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나르 대목장
존과 톰슨이 합류한 후 여섯은 파비앙 영주를 찾아갔다. 강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어 세 귀족 중 목소리가 조금 더 큰 자이다.
"만나서 반갑다. 아틀란티스 공왕 바칸이다."
"베르히의 자작 파비앙이다."
"제국 향사 투치다. 아틀란티스에 몸을 의탁했다."
"양털과 양가죽을 사려고 왔다."
이번 거래는 표면적으로 바칸보다는 보나르의 세 귀족에게 큰 이득이 되는 거래다. 안정적인 수요처 하나 는다는 건 세 귀족에게 의미가 큰 일이다.
"얼마나 생각하는 건가?"
"여기 한 해에 양털과 가죽이 얼마씩 나오지?"
"양털은 10만kg 정도 나오고 가죽은 8천 장에서 1만 장 정도 나온다."
바칸은 투치를 바라봤다.
"매년 최소 5만kg 양털에 5천 장 가죽을 사겠다. 가죽은 생가죽으로 살 테니까 좀 싸게 줘야 한다. 거래는 5월과 9월에 나눠 두 번으로 하겠다."
투치의 말에 파비앙은 놀란 눈으로 바칸을 바라봤다. 농지가 없어 경매 대금을 식량으로 받는다고 들었는데 예상과 달리 부자인 듯했다.
"대금은?"
"금화 혹은 쌀. 그쪽에서 원하는 대로 맞춰주겠다."
"혼자 결정할 일 아니다. 두 자작을 불러올 테니 잠시 기다려라."
보얀과 마르티노 자작은 파비앙의 영주성에 머물고 있었다.
"쿠른의 자작 보얀이다."
"피버그의 자작 마르티노다."
협상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보나르는 강까지만 양털과 가죽을 운반하고 그다음부터는 아틀란티스 공국이 알아서 하기로 했다.
가격 협상도 시원하게 끝냈고 세 자작은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었다. 그간 바하의 견제 때문에 이문을 크게 남기지 못해 속에 맺혔던 응어리가 살살 풀려나갔다.
"잠깐. 우리 공국이 바하랑 사이가 안 좋은데 어떡하지? 우리 배를 못 지나가게 막으면 계약 이행이 어려울 텐데."
바칸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이마를 찌푸렸다. 세 자작은 빠르게 속셈을 굴렸다. 만약 공국까지 양털과 가죽을 갖다줘야 한다면 방금 협상한 가격으론 손해다. 그렇다고 섣불리 가격을 올려 훌륭한 고객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공왕. 비나크 공작에게 잘 말해서 바하 영주를 압박하면 된다."
"비나크 공작? 난 제국 귀족 혈통이고 공왕이다. 예전에야 힘이 약해서 허리를 숙였다지만, 이젠 지위도 비슷하고 힘도 비슷한데 그럴 수는 없지."
"그럼 차라리 바하를 점령하는 게 좋겠다."
"그럼 겔트 왕국과 우리 공국의 전쟁이 된다. 바하나 비나크 공작만 상대하는 건 두려울 게 없는데, 겔트 왕국군은 부담스럽다."
바하의 방해가 언급되면서 계약서 체결은 잠시 보류되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우리가 대책을 의논해 보겠으니 바칸 공왕은 보나르 대목장을 구경하는 건 어떤가?"
"좋다. 보나르의 목장이 제국 못지않다고 하던데 오늘 견식 해보지."
남은 넷도 불러서 보나르 대목장으로 향했다.
대목장은 수십 개 작은 목장을 합쳐서 부르는 명칭이었다. 목장의 소유주는 세 자작을 비롯해 13명이나 되었다. 비나크보단 낫지만, 농지가 부족한 건 마찬가지여서 뭉치지 않으면 생존을 위협받는다.
"헤크 지역은 농사지을 땅이 넘친다는데."
"그래서 미아르가 강이 있는 지역을 헤크한테서 빼앗은 거야. 헤크의 식량이 보나르와 비나크로 흘러들면 서 겔트가 불리하니까."
강이 있는 지역만 확보하면 두 번째 바하가 생길지도 모른다. 바하는 남과 북과 서로 통하는 강 덕분에 가죽밖에 없는데도 사람이 몰렸다.
헤크 지역에서 강을 차지하면 보나르의 가죽과 양털 그리고 치즈가 바하 대신 남쪽으로 갈 것이다. 강을 따라서 가는 거여서 운반이 쉽고 거리도 더 가깝다.
"그럼 보나르에선 왜 바하와 같은 교역 마을을 안 만드는 거지?"
안 만든 게 아니라 만들었는데 망했다.
"위치가 안 좋아. 여름에야 큰 배도 들어오지만, 다른 계절엔 작은 배밖에 못 다녀. 북쪽 바다와 늘 통하고 비나크를 통해 수도까지 갈 수 있는 바하와 경쟁이 안 되지. 그리고 양 치즈는 소 치즈보다 비린내가 심해. 귀족들은 제국의 소 치즈만 찾고 평민은 치즈를 비싸서 못 먹고. 먼 바다로 나가는 자들이나 양 치즈를 구매해."
쉽게 상하지 않는 치즈는 원항선의 필수품이다.
"공왕. 저들이 우리 생각대로 움직여 줄까?"
투치는 차라리 먼저 제안하는 게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저들이 부족하다고 해도 훌륭한 가신이 있을 것이다. 안정적인 거래처, 바하의 어마어마한 세수, 가죽을 더 비싸게 팔 수도 있고. 바하를 점령할 생각을 못 떠올렸다면 차라리 없던 일로 하는 게 낫지. 멍청한 놈들과 거래하다간 어떤 손해가 생길지 모른다."
마차가 멈추고 대목장에 도착했다. 하나하나는 아틀란티스의 목장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다 합치면 정말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풀만 넉넉하면 양 십만 마리 더 키워도 되겠군."
"대장, 주술사가 느껴진다."
"십만 마리가 넘는데 당연히 있겠지."
"영지의 주술사가 나이 들어 몇 년 못 산다. 수십 마리밖에 안 되어 새로 주술사가 태어날 가능성이 작다. 여기 주술사를 데려가는 게 좋겠다."
톰슨이 바칸에게 다가와서 소곤거렸다.
"저들도 멍청이 아니라면 내주지 않을 거야."
"주술사는 살이 잘 찌지 않고 털도 짧다. 보통은 채 자라기도 전에 죽인다고 한다. 주술사가 나한테 구해달라고 요청했다."
"양 수십 마리 사면 되겠다. 헤크에서 오는 배에 실어 보내면 되고."
다미앙의 영지 건설이 거의 끝났다. 전문 병사 2백 명 정도 남기고 모두 철수하기로 했다.
바칸 일행은 마차를 타고 소목장 세 개를 둘러봤다. 군데군데 목장 사이에 나무로 지은 창고가 보였다.
"저건 뭐지?"
"건초 창고다. 4월까지는 건초를 먹인다."
"남은 건초는 어떻게 하는가?"
"불에 태워 밭에 뿌린다. 그대로 두면 여름에 비가 올 때 다 썩어 사라진다."
###
"군사 동맹을 제안할 수 있을까?"
파비앙이 대표로 말했다.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거절할 필요 없겠지. 자세한 설명 바란다."
"우린 왕실 밀서를 받았다."
파비앙은 왕실 도장이 찍힌 편지를 꺼내 바칸에게 건넸다. 교단의 반발을 눌러줄 테니 평민 영주들에게 호된 맛을 보여주라는 내용이었다.
어디에도 비나크의 마을을 공격해도 된다는 글귀는 없었지만, 서로 그 정도 마음은 통하는 사이였다.
"원래는 우리 지역과 인접한 마을들을 공격한 다음 왕실과 교단이 충돌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는데, 공왕의 제안을 받고 생각이 바뀌었다. 바로 바하를 점령하겠다."
"바하가 세 자작의 손에 들어간다면 나도 안심하고 계약할 수 있겠군."
"비나크 지역의 평민 영주는 베르크 자작과 힘을 합쳐 막아낼 수 있다. 그러나 비나크 공작의 전문 병사 천 명은 감당할 수 없다."
"내가 끼어들면 국가 간 분쟁이 된다."
"만일을 대비하는 거다. 비나크 공작이 바하를 공격하면 우린 바로 독립하겠다. 그때 공왕이 제국에 얘기 잘 해주고 군대를 조금 지원했으면 한다."
겔트 왕실은 황태자 편이고 게르크 교단은 부르크 교단과 친하다. 아틀란티스에 이어 보나르의 세 자작도 독립하겠다고 하면 삼 황자가 춤추며 기뻐할 것이다.
"제국을 설득하는 건 힘닿는 데까지 해보지. 군대 지원은 문제없다."
바칸은 세 자작과 계약을 체결했다. 해마다 5월과 9월에 나눠 보나르 대목장에서 총 5만kg의 양털과 5천 장의 생가죽을 제공한다는 계약이었다.
"참. 아까 보니까 남는 건초가 있던데 좀 팔아줄 수 있는가? 얼마 전에 제국이 소 2천 마리를 덜컥 선물했는데, 제국 소가 그렇게 잘 먹을 줄은 상상도 못 했지 않은가."
"필요한 양을 계산하고 남은 건 모두 팔겠다."
파비앙이 이게 웬 떡이지 하면서 바로 승낙했다.
"투치, 가격은 바하 기준으로 쳐줘야 한다."
장작이나 건초 등은 사는 사람이 가격을 제시하는 게 일반이다. 하루에 한 끼 먹는 노예들이 알아서 자란 놈들을 베는 것이기에 딱히 정해진 가격이 없었다.
"바하 현 시세대로 쳐주겠다. 강으로 운반 바란다."
"그리고 양 삼십 마리 정도 사 가고 싶다. 영지에서도 수십 마리 키우고 있는데 암컷이 너무 적다."
"그 정도는 그냥 선물로 주겠다. 관리인에게 말해 가장 좋은 품종으로 골라주지."
"고맙다. 톰슨 백작이 함께 가서 귀엽게 생긴 놈으로 골라봐."
###
2월이 되었다.
"다미앙 후작이 3백 골드로 암컷 쥐 백 마리에 수컷 쥐 천 마리 사 갔다."
다미앙이 만든 마을은 나무가 넘쳤다. 귀한 목재도 아니어서 내친김에 목장을 만들어 쥐를 키우기로 했다.
"확실히 쥐들이 다른 나무도 먹는 거 맞지?"
바칸은 쥐들이 남쪽 숲에만 사는 것 때문에 특정 나무만 먹는 게 아닌지 걱정되었다.
"이미 확인했다. 남쪽 숲 나무를 더 좋아하는 건 맞지만, 다른 나무도 잘 먹는다."
"그럼 이제부터 쥐가죽으로 만든 제품은 내부 판매로 돌린다."
바칸이 야심 차게 준비한 쥐가죽 세트는 생각보다 덜 팔렸다. 귀족 상대로 만든 고가품은 없어서 못 팔지만, 평민을 상대로 한 제품은 장갑만 잘 팔렸다.
모자도 다른 제품보다 가죽을 넉넉히 써서 그럭저럭 팔렸다. 그러나 신발은 가죽의 한계로 튼튼함이 부족해 창고에 가득 쌓였다. 사람들은 따뜻한 신발보다는 오래 신을 튼튼한 신발을 더 원했다.
"양가죽으로 튼튼한 신발과 장갑을 만드는 게 목표다. 판매 대상은 일단 블라우크와 마르카다로 한다."
"목수 조합에서 운송선을 만들었다. 시험해 봤는데 나쁘진 않다."
"일단 지금 설계대로 백 개만 만든다. 연구도 게을리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훌륭한 설계가 나오면 드워프한테 맡기면 된다. 그러나 지금 나온 설계도는 드워프 눈에 차지 않았다. 운송선이 당장 필요하기에 어쩔 수 없이 목수 조합에 맡겼다.
"카쿠의 판매는 여전히 금지인가?"
관리의 질문에 바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바칸 영지를 찾는 상인 대부분은 물건 팔러 왔다. 영지에서 내놓은 상품은 장신구와 가죽 제품이었다.
드워프에게 배운 사람들이 만든 거여서 비싸게 팔렸지만, 양이 너무 적었다. 가죽 제품은 모자와 장갑이 그나마 찾는 사람이 있지만, 그마저도 많지 않았다.
"너무 사들이기만 한다. 사고파는 게 순환을 이뤄야 규모를 키울 수 있다."
"양털을 사면 그거로 천을 짜서 팔면 된다. 옷을 직접 만들어 팔아도 되고. 소젖으로 만든 치즈도 곧 양산이 될 것이다. 대장장이들이 만든 농기구 역시 공국의 특산품이 될 수 있다."
제국에서 무기 만드는 공법으로 농기구를 만들면 엄청나게 잘 팔릴 것이다.
"바하처럼 사람들이 멀리서도 찾아와야 하는데."
"바하는 20년이나 걸렸다. 급해 할 일이 아니다."
그때 누군가가 회의장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일인데?"
"율족 상단이 왔다. 항구 안전거리 밖에서 입항 요청을 하고 있다."
회의실의 방음이 너무 잘 되어 항구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다.
"입항을 허락한다. 공국의 규칙과 세금에 관해 자세히 설명해주고 편의를 최대한 봐줘라."
율족 상단의 방문 소식으로 어수선해진 김에 잠깐 회의를 쉬기로 했다. 밖으로 나와 항구를 바라보니 수백 척의 배가 즐비하게 늘어섰다.
돛에 괴이한 문양을 잔뜩 그려서 한눈에 율족 상단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예상 이상의 규모에 바칸은 생각을 바꿔 마차를 타고 항구로 향했다.
- 작가의말
보나르 사람들은 끼마다 양꼬치 먹는지 궁금합니다. 횡성 사람은 매일 한우 먹는다고 하던데.
Comment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