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병이 나타나다
존은 영주성에 남고 바칸만 뮬리치 자작과 네이치 그리고 보나비치와 함께 교단으로 갔다. 뮬리치는 주교의 방으로 들어가 은밀한 대화를 나눴고 보나비치는 기도실로 향했다.
"여기 오십시오. 문서 작성 도와드리겠습니다."
네이치와 바칸은 문서를 작성하고 보관하는 방으로 갔다. 제국의 부르크 교단은 서기실이라고 부르고 겔트의 게르크 교단은 문서방이라고 불렀다.
비록 다른 신을 모시고 교리도 다른 부분이 꽤 많지만, 교단의 구성이나 운영방식은 흡사했다.
"형, 나 독립하면 교구 세울 테니까 형이 주교로 와주면 안 돼?"
"교구의 설립은 교단에서 결정하는 겁니다. 영주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바칸은 네이치와 대화하는 성직자를 살폈다. 몸과 얼굴에 살만 좀 더 붙으면 네이치와 정말 비슷할 것 같았다.
"형, 나 보러 자주 올 거지?"
"교단에 묶인 몸이라 장담하진 못합니다."
"형이 좀 더 버텨주지. 형 없으니까 나 혼자 너무 무서워."
"그래서 나처럼 성직자가 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귀족은 시험도 안 보고 성직자 될 수 있습니다."
"계승권도 버려야 하고 혼인도 못 하고. 게다가 매일 일해야 하고."
네이치가 툴툴거렸다. 성직자는 냉담한 얼굴로 필요한 문서를 찾아서 순서대로 테이블에 펼쳤다.
"신의 말씀을 백날 들려줘 봤자 오크는 고기만 먹는다는 말이 정말 와닿습니다."
"형, 나 글 아직 제대로 못 익혔어. 형이 대신 써줘."
네이치는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투정을 부렸다. 성직자 역시 말로는 타박하면서도 네이치의 응석을 다 받아줬다.
"형제님도 대필해 드릴까요?"
"그게 서로 편하겠지."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바칸."
성직자가 들고 있던 깃털 펜을 내려놨다. 바칸을 바라보는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놀라움과 반가움 그리고 기대감.
"출신 마을이 어떻게 됩니까?"
바칸은 상대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고민하며 대답했다.
"떠버리 잡화점이 있는 마을."
성직자는 책장에 빼곡히 꽂힌 문서를 헤집었다. 바칸은 성직자가 뽑은 문서를 보고 이마를 찌푸렸다.
성직자가 뽑은 문서는 양피지로 제작되었다. 네이치와 관련한 문서라면 당연한 일이지만, 바칸과 관련한 문서라면 뭔가 이상하다.
바칸은 굳이 양피지로 문서를 작성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어머니 성함이 발디 맞습니까?"
"그래."
"아버지 성함은 비어있어요. 혼인 등록도 안 되어 있고."
바칸은 뭔가 찝찝함이 느껴졌다. 밑그림을 그려놓은 커다란 화폭에 누군가가 함부로 물감을 뿌린 느낌이었다.
"내가 영주 되려는 건 아니고 그저 신청서에서 이름을 변경하는 것뿐이야. 그러니까 신상 그만 캐고 빨리 할 일이나 끝내자고."
성직자는 바칸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는지 양피지를 테이블에 놓고 뚜벅뚜벅 걸었다. 바칸은 슬쩍 테이블에 놓인 문서를 확인했다. 거기엔 어머니인 발디의 이름이 있고 바칸 이름도 적혀있었다. 아버지를 적어야 할 곳은 비어있었다.
짧지 않은 고민으로 성직자 얼굴에서 망설임이 사라졌다. 제국을 구하려고 마왕을 향해 돌진하기 전의 '빛의 용사' 가 저런 얼굴이었지 않을까 싶은 표정으로 착석했다.
"네이치. 독립하기 싫어?"
성직자 말투가 변했다.
"응. 정말 싫어."
네이치는 성직자의 말투가 갑자기 변한 데 관한 의문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바칸, 넌 어때? 독립해서 영주 되고 싶은 생각 있어?"
성직자의 친근한 말투가 불편했다. 마치 지렁이를 생으로 삼키는 기분이었다.
"뭐 하자는 거지?"
바칸은 상처 입은 맹수처럼 으르렁댔다.
성직자는 바칸 눈을 한참 바라보았다. 바칸 역시 피하지 않고 상대를 쏘아봤다. 바칸의 심장이 더는 빨라질 수 없을 정도로 날뛸 때에서야 성직자가 끝내 입을 열었다.
"바칸, 발디는 내 고모다."
바칸은 안도와 경악을 동시에 느꼈다. 네이치를 닮은 성직자가 자기 아버지가 아니라는 데서 안도를 느꼈고, 상상과는 달라도 큰 틀은 벗어나지 않는 상황에 놀랐다.
"내 아버지의 여동생이었지. 내가 어린 시절, 그러니까 네이치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라졌다. 계승권 때문에 형제들 사이에서 다툼이 있었고, 아버지가 승리하고 오래지 않아 고모가 모습을 감췄다."
바칸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머리가 평소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심장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지만, 마음의 평정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아버지와 고모는 사이가 좋았다. 아버지도 같고 어머니도 같은 친남매였으니까. 자세한 건 집사한테 물어봐. 당시 사정을 알만한 건 집사뿐일 거야. 난 그때 나이가 너무 어렸거든. 내가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건, 아버지와 고모의 우애가 정말 좋았다는 것뿐이야."
"그런데 날 어떻게 안 거지?"
바칸이 침착한 말투로 질문했다. 성직자는 빠르게 감정을 수습한 바칸에게 감탄했다. 어린 나이에 경험이 부족할 수밖에 없으니 타고난 기질이라고 봐야 한다.
네이치와 너무 비교되는 바칸의 훌륭한 모습에 성직자는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그러나 곧 결심한 일을 끝까지 추진하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내가 고모를 마지막으로 본 건 십 년 전이었다."
뮬리치의 괴롭힘을 참지 못하고 교단에 귀의하여 신을 모시는 성직자가 되었다. 귀족 출신에 글 쓸 줄도 알았기에 교단에서 두 손 들어 환영했고 처음부터 중책을 맡겼다.
"선언문을 구매하지 않는 마을을 폐쇄해야 할지 심사하러 갔는데 내가 책임자였어. 교통이 불편하고 인구도 백 안 되며 리더조차 없어서 폐쇄해야 하는 마을인데 고모가 사정해서 내가 보고서에 영지 상황을 조금 조작했다. 그때 널 보진 못했지만, 고모가 네 이름을 알려준 적 있다."
외부에서 손님이 오면 귀중한 물건과 여자와 아이는 일단 숨겨두고 보는 게 마을 관습이었다. 아마 그때 6살밖에 안 된 바칸은 8살짜리 존과 함께 숨어있었을 것이다.
"이 문서도 내가 돌아와서 작성한 거다."
"용건만 간단히 말해."
바칸은 성직자의 말을 의심하는 걸 멈췄다. 진실보단 성직자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걸 이용해 이득을 챙기는 게 중요하다.
"고모는 계승권이 있잖아. 너 영주 될 생각 없어? 뭐, 영주 되려고 신청서까지 올렸는데 괜한 질문이겠지? 고모 계승권을 넘겨받고 네이치 대신 네가 독립해."
성직자는 네이치를 곁에 두고 보호하려는 목적인 것 같았다. 바칸이 보기엔 네이치는 제대로 배우지 못한 미클이나 톰슨에게도 못 미쳤다.
"뮬리치가 그냥 보고만 있지 않을 텐데?"
성직자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이럴 땐 네이치보다 뮬리치와 더 비슷했다.
"이미 심사 끝나서 마을 설립은 문서 작업을 마쳤다. 남은 건 영주 신청자 이름 바꾸는 것뿐인데, 안 바꾸고 네가 그대로 하면 돼."
바칸은 이마를 찌푸리고 고민했다. 이해득실을 따져야 할 뿐만 아니라 어떤 함정이 있는 게 아닌지도 고민해야 한다.
"지금 10월이야. 뮬리치는 12월 전까지 영지민 숫자를 줄여야 해. 그리고 내가 아는 뮬리치라면 이번 일로 노리는 게 몇 개 더 있을 거야. 원하는 걸 최대한도로 이루려면 네가 요구하는 걸 어느 정도 들어줄 수밖에 없어. 얼마나 얻어낼지는 네게 달렸다만."
성직자는 신을 모시기보단 악마의 하수인이 되는 게 훨씬 전도유망해 보였다.
바칸의 속에서 탐욕이라는 괴물이 슬슬 고개를 쳐들었다.
'기회다. 통째로 삼키면 탈 날 것 같긴 한데.'
이미 바하 영주 뒤통수를 혹 날 정도로 세게 두드렸다. 그런데 베르크 자작의 뒤통수까지 때리려니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이쪽 동네에서 베르크와 바하를 동시에 척지고 살아남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머니는 8년 전에 죽었다."
바칸은 일단 대화하면서 고민할 시간을 벌기로 했다.
"참 안 됐군. 웬만한 남자보다도 강한 여기사였는데. 병으로 돌아가셨어?"
"나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늑대 인간이 습격했을 때 죽었다."
늑대 인간에게 물린 것까지 기억이 나는데 거기서부터 한 달 정도 시간이 삭제되었다. 게다가 물린 자국도 없다.
마찬가지로 그날 기억이 희미한 미클은 늑대 인간도 이름이 바칸이라고 우겼다. 바칸이 같은 이름의 늑대 인간을 죽이고 운명을 빼앗았다는 주장인데, 당시 8살에 불과한 바칸이 마을 사람 50명 가까이 죽인 늑대 인간의 목숨을 취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사망으로 계승권이 자동 승계되었다. 모든 게 구비되었다. 이제 남은 건 네 의지다. 네가 동의만 하면 계승권을 증명할 문서를 다 준비하겠다."
바칸은 숨을 크게 들이쉰 다음 천천히 뱉었다. 몇 번 반복하고 네이치를 바라봤다. 네이치 눈에는 모종의 기대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누군가는 바라마지 않는 기회인데, 네이치에겐 그저 불행한 미래로 여겨지는 것 같았다. 뮬리치가 죽은 다음 대영주가 되려는 환상을 품은 것 같은데, 바칸 생각으론 네이치가 뮬리치보다 오래 살 것 같지 않았다.
'난 손해 볼 거 없다.'
바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들 계획에 동참한다.'
영주 신청인을 네이치로 바꾸지 않고 계속 바칸으로 한다. 오늘 바칸은 영주와 귀족 신분을 얻는다. 그렇게 되면 뮬리치는 바칸을 함부로 할 수 없다. 그냥 귀족도 아니고 계승권을 갖춘 귀족을 죽이는 건 중죄다.
깔끔하게 바칸과 관련한 사람을 다 죽이면 몰라도 들키면 뮬리치의 귀족 작위는 물론 영주 직위까지 박탈당할 정도로 무거운 죄다. 뮬리치의 목숨이 남아있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고.
'뮬리치가 뒤집어도 손해 볼 거 없다.'
뮬리치가 바칸 대신 네이치를 영주로 만들고 독립시켜도 손해 볼 건 없다. 영주 자리는 날아가도 귀족 신분과 계승권이 남는다.
최악의 상황이 되더라도 뮬리치와 협상해서 계승권을 포기하면 된다. 그래도 귀족 작위는 여전히 남는다. 잘하면 계승권 포기를 대가로 이익을 챙길 수도 있다.
'만약 내가 독립해서 영주가 된다면, 마을을 200골드에 바하 영주한테 팔아치운다.'
바하 영주는 잔금을 치르고 마을을 받아 가면 된다. 바칸이 귀족 신분이 생기기에 바하 영주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용병 조합과 선원 조합을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는 바하 영주기에 어떤 더러운 수작을 쓸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럽다고 밭에 거름을 안 뿌리면 풍작을 거둘 수 없다.
'잘하면 목걸이도 얻을 수 있고. 해볼 만한 모험이다.'
"시간이 없다. 뮬리치가 주교 방에서 나오기 전에 끝내야 한다."
성직자의 재촉에 바칸은 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고민하느라 결정이 늦어지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된다.
"좋다. 우선 내 계승권부터 어떻게 해보자."
성직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참 뭔가를 찾아다녔다.
"당신 아버지 역할을 할 귀족을 찾습니다."
양피지로 된 문서를 빠르게 뽑아서 읽어보고 다시 꽂았다.
"철부지 여동생들을 좋은 곳에 시집보낼 생각으로 귀족 가문의 정보를 자주 열람했습니다. 예전엔 베르크 교구가 비나크 교구 대신 비나크 지역을 이끌었거든요. 지금은 비나크 교구가 더 높지만, 원시 기록은 많이 남아있는 편입니다."
성직자는 몇 개 양피지를 두고 잠시 고민하다가 한 장의 양피지를 뽑았다.
"만일을 대비하여 외워두십시오. 이제부터 이 사람은 당신 아버집니다."
- 작가의말
이후에도 설명이 많아 지루한 부분은 연참하겠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당분간은 그럴 일 없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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