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광으로
바칸은 금광 입구가 어딘지 쉽게 찾아냈다. 해적왕의 영역이 그렇게 크지 않은 것도 있지만, 금광으로 통하는 입구는 커다란 철문을 대서 너무 눈에 띄었다.
오후 3시가 되면서 해적왕이 철문에서 나왔다. 문을 닫은 해적왕은 작은 비수 크기의 열쇠로 문을 잠갔다.
'제국식 철문. 안이든 밖이든 열쇠가 있어야만 열 수 있는 특별한 문이다.'
문을 통째로 뜯어내는 게 아니라면 열쇠를 얻어야 한다. 바칸은 해적왕 손에 들린 열쇠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224에 317에 523에 742.'
2번 위치엔 위로 향한 길이 4의 이빨. 3번 위치에 아래로 향한 길이 7의 이빨, 5번 위치에 위로 향한 길이 3의 이빨, 7번 위치에 오른쪽으로 향한 길이 2의 이빨.
휜 칼을 녹이면 열쇠 만들 쇠는 넉넉하다. 열쇠 모양을 확인했기에 똑같이 만들어 문을 열 수 있다.
"누구야?"
해적왕이 갑자기 검을 뽑았다. 날 길이만 130센티 되는 제국검이다. 보나비치의 것과 달리 양날검이었고 검 끝이 조금 좁았다. 베기보단 찌르기에 적합한 형태였다.
"너지? 네놈이지?"
해적왕은 성큼성큼 걸어서 붉은 적삼을 입은 해적에게 검을 겨눴다. 해적은 반항할 엄두도 못 내고 바로 무릎을 꿇었다.
"아니다. 뭔지 모르지만, 난 아니야."
해적왕이 이마를 찌푸렸다. 검을 뽑자마자 가장 두려워하는 자를 지목했다. 그런데 아니라고 하는 말엔 진심이 느껴졌다.
"넌 누군지 알 거야."
"뭘 안다는지 모르겠다. 뭔지 말해주면 아는 걸 다 말하겠다."
"열쇠."
'톰슨과 비슷한 능력인가?'
"누가 톰슨이야?"
"없다. 우리 섬에 톰슨이라는 이름이 없다."
섬에는 이름 달린 해적이 총 46명이다. 그중에 톰슨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있어. 톰슨이라는 놈이 내 열쇠를 노렸어. 감히, 감히."
해적왕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주변에 있던 해적들이 삽시간에 흩어져 도망쳤다. 무릎 꿇었던 해적 역시 뒤로 굴러서 몸을 일으킨 다음 고개도 안 돌리고 도망쳤다.
"나쁜 새끼들. 은혜도 모르고."
해적왕이 검을 던졌다. 곧게 날아간 검은 붉은 적삼 해적의 등을 뚫고 가슴팍으로 삐져나왔다. 심장이 쪼개진 해적은 비명도 못 지르고 그대로 엎어졌다.
해적왕은 엄청 빠른 속도로 달려가 검을 뽑았다. 바칸은 더 살피지 않고 눈을 감으며 머리를 비웠다. 비명이 그치고도 한참 지나서 눈을 떠보니 모두 사라지고 시체 몇 구만 덩그러니 남았다.
'톰슨보다 능력이 약하다. 문장이 아니라 단어만 들었다.'
톰슨과 달리 해적왕은 바칸이 어디 있는지 몰랐다. 열쇠와 톰슨은 확실하게 들었지만, 남은 생각은 제대로 읽지 못했다.
'감정을 느껴서 무서워하는 사람을 무작정 죽였다. 골치 아픈 놈이야.'
상대를 찾아내기보단 의심 가는 사람을 다 죽이는 거로 일을 마무리했다. 상식이 안 통하는 놈이다.
'포기하자.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어느 정도 행동 양상이 예측되어야 대략적인 계획이라도 짜겠는데, 해적왕은 도무지 짐작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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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외팔이 훼이크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말이지?"
벨크가 마른고기를 씹으며 말했다.
"그래. 구체적인 방법은 얘기한 적 없어. 그리고 금광 얘기도 했고."
바칸은 금광으로 들어가는 걸 포기했다. 그러나 10월까지 무사하게 보내려면 훼이크의 부탁을 처리해야 한다. 벨크가 해적왕에게 일러바쳐 훼이크를 처리하든 벨크와 훼이크가 손잡고 반란을 일으키든. 어떻게든 결판을 봐야 한다.
아니면 조용히 지낼 수 없다.
"네 생각은 어때? 승산이 있어?"
"내가 어떻게 알아? 해적왕에게 금광이 있다는 말이 진짠지도 모르겠고 훼이크가 왜 나를 찾아왔는지도 모르겠어. 해적왕이 일부러 훼이크를 보내 널 떠보는 건 아닐까?"
벨크는 씹던 고기를 꿀꺽 넘겼다.
"해적왕이 날 의심한다는 거야?"
물고기는 넘치지만, 네발짐승 고기는 귀한 곳이다. 벨크는 늘 아무 맛도 안 날 때까지 씹고서야 삼켰다. 아직 맛이 남은 고기를 삼켰다는 건 머리가 복잡하다는 뜻이다.
"의심받을 짓 했어?"
"푸른 상어 다섯 마리 낚았는데 지느러미는 네 개만 줬지."
바칸의 예측대로 벨크는 상어 지느러미 독을 이용해 해적왕을 어떻게 해볼 생각을 품었다.
'함정일까? 해적왕이 머리 굴리는 쪽은 아닌 것 같긴 한데.'
바칸이 본 모습이 거짓으로 꾸며낸 게 아니라면, 해적왕은 머리 굴리는 일을 아주 싫어하는 성격이 틀림없다.
"훼이크를 만나 해적왕 해치울 방법이 있는지 물어봐."
"나한테 얘기해 줄까?"
"이걸 보여주면 믿을 거야."
벨크는 보석 목걸이를 바칸에게 건넸다. 목걸이 중심에 파란색 보석 하나 있고 주변에 분홍색 보석 여섯 개가 박혔다. 딱 봐도 귀한 목걸이였다.
바칸은 벨크의 재촉을 못 이겨 목걸이를 챙겨 동굴을 나섰다. 파도가 심해 출항하지 않은 덕분에 섬 곳곳에 해적이 가득했다.
바칸이 모습을 드러내고 얼마 안 지나 훼이크가 나타났다. 바칸은 훼이크의 눈짓을 받고 천천히 따라갔다. 훼이크는 한적한 바닷가의 작은 동굴로 들어갔다.
"애꾸가 뭐래? 거절하진 않았겠지?"
훼이크는 무척 다급해 보였다. 바칸이 동굴에 겨우 발 하나 들이자마자 질문을 퍼부었다.
"방법 있으면 해보겠다고 해."
"그럼 내일 바다에서 만나자고 전해. 믿을 만한 놈만 데리고 나오라고 당부하고."
"그럴 필요 없어. 말해주면 내가 전할게."
훼이크는 이마를 찌푸리고 바칸을 노려봤다.
벨크의 부하 중 확실히 해적왕과 연관이 없는 건 바칸밖에 없었다. 머리는 검지만, 체형이나 얼굴이나 말투 모두 해적섬 출신은 절대 아니다.
게다가 섬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자여서 밀고해도 해적왕이 믿지 않을 것이다. 반란과 같은 중대한 일을 바칸이 알아낼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바칸을 전달자로 골랐는데, 주제넘게 나서니 기분이 상했다.
"벨크가 이걸 보여주면 말해줄 거라고 하던데."
바칸은 주머니에서 보석 목걸이를 꺼냈다. 훼이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애꾸랑 무슨 관계야?"
"벨크가 날 바다에서 건져냈어."
훼이크는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7월 말에 금 가지러 사람이 온다."
바칸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원래는 10월에 미친개가 직접 금을 가지고 가서 물건과 바꾼다. 그런데 얼마 전에 배 한 척 부서졌다. 거래 상대가 물건이랑 배를 함께 가지고 와서 황금을 받아 가기로 했다."
"시기가 궁금한 게 아니야. 해적왕을 해치울 방법이 있냐고."
훼이크는 입술을 달싹이며 잠깐 고민했다.
"보밀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
"보밀?"
바칸이 처음 듣는 단어였다.
"술이야. 만들어낸 지 50년도 안 되는 술인데 독하기로 유명해. 미친개가 제일 좋아하는 술이기도 하고. 향이 동대륙 흰술보다도 더 강해 독을 타기엔 정말 좋지."
"독은 이미 구했겠지?"
"구했다. 은과도 반응하지 않는 독이고 색깔도 없다. 거래 상대가 가져온 보밀에 타기만 하면 끝이다."
대화를 끝낸 바칸은 거처로 돌아갔다. 벨크가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바칸은 훼이크와 했던 대화를 그대로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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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칸은 나무를 깎아 거푸집을 만들었다. 진주 다섯 알을 대가로 받은 대장장이는 군말 없이 휜 칼을 녹인 쇳물을 거푸집에 부었다.
바칸은 결과물을 확인하지도 않고 거푸집 채 들고 떠났다.
'해적왕이 출항하면 금광으로 들어가 확인해야 한다.'
바칸은 이번 일이 뭔가 석연치 않았다. 훼이크는 당연히 의심되었고 벨크 역시 수상쩍었다. 그리고 해적왕도 의아한 부분이 없잖았다.
바칸은 이 모든 것에 관한 답이 금광에 있다고 여겼다. 모든 일이 황금을 둘러싸고 벌어졌기 때문이다.
해적왕이 없는 틈을 타서 대부분 해적이 즐겁게 휴식하는 사이, 바칸은 금광으로 통하는 문 앞에 서서 열쇠를 구멍에 꽂았다. 반 정도 꽂힌 열쇠는 전진을 거부했다. 바칸은 열쇠를 오른쪽으로 조금씩 비틀었다.
미세한 찰칵 소리와 함께 열쇠가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막힐 때마다 열쇠를 돌려 끝까지 꽂아 넣었다.
그릉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렸다. 문을 연 바칸은 열쇠를 왼쪽으로 비틀어서 뽑아냈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바칸은 구멍에 열쇠를 꽂았다. 바깥과 달리 단번에 꽂힌 열쇠를 돌려 문을 잠갔다.
바칸은 열쇠를 몸에 지니지 않고 문 근처에 숨겼다. 괜히 안에서 열쇠를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갇히게 된다.
눈이 어둠에 어느 정도 적응하기를 기다려서 안으로 빠르게 걸었다. 약 60미터 정도 걷다 보니 자물쇠를 잠근 방 하나 나타났다.
나무가 아닌 철문인 걸 보면 평범한 방은 아닌 것 같았다.
바칸은 대장간에서 슬쩍한 쇠꼬챙이 두 개를 자물쇠 구멍으로 집어넣었다. 몇 번 후비적거리자 자물쇠가 쉽게 열렸다.
바칸은 혹시나 있을 트랩을 걱정해 문을 최대한 천천히 열었다. 다행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보물 창고인가?'
벽의 진열대에는 귀해 보이는 물건이 가득했다. 바칸은 벽에 걸린 물건을 대충 훑고 창고 가운데에 눈길을 돌렸다. 바칸이 찾던 정령석 셋 박힌 목걸이가 바로 눈에 띄었다.
바칸은 목걸이를 주워 적삼 주머니에 넣었다. 해적왕은 몰라도 벨크는 확실히 목걸이를 알기에 걸고 다니는 건 위험한 짓이다.
창고 구석엔 진주가 가득 쌓여있었다. 바칸은 벽과 바닥 그리고 천장까지 샅샅이 훑었지만, 숨긴 공간을 찾지 못했다.
'황금보다 덜 귀한 물건도 가득한데. 황금은 따로 창고가 있는 것인가?'
해적왕은 의심병이 심하다. 바칸은 해적왕이 금광에 다른 사람을 절대 안 들여놓을 거라고 확신했다. 매일 금광을 순시하는 것도 황금을 문과 가까운 곳으로 옮기기 위함이라고 분석했는데, 문에서 가장 가까운 창고에서 금 한 조각도 찾지 못했다.
밖으로 나와 자물쇠를 잠근 바칸은 계속 안으로 걸었다. 빛이 아예 없는 구불구불 500미터를 손으로 더듬으며 걸으니 커다란 나무문이 나타났다. 문 어귀의 기름 등불 덕분에 시야가 밝았다.
자물쇠를 열고 들어가니 굵은 금맥이 있던 자리로 추정하는 넓은 공동이 나타났다. 등불로 환한 공동에서 수십 구 시체가 바칸을 맞이했다. 엎어진 그릇 등을 보니 식사 도중에 죽은 것 같았다.
바칸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시체를 뒤집었다.
'푸른 상어 지느러미를 여기에 써먹었군.'
살핀 시체마다 눈과 코에 검은 피가 굳었다. 죽은 지 꽤 되는 것 같은데도 시체가 전혀 부패하지 않았다. 푸른 상어 지느러미 독이 틀림없었다.
'해적왕은 미친놈이지 멍청이는 아니야. 여기 사람들 죽인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어.'
바칸은 시체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단서를 찾으려고 애썼다.
아무 성과도 없이 똑같은 증상으로 죽은 시체들만 확인하는데 등 뒤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누구 있어?"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가 대답했다.
"손님이 먼저 소개해야지."
"뭔가 이상해서 몰래 여길 들어온 사람."
바칸의 말에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체형이나 얼굴이나 갈데없는 드워프였다.
"광산 드워프인가?"
"넌 드워프를 아는구나."
"사정 좀 알려줄 수 있어?"
"보름도 더 전에 광산 주인이 준 음식을 먹고 다 죽었다. 먹고 마실 필요 없는 나만 살아남았어."
"왜 너흴 죽이려고 했지?"
"약 두 달 전에 금맥이 말랐다. 나야 광산에 있는 게 좋지만, 인간들은 밖으로 나가겠다고 아우성쳤지. 서로 화내며 싸우기도 했다."
바칸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모은 정보들이 척척 맞물려갔다.
'고리 하나 부족하다. 누가 그 고리인지 궁금하구나.'
- 작가의말
영지만 떠나면 이렇게 재능을 뽐내는 아이를 그간 묶어뒀으니. 이참에 실력도 키우고 귀중한 물건도 많이 얻어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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