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비아 여행기
하루가 한 달 같았고 한 달이 일 년 같았다. 매일 황궁을 떠날 생각에 두근거리던 심장은 말 네 필이 끄는 마차에 앉아 황궁 대문을 나설 때 터질 정도로 날뛰었다.
"유모. 아틀란티스가 있는 곳은 겨울에 눈이 사람 키만큼 쌓인다고 했어."
"눈이 그렇게도 좋습니까."
"전설에 나오는 거인만큼 큰 눈사람 만들 거야. 사람 백 명이면 만들 수 있겠지?"
들뜬 공주와 달리 유모는 걱정이 한가득하였다. 본인들은 문명국이라고 우기지만, 제국 입장에서 겔트 사람은 야만족과 큰 차이가 없었다.
몰래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국왕 바칸의 수하는 노예 혹은 해적이 대부분이다. 말투가 거칠고 예의가 없으며 성질이 난폭하여 겔트 왕국에 있는 제단을 다 부쉈다고 했다.
"미그릭 백작이시오?"
"그렇다. 이제부터 왕비는 내가 모시겠다."
달그닥 소리를 내며 황궁 수비대가 돌아갔다. 그제야 진짜로 황궁을 떠나 머나먼 북방의 왕국으로 시집간다는 게 실감 난 올리비아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왕비를 모시고 아틀란티스 왕국에 정착할 미그릭 백작입니다."
"고생 많으시군."
"폐하께서 바칸 국왕에게 내리는 하사품과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조금 느리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괜찮다."
멈췄던 마차가 다시 움직였다. 유모가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고 돌아왔다.
"소문이 사실인가 봅니다."
"무슨 소문?"
"폐하께서 바칸 국왕을 총애하여 철괴와 보석을 수십만 골드 어치 내렸다고 합니다."
플레크 항구까지는 사흘 걸렸다. 올리비아는 사흘 동안 마차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보냈다.
"왕비께 아룁니다. 플레크 항구에 도착했고 하사품을 배에 올리고 있습니다. 상역이 끝나고 잡스러운 자들을 치운 후에 승선하시면 됩니다."
"알았다."
문틈으로 몰래 밖을 내다보던 유모가 가슴을 부여잡고 헐떡였다.
"유모. 어디 아파?"
"아닙니다. 너무 놀라서 그만 흉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무슨 일인데?"
"배가. 배가 황녀님 궁전보다 더 큽니다."
미지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 반씩 섞여서 올리비아의 참을성을 갉아먹었다. 체통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마차 문틈으로 몰래 훔쳐보려고 할 정도로 인내가 바닥났을 때, 미그릭 백작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비께서 승선하셔도 좋습니다."
유모 도움으로 옷매무새가 단정한지 점검한 후 마차 문을 열었다. 시원하면서도 비릿한 바닷바람이 코를 간질였다.
처음 맡은 자극적인 바다 냄새가 올리비아의 긴장을 늦춰줬다.
"안녕하십니까. 아틀란티스 왕국 차기 재상 후보인 갭릴이라고 합니다."
갓 성인이 되었을 것 같은 어린 소년이었다. 말랑말랑한 볼살과 달리 눈은 지혜와 연륜이 엿보였다.
"여긴 왕실 호위대 대장 가드와 부대장 자이르입니다. 이들은 존대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제가 대표로 아틀란티스 왕비께 인사드리겠습니다."
가드라는 호위대장은 덩치만 컸지 눈빛이 순수하고 얼굴이 앳되었다. 자이르라는 부대장은 덩치가 작아 소년티를 아예 못 벗었고 눈동자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둘 뒤에 쭉 늘어선 호위들도 나이가 15세 정도로 보였다.
"반갑다."
"부족하지만,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올리비아는 갭릴이 내민 팔에 하얀 장갑을 낀 손을 살짝 올리고 몸을 90도로 돌렸다.
"어머머."
우아한 모습만 보여줘야 한다고 마차에서 내리기 전부터 다짐했건만, 검게 칠한 길이 2백 미터 정도로 보이는 커다란 배에 놀라 저도 모르게 멈춰서 어머만 남발했다.
"드워프 장인들이 못 하나까지 직접 박아가며 만든 2만톤급 전투선 올리비아함입니다. 국왕이 왕비 이름으로 직접 명명했습니다."
올리비아는 울렁이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배 앞에 가니 새로운 난관이 기다렸다.
"괜찮습니다. 드워프가 강철 대나무로 만든 사다리여서 전혀 위험이 없습니다."
전투선이기에 화물선보다 뱃전이 훨씬 높았다. 뱃전에 닿은 사다리는 길이가 50미터에 육박해 보는 사람이 다 아찔했다.
강철 대나무로 만든 거라면 부러질 위험이 없다는 걸 머리로 알지만, 발이 땅에서 떼 지지 않았다.
"가드, 자이르. 수고해 줘."
가드와 자이르 뒤를 따르던 호위들이 막대기와 가죽을 꺼내 순식간에 조립했다.
"여기 앉으십시오."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올리비아는 가죽을 끈으로 묶어 만든 의자에 앉았다. 자이르가 앞에서 의자와 연결한 나무를 어깨에 메고 뒤에서 가드가 양손으로 잡았다.
"동대륙에서 귀족들만 앉을 수 있다는 가마입니다. 율족도 즐겨 사용하는데 마차보다 훨씬 편할 겁니다. 드워프가 만들었거든요."
자이르와 가드는 가마를 들고 사다리를 빠르게 올랐다. 올리비아를 따라서 온 유모와 하녀들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배에 올렸다.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침실 세 개에 화장실 하나 있고 주방과 욕실까지 딸린 방이었다. 유모나 하녀는 말할 것도 없고 책을 많이 읽어 박학다식한 올리비아조차 감탄에 할 말을 잃었다.
"수도는 황궁에도 있으니까 사용 방법은 아실 겁니다. 이건 여닫는 꼭지고 이건 물세기를 조절하는 꼭집니다. 그리고 여기 빨간색으로 칠한 꼭지를 틀면 뜨거운 물이 나옵니다."
"책상이나 걸상을 비롯해 찬장까지 모두 고정되었습니다. 게다가 이 방은 선박 중심에 위치하여 배가 웬만큼 흔들려도 느낌이 없을 겁니다. 혹시 흔들림이 감지되면 책상이나 걸상을 붙잡으시면 됩니다."
"해적섬 북부에서 나는 나무로 만들었습니다. 불에 안 타는 성질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불이 나도 이불 따위만 탈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 당황하지 마십시오."
"황궁에서 뵙던 분들은 하나도 안 보이는구나."
"국왕은 존 대장군과 톰슨 참모 그리고 드레이크 해군 제독과 본드 기병대장과 함께 해적섬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드래곤으로 의심되는 괴물을 발견했다는 소문이 얼마 전에 영지로 전해졌습니다."
"위험한 일에 늘 직접 나서더냐?"
"걱정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주먹으로 트롤과 오우거도 때려잡으신 분입니다. 해적섬 일이 끝나면 마중 나온다고 했으니 영지 도착 전에 만날 것입니다."
묵직한 칙 소리와 함께 배가 움직였다.
"방에 있는 게 답답하시면 갑판에 가셔도 됩니다. 미리 말씀하시면 호위대를 준비하겠습니다."
"구경 좀 하고 싶구나."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십시오. 호위대를 불러 밖에 대기하겠습니다."
요란한 머리 장식과 치렁치렁 불편한 치마를 벗고 간편한 차림을 했다. 푼 머리는 대충 묶어서 모자 밑에 감추고 유모와 하녀들과 함께 문을 나섰다.
갭릴과 호위대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다리를 타고 갑판으로 올라가니 어느새 플레크 항구가 멀리 보였다.
"돛을 접었는데도 이토록 빠르다니."
"노 젓는 배가 아닙니다. 자세한 원리는 저도 모르고 드워프 기술이라고만 압니다."
밑에서 올려다볼 때처럼 위압감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길이는 2백 미터 정도이고 넓이도 60미터 정도 되는 배는 여전히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더구나 쇠뇌로 보이는 무기들이 뱃전에 가득 달려있어 무섭게 했다.
"드워프가 만든 쇠뇌입니다. 사격 거리가 2백 미터 정도 되죠. 웬만한 해적선은 불화살 한 대만 쏘면 접근하기 전에 끝입니다."
"고작 불화살 하나로?"
"특별히 만든 불화살로 기름 주머니를 여럿 달았습니다. 화살을 장전한 다음 발사 직전에 주머니에 불을 답니다. 해적선에 꽂힌 다음 주머니가 타서 사라지며 안에 기름이 쏟아지죠. 물은 물론 모래를 뿌려도 안 꺼지는 불입니다. 게다가 열기도 대단하여 비 오는 날에도 엄청나게 빨리 태웁니다."
"이건 무엇이냐?"
시간이 흘러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졌다. 책으로만 보던 세상을 직접 마주 서며 왔던 두려움이 호기심과 흥분 그리고 기대 등으로 대체되었다.
"투석기입니다. 발사대는 탄성이 생명이어서 따로 분리해 보관했습니다. 전투 발생을 알리면 7분 안에 투석기 발사대를 전부 조립할 수 있습니다. 작은 배는 불화살이면 끝이고, 혹시 모를 대형 선박을 대비한 것입니다. 아마 일 년에 한 번도 쓸 일이 없을 겁니다."
배 앞으로 가니 쇠로 만든 커다란 충각이 눈에 들어왔다.
"주물이 아닌 단조입니다. 드워프 솜씨죠. 이거면 강철로 만든 배에도 구멍 뚫을 수 있습니다."
"강철로 만든 배?"
"2천톤급으로 치는 강철 선박이 영지에 하나 있습니다. 국왕이 타고 해적섬 북부로 갔습니다. 드워프들이 경험을 조금 더 쌓으면 오천톤급도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가 선장실입니다. 안을 보시면 키가 여럿 있습니다. 이 배는 와륜이라는 거로 전진하고 방향을 바꿉니다. 전방 와륜과 후방 와륜 그리고 측면 와륜을 따로 통제한다고 하는데 저도 잘 모르는 부분입니다."
배에는 신기한 것들이 많았다. 바다 풍경도 늘 똑같지만, 가끔 섬이라도 보이면 커다란 희열이 느껴졌다. 올리비아는 여행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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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정박. 하루 정박. 물 보충하고 물고기 잡는다."
선원들이 빈 나무통을 보트에 싣고 조금 먼 곳에 있는 섬으로 향했다. 다음 물 보충할 수 있는 섬과 거리가 꽤 있기에 하루 내내 정박하며 물을 최대한 길어와야 한다.
"관자 구이 드신 적 있습니까?"
"황궁은 바다와 거리가 멀어서 빨리 상하는 해산물은 맛보기 힘들다."
"자이르. 저기 조개가 많이 사는 곳이다. 크고 싱싱한 놈으로 몇 개만 따와."
자이르가 옷을 입은 채 바다에 풍덩 뛰어들었다. 바다로 잠수한 자이르는 5분이 되도록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부대장이 위험한 것 아니냐?"
"마나를 2단계까지 익혔습니다. 10분 정도 더 있어도 위험하지 않습니다."
"부대장 나이가 얼마지?"
"열둘일 겁니다."
"내년에 열둘이다. 지금은 열한 살이야."
가드가 불쑥 끼어들었다.
"미안. 잠깐 헷갈렸어."
'부대장이 2단계니까 대장도 최소 2단계겠지? 생각보다 인재가 넘치는 왕국이구나.'
제국에도 단계를 빠르게 높이는 편법들이 있기에 놀라진 않았다. 그러나 편법이라고 부르는 만큼 성공 여부가 확실치 않다. 시도하는 데 큰 대가가 필요해 아무한테나 쓸 수도 없다.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지만, 두 명이나 성공했다는 건 아틀란티스의 저력이 만만치 않다는 뜻이다.
약 10분 정도 지난 후 자이르가 망태기 두 개에 커다란 조개를 가득 채워서 올라왔다. 망태기를 먼저 갑판 위로 던진 자이르는 손바닥에 빨판이라도 붙은 것처럼 뱃전을 타고 올라왔다.
"마나를 응용한 것인가?"
"그렇습니다. 대부분은 국왕이 가르친 대로 익히는데 저놈만 배운 이상으로 써먹습니다."
자이르는 소금기 씻으러 가고 가드가 조개를 손질했다. 주먹으로 단단한 조개껍데기를 쉽게 부수는 모습에 올리비아는 물론 하녀들도 크게 감탄했다.
"화로랑 적쇠 가져왔어."
어느새 새 옷으로 갈아입은 자이르가 화로와 적쇠를 들고 왔다. 갭릴이 숯이라고 부르는 시커먼 것에 기름 몇 방울 떨구고 불을 붙였다. 숯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궈졌다.
가드가 잘 손질한 관자를 깨끗한 물에 씻은 다음 칼집을 넉넉히 냈다.
"이거 영지에서 만든 버터입니다. 제국산보단 맛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제 입맛엔 최곱니다."
관자에 버터를 바른 다음 숯불에 구웠다. 가끔 녹은 버터가 숯불에 떨어지며 칙 소리와 함께 고소해 죽을 것 같은 냄새를 풍겼다.
하녀들은 유모 눈치를 보며 몰래 침을 꼴깍거렸다. 정작 유모 본인도 콧구멍을 벌름거리느라 자신들을 책망할 정신이 없다는 사실도 모르고.
- 작가의말
둘이 함께하는 로맨스는 젬병입니다. 그래서 남자 따로 여자 따로 쓸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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