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난 창어
섬을 에돌아간 배들은 사슬과 밧줄을 풀었다. 해적과 율족의 배는 임시로 지은 항구에 쌀을 내렸다. 내린 쌀은 힘센 병사들이 들고 가까운 다른 항구로 가서 아틀란티스의 운송선에 실었다.
쌀을 부린 배들은 전투 준비로 바쁘고 쌀을 실은 아틀란티스의 배는 급히 섬을 떠났다.
"멍청이들아. 저기 파란 깃발을 단 배들이 보이지?"
"알아. 저거 구호선이잖아. 바다에 빠지면 구호선 쪽으로 헤엄치라는 말이잖아. 몇 번 할 작정이야."
"우린 타격대에 들지 못했지만, 여기서 배를 받아 가면 비크라에서도 배부르게 잘살 수 있어. 그러니까 알지?"
무리의 리더는 차마 배를 부수자는 말을 직접 하지 못했다. 드레이크가 배가 부서지면 새것으로 준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일부러 배를 부수는 게 비겁한 일이 아닌지 고민되어 구호선을 계속 언급하기만 했다.
"뭘 고민해. 전투 시작하자마자 돌진해서 부딪치면 돼. 부서질 때까지 우리는 닥치고 돌격이다."
그러나 정작 천 척이 넘은 적함을 향해 돌진하려니 심장이 떨렸다.
뿌, 뿌뿌.
갑자기 쇳덩이로 만든 배가 창어 울음소리를 내며 앞으로 돌진했다. 크기는 나무로 만든 2천톤급 배보다 조금 작았다. 그러나 나무배와는 다른 묵직함으로 움직이는 강철 군함의 위용은 만톤급보다 못지않았다.
"창어가 돌진했다. 우리도 가자."
그러나 너울이 심해 생각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사실 노 젓는 배로는 꽤 준수한 속도지만, 아틀란티스 배에 끌려서 빠르게 달렸던 경험을 방금 한 덕분에 성에 차지 않았다.
아틀란티스 최초이자 유일한 강철 군함에는 드레이크가 직접 키를 잡았다.
"아직도 지휘관이 탄 배를 찾아내지 못했어?"
"지휘선으로 의심되는 배가 여럿이다."
여러 지역의 배를 끌어온 탓에 치장이 화려한 배가 한둘이 아니었다.
"가장 가까운 놈부터."
"전방 기준 오른쪽으로 35도, 거리 30보트."
1보트는 4미터에서 5미터 사이다. 드레이크는 키를 돌려 2천톤급 정도로 보이는 전함을 습격했다.
돌진을 알아챈 배가 급히 방향을 전환하려 했지만, 10년 이상 노를 저은 뱃놈들도 어려워하는 게 급전환이다.
드레이크는 키 두 개를 몇 바퀴 돌리는 거로 간단히 방향을 수정했다.
빠직 소리와 함께 걸리적거리던 2백톤급 정도로 보이는 작은 배가 동강 났다. 군함 머리에 단 세 개의 뿔 중 가장 굵고 짧은 뿔에 찔려 배가 그대로 둘로 쪼개진 것이다.
배 한 척 부수고도 전혀 속도가 줄지 않은 창어호는 목표 선박을 정확히 적중했다.
가장 위에 난 긴 뿔이 뱃전에 구멍을 냈다. 두 번째 뿔은 조금 짧지만 날카로움은 긴 뿔 못지 않았다.
두 뿔이 구멍을 냈다면 세 번째 뿔은 부수는 역할이었다. 뭉툭한 세 번째 뿔은 나무판을 부숴버렸다.
"공격."
드레이크의 명령에 부선장이 키를 열심히 돌렸다. 위의 굴뚝으로 조금씩 배출되던 증기가 두 번째 뿔을 통해 분출되었다. 구멍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애쓰던 선원들이 증기에 데어 바닥을 뒹굴었다.
구멍으로 흘러 들어간 바닷물이 화상을 입은 살에 닿자 배가 찢어지는 게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비명을 질러댔다.
드레이크는 키를 돌려 후진했다.
쿵 소리와 함께 배 한 척이 부딪쳐왔다.
"피해 상황."
"깜짝 놀랐다."
항해사의 농담에 선원들이 크게 웃었다. 창어호 옆구리를 공격한 배는 선수가 부서진 채 뒤로 떠밀렸다. 무게가 수십 배 차이 나기에 돌진한 배가 오히려 튕긴 것이다.
"다음 목표."
"전방 기준 왼쪽 20도. 거리는 10보트. 중간에 장애물 세 개."
"가속 기관 가동한다. 부선장."
창어호는 제자리에서 방향을 튼 다음 가속 기관을 가동했다. 걷어찬 축구공처럼 창어호가 불쑥 튀어 나갔다. 너울에 겨우 선체를 가누던 작은 배가 창어호와 부딪힌 후 뒤집혔다.
사람을 많이 실었는지 선체가 낮아 세 번째 뿔까지 피한 덕분에 배가 부서지진 않았다.
두 번째 장애물이 가까워지자 부선장이 가속 기관을 또 가동했다. 충돌을 대비하던 자들은 예상보다 빠른 흔들림에 몸을 가누지 못했다.
갑판에 있던 사람 중 절반 정도가 바다에 빠졌다.
"으악!"
창어호에 오르려고 접근하던 자들은 와륜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와륜이 돌아가면서 와류이 발생한 탓에 속절없이 끌려간 것이다.
"추진."
드레이크의 명령에 부선장이 예비 증기 기관을 가동했다. 예비 증기 기관까지 가동하자 창어호는 배 두 척을 밀고 목표 전함에 접근했다.
"가속. 중간에 낀 배가 부서질 때까지."
부선장은 가속 기관을 일정 간격으로 가동했다. 목표 전함과 창어호 사이에 낀 두 척의 배가 조금씩 찌그러들더니 동시에 조각났다.
부선장은 가속 버튼을 한 번 더 눌렀다. 창어호의 세 뿔이 목표 전함의 뱃전을 타격했다. 그러나 멈추다시피 한 상황에서 뿔을 깊숙이 박아넣을 순 없었다.
"몸치기 한다. 왼쪽으로 돌아."
드레이크와 부선장이 키를 열심히 돌렸다. 창어호가 빠르게 회전하더니 목표 전함에 가로로 부딪혔다.
뿔에 찔려 난 작은 구멍을 시작으로 뱃전에 금이 갔다.
"다음 목표."
창어호가 지휘선으로 의심 가는 세 번째 배를 침몰시켰을 때 해적과 율족의 배가 전장에 합류했다. 물론, 율족의 배에 탄 것도 해적이었다. 율족은 힘도 세고 체력도 좋은데 싸움은 어지간히 못 하는 게 아니었다.
"저 미친 새끼들이 벌써."
율족의 배를 탄 해적들은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러나 자기 배를 몰고 온 해적들은 이판사판으로 충돌했다. 마치 배가 부서지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어차피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잖아. 우리 실력을 숨기는 용도로 데려온 거지."
아틀란티스의 배만 참전하면 손실이 0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펠릭이 아틀란티스를 경계하게 된다. 식량은 아니어도 철괴는 펠릭한테서 지원받아야 한다.
아군의 손실을 늘리기 위해 해적과 율족의 배를 최대한 끌어모았고 타격대에 뽑히지 못한 해적을 고용했다.
게다가 배 3백 척 가까이 부서지면 누구라도 아틀란티스의 해군이 끝장났다고 생각한다. 적이 바다를 통한 공격로를 염두에서 지우는 순간, 아틀란티스의 해군력은 커다란 변수가 된다.
상대 배를 부순 해적은 노를 저어 바깥으로 빠진 다음 추진력을 얻어 다시 충돌을 시도했다. 자기 배를 부순 놈들은 배가 가라앉기 전에 상대 배로 뛰어올랐다.
부르크 제국은 북방인들보다 골격이 작다. 게다가 부르크 제국이 차지한 남부는 북부보다도 작다.
해적섬 해적들은 바칸이 평범하게 보일 정도의 덩치를 자랑했다. 존처럼 큰 덩치가 드물긴 하지만, 바칸 정도 덩치는 흔했다.
체격과 근육량에서 오는 근력의 차이, 어려서부터 단련되어 군더더기 없이 목숨만 노리는 칼질과 두려움에 마구 휘두르는 자의 차이.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차이가 선상 싸움을 일방적으로 만들었다.
"제독. 뭔가 보여줘야 할 시기가 된 거 같은데."
키를 부선장에게 모두 맡긴 드레이크는 자신의 워해머를 들고 10미터 거리에 있는 배를 향해 뛰었다.
갑판에 있던 자들은 자기 배로 넘어오는 드레이크를 어어 거리며 바라보기만 했다.
육중하게 갑판에 착지한 드레이크는 워해머에 마나를 듬뿍 실었다. 존이 낭아봉으로 배를 부쉈다는 말을 들은 후부터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을 끝내 시도하게 되었다.
쿵 소리와 함께 갑판이 툭툭 터졌다. 바칸에게서 배운 브레이크 메탈의 기술을 응용한 덕분에 힘의 방향과 상관없이 넓은 면적의 갑판이 부서졌다.
"괴물이다."
몇몇 부르크의 광신도를 제외하고 모두 드레이크와 멀어지는 방향으로 도망쳤다.
'감 잡았다.'
뱃전에 올라선 드레이크는 워해머를 다시 내리쳤다. 제대로 된 마나의 운용이 어마어마한 결과를 냈다. 길이가 30미터 가까이 되는 배의 한쪽 뱃전이 통째로 부서졌다.
창어호에서 밧줄이 던져졌다. 드레이크는 밧줄을 허리에 동여맨 다음 창어호로 접근했다. 와륜이 돌아가면서 강하게 끌어당겼지만, 밧줄 덕분에 버텼다.
워해머를 등에 멘 드레이크는 자이르한테 3골드 주고 배운 마나 운용법으로 뱃전을 기어 올라갔다.
"제독. 마지막에 보기 흉했어."
"국왕이라면 공중제비를 돌아 배로 돌아왔을 거야."
부하들의 타박에도 드레이크는 싱글벙글 웃었다. 3단계임에도 2단계의 존에게 밀렸는데 훌륭한 기술을 터득한 덕분에 차이를 꽤 줄였다.
"야. 끝내자."
어느새 날아온 슴슴이가 말했다. 새 주둥이를 통해 엘리사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엘리자베스.'
드레이크는 엘리자베스를 잠깐 좋아했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심성이 어떤지 알고 나서는 좋아하는 마음이 식었다.
그래도 호감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아서 브릭섬을 엘리자베스한테 주고 자신은 떠날 생각을 했다.
충분한 재물이 모일 때까지 균형을 유지하느라 엘리자베스의 요구를 번번이 거절했다. 그러다 결국 힘을 합쳐 리차드를 공격했고, 그것이 기회가 되어 바칸을 알게 되었다.
"제독. 어서 명령을 내려."
"불화살을 쏜다."
서른 개 쇠뇌에 화살이 장전되었다. 특별한 약물로 처리한 기름 주머니에 불을 붙였다. 불이 제대로 타오른 걸 확인한 후 불화살을 날렸다.
뱃전에 박힌 화살이 꼬리를 부르르 떨었다. 기름 주머니가 톡 터지더니 불길이 확 퍼졌다. 세 개 정도의 기름 주머니는 안타깝게도 그냥 바다에 떨어졌지만, 남은 기름 주머니의 화력만으로도 충분했다.
뱃전이 타들어 가며 구멍이 생겼다.
"불 꺼줘. 빨리."
뱃전에 화살을 맞은 건 행운이었다. 갑판에 화실이 떨어진 경우, 불 끄려다가 오히려 옮겨붙은 자들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바다에서도 안 꺼지는 불 때문에 울면서 부르크에게 기도를 올렸다.
대부분은 기도할 정신도 없이 비명만 질렀다.
"큰 배는 대부분 해치운 거 같아."
불화살로 2백 척이 넘은 배를 해치웠다. 그리고 전투로 부순 배가 30척이 넘는다. 이 모든 게 반 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남은 건 제국에 맡기자."
드레이크는 고동을 울려 전투 중지를 알렸다. 정신없이 싸우던 해적들이 창어호를 따라 퇴각했다. 섬 가까이 돌아가 보니 남은 배가 50척도 안 되었다. 아틀란티스 측의 배도 180척 정도 부서졌다.
"20척 부수고 180척 부서졌다니."
창어호가 부순 배가 10척이 넘으니 2백 척이 넘은 배가 사실상 20척도 못 부쉈다. 사실 전투 기간만 보면 적의 배 20척 부순 것도 꽤 괜찮은 성과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에 180척이나 되는 배가 부서졌다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애매했다.
"구호선에 일러라. 부르크 제국의 사람을 구하면 섬에 버린다."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사람을 모두 건진 구호선들이 섬으로 갔다. 배가 침몰하여 물에 빠진 부르크 제국의 사람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가 축 처졌다.
그리고 자기 배를 부숴서 바다에 빠진 해적들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채 서로 부둥켜안고 기뻐했다.
"저 멍청이들은 계약서 제대로 안 읽었겠지?"
바칸이 율족 및 해적과 맺은 계약에는 중요한 조항이 하나 있었다. 침몰한 배를 새것으로 바꿔주는 대신, 유사시 아틀란티스 왕국은 해당 배를 군사 목적으로 징용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유사시의 해석은 바칸 나름이기에 배의 소유권은 완전히 저들에게 있는 게 아니었다.
"알아도 기쁠걸. 사실 창어호도 우리 배는 아니잖아."
드레이크는 가장 위에 달린 금속 뿔을 소중히 쓰다듬었다.
- 작가의말
이번 해전은 부르크 제국의 승리로 기록되었습니다. 서로 비슷한 숫자의 배가 부서졌는데 아틀란티스 해군이 도망쳤으니깐요. 애들 싸움은 먼저 울거나 코피 터진 쪽이 진 거고 해전은 먼저 도망친 쪽이 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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