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선물
패릭은 고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갔다. 임신한 아내의 배가 너무 컸다. 최소 쌍둥이라는 추측에 하루도 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공부시켜서 영지 관리가 되게 할 거야. 한 달에 최소 2골드. 난 평생 놀고먹을 수 있어.'
아이를 공부시키려면 돈이 많이 든다. 늘그막을 편하게 보내려는 생각에 패릭은 쉬지 않고 일했다. 임신으로 일 못 하는 마누라 몫까지 해야 하니 남들 쉬는 날에도 일손을 놓지 못했다.
"고생했어. 나도 아이 낳고 도울게."
"네가 더 고생이지. 카쿠는 내가 삶을 테니까 넌 침대에서 쉬어."
원래는 바닥에서 잤는데 아내가 임신하는 바람에 15실버 주고 나무 침대를 샀다. 마침 목수 조합장이 함께 일하던 노예여서 싸게 장만했다.
수도물을 받아 카쿠를 삶았다. 삶은 카쿠를 꺼낸 다음 말린 쥐고기를 넣고 끓였다. 삶은 카쿠에 쥐고기 국을 먹으니 몸의 피로가 풀렸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수도 조합에서 나왔다. 수도꼭지 추가로 설치한다."
"어서 들어와. 근데 수도꼭지를 왜 두 개씩이나?"
"이건 따뜻한 물이 나오는 거야. 뜨거운 물에 씻으면 아프고 힘든 게 사라진다고 영주가 그랬어."
보름 전에 영주가 돌아온 다음 창고 꼭대기에 쇠로 된 커다란 물건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땅을 파헤치고 강철 대나무를 심었고 집마다 가는 파이프를 들였다.
뭔지 궁금했으나 감히 묻지 못했다. 지금 생활이 너무 만족스러워 언행에 특별히 조심했다.
"뜨거운 물이 통하면 이따가 창고에서 종 세 번 울릴 거야. 미리 열어놓지 마. 뜨거운 물이 나와서 델 수도 있으니까."
수도 조합의 사람이 신신당부하고 떠났다. 저녁을 마저 먹은 패릭은 피곤한 걸 참으며 종이 울리기만 기다렸다.
뎅, 뎅, 데엥.
침대를 살 때 공짜로 받은 나무 욕조를 수도꼭지 밑에 댔다. 수도꼭지를 트니 쉭 소리가 한참 났다. 패릭이 속으로 수도 조합을 욕하고 있을 때, 츠륵 소리가 몇 번 나더니 김이 몰몰 나는 뜨거운 물이 욕조에 쏟아졌다.
"에구머니나."
마누라가 꼭지를 만지다가 손을 확 뗐다. 꼭지가 너무 뜨거웠다. 패릭은 장갑을 끼고 수도꼭지를 닫았다. 구역 대표한테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를 크게 만들어달라고 요청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꼭지가 작으니 쉽게 뜨거워졌다. 마누라야 다음부터 조심하겠지만, 이제 태어날 아이들이 걱정이었다.
'아니지. 아이들 손이 안 닿게 높이 달라고 해야겠다.'
패릭은 욕조를 끌고 찬물이 나오는 수도로 갔다. 찬물을 적당히 섞은 다음 몸을 담갔다. 피로가 싹 풀리는 느낌이었다.
"너도 씻어. 정말 몸이 편해."
패릭은 마누라를 씻길 생각에 대충 씻고 나왔다. 물을 버리려는 패릭을 마누라가 말렸다.
"물 아껴야 해. 물 많이 쓰면 돈 내야 하잖아."
매달 정해진 양 이상을 쓰면 세금을 받았다.
"아냐. 나 흙 많이 묻어서 물이 더러워. 내일부터는 네가 먼저 씻고 다음에 내가 씻으면 되겠다."
패릭은 물을 버리고 뜨거운 물과 찬물을 섞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마누라가 편한 표정을 지었다. 하루의 노고가 다 사라졌다.
"나 이만하면 됐으니 뜨거운 물 좀 더 넣고 너도 몸을 담가."
패릭은 뜨거운 물을 좀 많이 넣었다. 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였지만, 패릭은 뜨겁기보단 시원하단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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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이건 너무하다. 왜 결혼한 사람 집에만 뜨거운 물을 주는데?"
16명이 수도꼭지 하나 쓰는 것도 서러운데, 둘이 수도꼭지 하나 쓰는 부부들 사는 집엔 뜨거운 물 나오는 수도꼭지가 하나 더 생겼다.
"곧 목욕탕 만들 거다. 모든 집에 뜨거운 물 나오게 하는 건 돈이 너무 든다."
이미 임신한 여자가 3백 명이 넘는다. 아이는 자주 씻겨야 하니 부부들이 사는 집엔 직접 온수를 제공했다.
남은 자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분수광장과 가까운 곳에 목욕탕을 커다랗게 짓고 있다.
"목욕탕은 달마다 표 5장 줄 것이다. 목욕할 때마다 표 한 장씩 내야 한다. 그 이상은 돈 내고 해라."
목욕탕이 뭔지 모르지만, 자기들도 곧 뜨거운 물을 쓸 수 있다는 말에 항의하던 대표가 자리에 앉았다.
부부들 사는 구역의 대표들이 드디어 굽은 등을 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지은 느낌이어서 지금까지 발언하지 못했다.
"아이가 수도꼭지를 잘못 건드려서 뜨거운 물에 델 수 있다. 조치 바란다."
수도 조합과 목수 및 대장장이 조합 대표가 잠깐 상의하더니 쉽게 열 수 없는 잠금장치를 만들어 추가하겠다고 대답했다.
"톰슨, 선원 모으는 일은 어떻게 됐어?"
"다미앙이 바하에 소문을 냈다. 그리고 검은 곱슬머리 노예도 사고 있다."
"모든 곱슬머리가 선원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러니 배를 탄 적이 있는지 확실히 조사해."
바칸이 영지를 떠난 한 달 반 사이 영지에 사람이 4천 명 늘었다. 그중 절반 정도가 제국에서 소문 듣고 찾아온 사람이었다.
다섯 모험가를 따라온 게 아니라 소문만 듣고 직접 바하까지 찾아온 사람들이다. 당연히 평범한 사람은 얼마 없었다. 바칸은 영지로 돌아온 날에 뜨거운 물을 끓여 공급할 보일러를 만들 것을 드워프에게 지시한 후 지금까지 면접으로 매일 일정을 꽉 채웠다.
"2만 명이야. 내가 생각하는 영지민 숫자가."
지금 상황에선 그 이상이 필요치 않다. 카쿠 심을 7, 8월에 부족한 일손은 영지민 전체를 동원하면 된다. 구름꽃도 4월부터 8월까지만 신경 쓰면 된다.
목장에 백 명 정도 일손을 추가하긴 해야 하는데, 목장 일은 아무나 뽑을 수 없다. 가축 돌보는 건 무척이나 섬세한 일이어서 사람을 가려가며 뽑아야 한다.
특히 남쪽 숲 개간이 끝나면 일거리가 확 줄어든다. 영지민에게 어떤 일거리를 만들어줄지도 고민이다.
'남들처럼 농사 안 지으니까 시킬 일이 없어. 웬만한 토목 공사는 드워프가 다 해치우니까 많은 일손이 필요 없고. 고정 직업이 없는 평범한 자들에게 어떤 일을 시켜야 할까?'
비나크 공작이 8천 명 노예를 던져주는 바람에 이런 고민이 생겼다. 8천 명의 일손 덕분에 카쿠 사태에 잘 대처하긴 했지만, 계획을 벗어난 인구 증가임은 틀림없었다.
"영주. 새로 짓는 목장에 소 2천 마리 온다고 들었다. 소 먹일 풀 베는 일만 해도 사람이 많이 필요하다. 그리고 소젖을 짜서 치즈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카쿠와 치즈 등을 운반하는 데 사람이 많이 있어야 한다. 부두에 짐을 싣고 부리는 전문 일꾼도 필요하다. 영지민 숫자는 오히려 부족하다."
바칸은 조금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도 영지민 숫자는 천천히 늘려야 해. 난 내 영지민이 일자리 없어서 굶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풀 베는 기계나 물건을 쉽게 싣고 내리는 거중기의 제작은 당분간 미루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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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 되었다. 2백 척에 가까운 배가 영지를 방문했다.
바다에는 천톤급 배 5척과 2천톤급 배 1척이 돌아다녔다. 투석기와 쇠뇌도 위협적이지만, 금속으로 만든 충각이 정말 무시무시했다. 적재량과 속도만 신경 쓴 배들은 충각 공격을 두 번 버텨낼 내구도가 없었다.
"다섯 척씩 온다. 물건 다 내리면 바로 항구 떠난다."
가장 먼저 내린 건 전투 노예였다. 생기가 별로 없는 눈은 비나크 공작의 영지에서 처음 봤던 전투 노예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전투할 때를 제외하면 늘 힘없어 보이는 자들이었다.
병사들이 전투 노예의 결박을 풀어주고 목욕탕으로 데려갔다. 자신들도 전투 노예였다며 아틀란티스 영지 생활을 소개했다.
깨끗한 물로 몸을 씻고 맛있는 카쿠와 쥐고기 국을 먹고 새 옷과 신발까지 받은 전투 노예들은 조금씩 생기를 찾았다.
영주성에 데려다가 방까지 나눠주자 꿈꾸던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기뻐했다.
전투 노예의 이름과 나이를 통계했다. 이름이 없는 자가 대부분이어서 열 개 이름을 불러주고 마음에 드는 걸 고르게 했다. 나이 역시 모르는 자가 대부분이어서 이 상태를 보며 비슷하게 적었다.
기존 병사는 전부 조장이 되어 10명의 신입을 거느렸다. 정식 편제가 아니라 영주성 생활과 적응을 돕는 개념이었다.
다음으로 내린 건 전투마였다. 2백 필의 제국 혈통의 전투마는 처음 보는 사람의 손길에도 순순히 응했다. 세인과 목장 일꾼들이 말들 입에 소금에 절인 당근 하나씩 물려주며 친밀도를 쌓았다.
잘 훈련받은 전투마들은 당근을 먹고도 야생마처럼 춤추며 난리 피우진 않았다. 그러나 엉덩이가 크게 씰룩이는 걸 보면 별식이 꽤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전투마를 목장에 넣은 다음 세인은 급하게 항구로 돌아왔다. 배에서 2천 마리의 소가 내렸다. 1천8백 마리의 젖소와 2백 마리의 건장한 수소였다.
세인은 소들의 치아 상태를 살피며 나이를 추정했다. 젖소는 3살 이하로 요구했고 수소는 5살 이하로 요구했는데 세인이 확인한 소들은 모두 요구에 부합했다.
소들에게 소금을 탄 맑은 물을 먹이고 새로 지은 목장으로 끌고 갔다. 소 2천 마리를 수용할 목장은 나무로 울타리를 세웠다.
세인은 소를 목장에 넣은 다음 가장 먼저 카쿠 줄기와 잎을 먹여봤다. 소들이 카쿠 줄기와 잎을 맛있게 씹는 모습을 확인하고 큰 시름을 놓았다.
소를 다 내리니 밤이 되었다. 바칸은 부두의 모든 불을 밝힐 것을 지시했다. 태양의 눈물을 담은 돌 등잔 수십 개에 불을 붙이니 대낮처럼 환해졌다.
"카르챠 영주가 사죄의 의미로 무기를 조금 더 실었다."
검, 도끼, 창이 5백 자루씩이고 금속 방패는 천 개나 되었다.
'승자는 뭐든 넘쳐난다더니. 카르챠 영주는 곧 왕이 되겠군.'
소나 전투 노예가 아니라 무기를 더 보내는 거로 확실한 호의를 표현했다.
"날씨가 좀 덥구나."
바칸은 천천히 겉옷을 벗었다. 안에 입은 귀족 예복 가슴엔 장신구가 30개 가까이 달려있었다.
상인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바칸의 가슴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놀랄 것 없다. 열 개는 드워프 장신구 아니다."
"이건, 너무 놀라워."
상인은 혀가 굳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6월 1일에 경매에 내놓을 물건이다."
제국에서 온 상인은 경매가 뭔지 알았다.
"우리가 참가해도 될까?"
"그래. 경매 대금은 8월까지 지급하면 된다. 금화가 아니라 물건으로 해도 되고. 쌀이나 무기라면 값을 비싸게 쳐줄 수 있다. 가죽이나 치즈 그리고 향신료도 괜찮고."
무기를 모두 영주성 창고로 입고했다. 물건 내리는 일에 참여한 영지민들은 고기와 카쿠 그리고 일당을 받아 갔다.
"흰머리수리 내려라."
존이 밧줄을 들고 위에 올라가 흰머리수리를 내렸다. 덩치에 비해 가벼운 편이라 혼자서도 문제없었다.
"저쪽에 손 흔들어라."
바칸은 상인에게 동쪽을 가리켰다. 상인은 바칸이 시키는 대로 어정쩡하게 손을 흔들었다.
"저 친구들은 네 냄새 기억하고 있다. 저쪽은 기웃거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조금 늦게 바칸의 말을 이해한 상인은 턱이 덜덜 떨리고 팔다리에 감각이 사라졌다. 10분 사이에 5백 명에 가까운 자들이 학살당한 보름달 환하던 밤이 생각났다. 그날 기억은 평생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카르챠의 도장이 찍힌 초대장을 들고 오면 경매 손님으로 받아주겠다. 무기에 대한 보답이다."
- 작가의말
주인공은 이해득실만 따지는 편입니다. 너무 큰 것을 품고 살다 보니 작은 것은 쉽게 무시하죠. 감정 교류도 주변 인물들하고만 합니다. 감정 이입이 어려운 인물이죠. 그래도 설정 잡은 거 끝까지 밀고 나가겠습니다.
이 글은 120~140화 사이로 고민하며 시작했습니다. 얼추 비슷하게 마무리할 것 같습니다. 너무 결말만 보고 달리느라고 디테일이 떨어지는 게 아닌지 자주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고민한다고 크게 나아지진 않더군요. 그래도 계속 고민하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려고 애써보겠습니다.완결까지 갈래를 잡으면 연참하겠습니다. 11월 연참대전에는 11번째 글로 참가할 계획입니다.그리고 응원해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쪽지를 거부로 설정하셔서 일일이 고마움을 표하는 건 어려워 이렇게 작가의말로 한꺼번에 감사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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