 유일하게 천주께 요구한 것입니다.”
“하긴 천주께선 무엇이든 강요할 분이 아니시지. 으음! 결론적으로 천주께서 살아 계시다는 말이군.”
“그래요. 어서 장로들께 말씀드려야겠어요. 영아, 당장 전서구를 날려라.”
“예, 부영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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